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7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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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이 어찌될지 궁금했던 책은, 그야말로 오랜만이었다. 

책의 중간을 읽다가 맨 뒤를 펼치면, 책을 그냥 쓰레기통에 쳐박는 것과 다름 없다는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은 지 수 년 이지만, 어지간히 날고 기는 미스테리 스릴러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뒤가 궁금' 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맨 뒤를 펼치고픈 욕망과 한없이 싸웠다!!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 다음은?" "아 빨리 말해봐~~!!!" 라고 안달하는 그 즐거움.

정말 오래간만에 '이야기의 힘'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과거를 미스테리하게 숨긴 주인공도 아니고, 중첩되어 복잡 미묘한 플롯을 가진 것도 아니고. 

지나치다고 느껴질 만큼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지만 그 길의 끝이 궁금해 미칠 것 같게 만드는, 우직하게 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이야기의 힘, 말이다. 


이야기의 첫 머리에 주인공 기현은 성매매를 하는 여성을 한 명 구해 차에 태운다. 여성에게 선불로 넉넉한 화대를 지불하고, 기현은 한 모텔 방 으로 그 여성을 들여보낸다. 방 안에는 한 남성이 누워있다. 기현이 낙향하기 전에는 몇 년 동안 기현의 어머니가 그 성인 남성을 등에 업고 창녀촌을 전전했다고 한다. 창녀가 들어간 모텔 방에 누워 있는 남성에게는 두 다리가 없었다. 기현의 형인 우현의 다리가 잘려나간 것은 5년 전이었다. 장래가 촉망되던 명문대생 우현은 기현이 모르는 새에 군대에서 두 다리가 잘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현은 자신의 형의 두 다리가 잘려나간 것에 대한 자책감을 갖고 있다.


 이것은 '가족' 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디서 읽었더라.

가족이란,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인 동시에 가장 큰 짐이라는, 내용을.

이 이야기는, 그 내용이 담겼던 문장 자체가 그냥 멋에 겨워 쓴, 무의미한 문장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애초에 삶 자체가 짐이 가득한 선물인걸. 


 꽤 오랫동안 가출했다가 낙향한 기향은 다리가 잘려나간 형을 업고 사창가를 전전하는 어머니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기현은 어머니를 보며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을까? 짐을 지고 가는 어머니? 선물을 지고 가는 어머니? 

기현이 어머니를 본 것은, 작은 개인 심부름 센터를 하는 기현에게 온 의뢰 때문이었다. 상당한 착수금과 함께 어떤 여성을 미행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알고보니 그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 후로도 기현에게는 자신의 어머니를 미행하라는 의뢰가 끊이지 않고, 생활비에 쪼들리던 기현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의뢰를 받아들인다.

다리를 잃은 뒤 주기적으로 성충동적인 발작을 일으키는 형 우현. 특별한 비밀을 가진 어머니, 항상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화단을 가꾸는 아버지. 평범한 중상층보다 약간 더 위쪽 포지션이었던 기현과 우현 가족에게 과연 어떠한 과거가 있었을까? 

결말이 궁금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오래간만에 한 자리에서 책 앞표지와 뒷표지를 다 봤다. 몇 초 만에 맨 뒤로 넘길 수 있었지만, 욕망을 참고 참아 두어시간 동안 한 장씩 맨 뒷 페이지를 향해 읽어 넘겼다. 그렇게 책장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덮고 난 뒤 한참동안 이야기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우현과 기현 형제는 물론, 그들 부모님의 삶까지 지배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지극한 파괴성과 삶의 냉혹함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얽매여 살고 있을까. 불현듯 그 거대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얼마전에 봤던 [이웃집에 신이 산다] 는 영화가 떠올랐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괴롭히기 위해 매일매일 기상천외한 규칙들을 만들어내고, 자연재해를 일으키고, 사고를 일으키는 내용이 있었다. 인간들을 괴롭히기 위해 창조해낸 규칙 중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같은 것과, "배우자가 있을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와 같은 것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일종의 착란과도 같다. 정신병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지 않나. 

자기 자신을 온전히 타인에게 맡긴다거나, 타인의 모든 것 - 빚이나 병이 있는 가족 등 까지- 떠안는 일 따위는, 상식적으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리해야, 그 어떤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곤 하는 사랑에 빠진 인간들을 설명할 수 있을터다. 그리해야, 사랑 놀음은 결코 행복하거나 달콤할 수 없다는 나의 주장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터다. 아니 그런가? 1초의 행복과 달콤함을 위해 남은 모든 시간은 괴롭고 화나고 슬프고 우울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외로움이라는 선천적 질병 앞에서 사랑이라는 모르핀을 취할 수 밖에 없다. 희망 없는 삶 속에서 유일한 빛은 사랑이다. 1초의 행복을 위해, 1초의 달콤함을 위해, 사람들은 마약쟁이처럼 매달리고, 구걸하고,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기억은 있다. 마치 남에게 들키면 안되는 불법적인 일처럼 꼭꼭 숨겨놓은 그 곳에 말이다. 

이야기의 여운 속에서 한참을 허덕이다가 [식물들의 사생활] 이란 제목에 시선이 머물렀다. 

온갖 종류의 식물이 떠올랐다. 잡초, 푸성귀, 벼, 보리, 배추, 무우, 브로콜리, 피망, 양상추부터 개나리, 진달래, 프리지아, 히야신스, 물망초 등의 꽃은 물론, 단풍나무, 소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 미류나무, 밤나무, 잣나무 이 작품에 언급된, 야자나무, 물푸레나무 등까지. 식물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보다 볼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 우리 집 뒤의 산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빼곡한 숲을 떠올려도 그렇다. 상상의 범위에도 담지 못하는 엄청난 뿌리들이 서로와 얽혀있다. 얼마나 많은 나무와 풀들이 서로에게 얽혀있을까? 어지간한 비가 와도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그 어떤 태풍이 몰아쳐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굳게 얽혀있다.

 사람들도 그렇지 않던가.

애인의 스마트폰을 몰래 열어 전화부를 열어 보면 보이는 수 많은 사람들. 마치 집 뒤의 산이 떠오를 만큼 가득 찬 나무처럼 빽빽한 이름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과의 관계를 모두 알 수는 없다. 우연히 문자나 카톡 메시지를 통해 흙 밖으로 비죽이 솟아나온 뿌리를 본 연인처럼 히스테리를 부려봐도 결코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관계의 뿌리들이 어디에든, 누군가와든 닿아 얽혀있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 사랑의 기억이 묻혀있다. 당신과 나만 아는 곳. 그 곳에. 


 이 작품에서 기현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오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 아버지, 어머니, 형제의 뿌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뿌리는 대부분, 사랑으로 얽혀있다. 딱히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 드러내려 한 적도 없으나, 세월의 흙이 켜켜이 덮여 저절로 숨겨진 비밀스러운 어찌보면 '대부분의' 삶들.  (재미있게도, 가족들의 뿌리를 파헤치는 기현의 뿌리는 독자들만이 볼 수 있다.)


 뿌리는 흙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한다.

함부로 누군가의 뿌리를 파헤치다가는, 그 누군가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지극히 폭력적이고, 파괴적이기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점철된 뿌리는, 또 다른 사랑으로 파헤쳐진다. 사랑과 사랑이 얽히고, 시간속에 묻힌다.

삶이라는 식물은, 그렇게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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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겨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8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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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기둥' 으로 세계적인 역사소설작가가 된 켄 폴릿이 야심차게 뽑아든 칼은 '20세기 3부작' 이었다.
3부작 중 1부인 [거인들의 몰락] 은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은 주인공들은 각자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리고, 세상 그 어떤 부모가 자식을 전쟁에 보내고 싶을까?
그것도, 전쟁에 참전해 본 적 있는 부모들이라면. 적군의 총알에 뼈가 부서지고, 상대의 몸 안에 쇳덩어리를 박아넣고, 회오리쳐 도는 작은 쇳조각에 고향 친구의 두개골이 산산조각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한, 전쟁의 참상을 몸으로 겪어본 부모라면 더더욱 자식들을 전쟁의 포성 밑으로 밀어넣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서방 승전국들은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 이라며 자위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승전국을 주축으로 한 세계연합의 창설은 지지부진했고, 피해를 본 국가들은 독일에 무리한 전쟁보상금을 떠넘겼다. 소비에트 혁명 이후 러시아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전후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를 틈타 일본은 과격한 팽창정책을 펼치며 동남아시아와 중국은 물론 러시아로까지 탐욕의 손길을 뻗쳐나갔다. 유럽 전체가 전후 혼란을 적절히 수습하지 못하는 사이 러시아의 볼셰비즘에 맞서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과격한 방식으로 정부를 장악했다. 심지어 영국 런던 한복판에서 파시스트들이 도로를 점거하기도 했다. 스페인에서는 파시스트와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사이에 내전이 일어났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밀약을 맺은 히틀러의 독일은 기어코 폴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스까지 단숨에 진격한다.   


[세계의 겨울] 역시 [거인들의 몰락] 처럼 이야기의 중심을 크게 셋으로 나눠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겪는 영국과 미국의 상황, 독일 내부, 러시아의 상황을 각 국가에 살고 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풀어내는데 시기적으로는 히틀러의 집권부터 미국의 원폭투하, 전후 처리와 독일의 분단까지 다루어진다. 전작의 주인공들도 모두 등장하며 상황에 따라 일부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자식들이 이번 작품의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겠다.  
분량의 압박에도 불과하고 굉장히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아냈다. 스페인 내전도 어느정도 다루고 있고, 진주만 폭격과 노르망디 상륙작전, 마른 강 전투, 맨해튼 프로젝트,루즈벨트 대통령의 재선과 사망, 독일 분단 등 잘 알려진 역사전 사건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인물들의 역할을 배정하고, 걸맞은 드라마들을 적절하게 그려냈다. 대단히 복잡한 작업이었을텐데 인과의 고리가 빠지는 부분 없으면서도 생략할 부분들은 과감히 생략하며 대단히 스피디한 전개를 보여준다. 단어 그대로 인물들이 '휩쓸려간다' 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신없이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감정과 정서의 전달도 명확하다. 

전작이라 부를 수 있는 '거인들의 몰락' 에서 에설과 모드라는 두 여인이 인상적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데이지와 카를라가 그녀들을 대신한다. (누구의 딸들인지는, '거인들의 몰락' 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전작 주인공들의 자식들이라 인물 소개는 한 명도 못하겠다. 전작은 누가 뭐래도 절절한 로맨스니까.)
미국 태생의 데이지는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인물로 거침없는 남성 편력을 지니고 있으며 화려한 이미지의 여성이고, 카를라는 독일 태생으로 남자들보다 영특해서 충분히 의대에 진학할 실력이었지만, 나치의 집권과 전 국가적인 전쟁준비로 인해 진학 자체에 실패하고 결국 간호사에 머무르게 된다. 이 두 여성을 통해 당시 영미와 독일의 극심한 차이를 보여줌과 동시에 모든 국가를 휘감은 전쟁의 참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 펼치기(접힌 부분 에는  전작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실 큰 스포이기도 하지만, [거인들의 몰락] 에서는 주요한 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읽는 내내 자꾸 '왕좌의 게임' 이 떠올라서, 정말 조마조마 했었는데, 다행히 켄 폴릿은 조지RR마틴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의 겨울] 에서는 달랐다. 이번에는 착한 사람, 용감한 사람들이 먼저 죽어나간다. 마치 마틴옹이 빙의한 듯이...ㅠㅠ
진짜 깜짝깜짝 놀랐다. 1차 세계대전의 업화 속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은 주인공들은 때론 자신이, 그리고 때론 자신보다 소중한 자식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 스러져간다. 2권은 정말 내내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 앉았다. 죽지 않으면 죽을만큼 고통을 겪기도 하고. ㅠㅠ



 

펼친 부분 접기 ▲



 
두께는 상당하지만, 굉장히 잘 읽힌다. 술술 넘어간다.
실제 역사에 대한 고증도 대충 하지 않았다. 역사 학자와 수많은 에이전트들이 달라붙어 모니터를 했다. 당시 독일에 대한 고증은 당시를 겪은 독일인들이 감수를 했다. 허구와 실재의 완벽한 조화. [거인들의 몰락] 과 [세계의 겨울]을 통해 1,2차 세계대전에 얽힌 당시 열강들의 이익관계나 외교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후 처리 과정을 통해 동구권의 소비에트 연합 가입 과정이나 독일의 분단 과정도 무척 상세히 그려 놓았는데, 더불이 우리 나라의 분단 과정도 함께 읽혀서 가슴 한쪽이 아릿했다.
소비에트 연합의 탄생 과정도 물론이지만, [거인들의 몰락] 에서도 줄기차게 시도해온 세계연맹의 창설 과정도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북한에 대한 유엔의 경제 제재 조치가 내려졌다.
단숨에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쥐를 자꾸 구석으로 몰아 넣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임은 역사가 알려주고 있다. 
독일도, 일본도 궁지를 벗어나 목숨을 부지할 방법은 가로막고 있는 적을 물어 뜯는 수 밖에 없었다. 나치에 환호한 독일 국민들도, 아시아 일대에 큰 고통을 안긴 일본도 가로막은 강대한 적을 물어 뜯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전쟁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만, 수많은 피를 양분으로 만들어진 세계 연합은 전쟁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결과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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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4
윌리엄 포크너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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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광야.

하늘의 독수리가 보기에 마치 신이 연필로 선을 그은 듯, 얇고 검은 선이 때론 직선으로 곧게, 때론 완만한 원을 그리며 벌판을 가로지르고 있다. 황야를 가로지르는 검은 선은 이윽고 드문드문 연둣빛이 보이는 초원지대에 접어들고, 곧이어 무성한 침엽수림을 만난다.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고고한 침엽수림. 

검은 선을 따라 시커먼 기운을 토해내며 느릿느릿하게 달려가던 쇳덩어리는 그 앞에서 멈춰서고 만다. 

이 숲은 통과할 수 없다.

아직은.

쇳덩어리는 잘 몰랐지만, 쇳덩어리의 창조주이자 검은 선을 그린 인간들은 알고 있었다. 이 숲은 누가 누구에게 팔았고, 또 그 누가 다른 누군가에게 팔았기에, 함부로 나무들을 베어 넘겨 계속 선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들은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매매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매매권을 주장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매매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아무도 그만큼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했으나 생각하지 않은 척 했다.


 거대한 숲의 관점에서는 개미나 여우, 토끼등과 구별하기 힘든 크기였으나 개미나 여우, 토끼의 시점에서는 마치 태산처럼 거대한 곰 한마리가 있었다. 곰의 발 밑에 깔려 으스러진 잡목 부스러기와 각종 낙엽, 나무 그루터기와 드러난 뿌리의 일부, 흙 등은 곰의 한 쪽 발에 발가락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개의치 않았다. 곰도 그다지 개의치 않았는데, 곰을 뒤쫓는 인간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곰에게서 발가락을 앗아간 그 인간들이었다. 

 곰은 인간들이 두렵지도, 밉지도 않았다. 곰이 연어나 토끼, 여우, 나무 따위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미워서 나무를 긁는게 아니었고, 두려워서 연어를 잡거나 토끼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곰의 뒤를 쫓는 것은 수 년 간 같은 인간들이었다. 

 1년 내내 뒤쫓는 것은 아니었고, 한차례. 긴 잠에 빠져들기 전에 찾아왔다. 그들은 해마다 몇 주간 숲에 머물며 사냥을 했다. 숲 한쪽에 지어놓은 튼튼한 오두막은 꽤나 아늑해 보였고, 곰은 몇 차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인간들은 매번 적당한 수의 짐승을 사냥하고 오두막을 떠났다. 물론 인간들의 최종 목표는 곰임을, 그 곰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아직 인간들은 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비록 그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생명이 생명을 사냥하는 일은, 숲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기에 곰은 인간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약해지면 먹힌다. 곰은 인간들이 무기로 삼는 개들을 해치웠고, 인간들의 개는 곰을 두려워했기에, 곰은 인간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날 곰은 지난 해 처음 온 새파랗게 어린 인간과 마주쳤다.

소년은 자기 몸 만큼이나 긴 쇠붙이를 쥐고 있었고, 눈동자는 두려움에 가득차 있었다.

그 쇠붙이는 제법 매서웠지만 애초에 인간은 곰에게 너무나 허약한 존재였다. 어디든 베어물면 두부처럼 으깨어졌고, 앞발로 후려치면 마른 덤불처럼 으스러졌다. 피로 가득찬, 움직이는 가죽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지니고 다니는 쇠붙이들은 제법 매서웠지만, 애초에 인간은 곰에게 두려움이 대상이 아니었다. 곰은 적의를 보이지 못하는 소년이 하찮았다. 구태여 앞발을 휘둘러 경직된 가죽부대를 터뜨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곰은 소년의 눈빛에서 다른 느낌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두려움이나 미움, 증오 같은 감정이 아니라, 곰이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것. 지금은 잃었지만, 언젠가 본 적 있던 갓 태어난 자신의 새끼를 보았을 때 느꼈을 지도 모르는 그런 것. 


소년은 언젠가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자신의 몸뚱이 하나 말고는 다 무의미할 것이며,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팔 수 없듯, 대지와 수목도 사고 팔 수 없으며, 종국에는 자신의 몸뚱이 하나조차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의 품 안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될 것임을. 사고 팔 수 없는 것을 사고 팔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누군가, 무언가가 생기게 되리라는 것을. 인간들이 기묘한 쇳덩어리를 이용해 어머니 대지 위에 흩뿌린 피와 살점들이 그 댓가가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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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52) 배트맨 3 : 가족의 죽음 세미콜론 배트맨 시리즈
스콧 스나이더 외 지음, 이규원 옮김 / 세미콜론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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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한참 전에 읽었는데, 뒤이어 나온 [제로이어-비밀의 도시] 와 [제로이어-어둠의 도시] 를 읽은 뒤 다시 읽으니 새삼 와닿는 대목들이 있어 다시금 리뷰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올빼미 법정]과 [올빼미의 도시]도 리뷰는 안 했더라.)

배트맨 시리즈는 '뉴52'라는 타이틀로 DC유니버스가 일종의 리부트를 한 작품들 중 가장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사실상 현재까지도 DC코믹스 전체를 하드캐리하는 중이다. 


뉴52 배트맨 시리즈의 3번째 국내 번역본인 [가족의 죽음]에서는 일단 배트맨이 조커를 제압한 몇 년 후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 중 '돌메이커' 라는 또다른 빌런에게 조커는 얼굴 가죽을 뜯긴(!!) 뒤였다. 배트맨은 조커를 제압하고 그 시신을 찾지는 못했지만, 뜯겨진 조커의 얼굴가죽을 발견할 수 있었고, 배트맨의 동료들(로빈, 레드 로빈, 나이트윙, 배트걸)과 고담시는 조커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고담 시경 증거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조커의 얼굴가죽이 도난당하면서 시작된다. 

배트맨은 과연 조커의 얼굴가죽을 훔쳐간 범인, 조커를 자칭하는 그 범인이 진짜 조커인가? 그리고 과연 조커라는 인물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한다. 아캄 수용소를 찾아가며 과거의 행적을 뒤쫓는 사이, 범인은 알프레드를 포함한 배트맨의 동료들을 납치하여 배트맨에게 날릴 절망의 일격을 준비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배트맨 만화를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국내에 정발된 거의 모든 작품들을 읽긴 했는데, 작화로 보나 내용면으로 보나 가장 충격적인 이슈가 바로 이 작품이었다.

깨끗하게 도려내진 자신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 쓰고 등장하는 조커라니. 상피조직이 다 드러난 얼굴에 얼굴 가죽을 무슨 의료용 스테이플러 같은걸로 가죽 밸트에 연결하고, 입 부분에 줄을 매달아 뒤집어 쓴 모습은 그림 그 자체로만 봐도 불쾌할 정도로 잘 표현해놓았다. 

표지부터 그로테스크하고, 배트맨의 가면 뒤에 숨겨진 브루스 웨인을 알고 알프레드부터 납치하는 그의 수법 역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엄청나게 끔찍하긴 하지만, 자신의 폭력적인 범행 사이에 숨겨있는 깨알같은 '조크' 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절묘하게 잘 배치했다. (엔딩까지 끊이지 않는 조커의 조크라니!!) 스콧 스나이더의 위트와 센스가 돋보였고, 어떻게 그의 작품이 DC코믹스 전체를 하드캐리 할 수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전에도 언급했었지만, 배트맨 시리즈의 포인트는 '배트맨을 얼마나 참신하게 괴롭히는가' 일 것이다.

뉴52시리즈는 그 첫 작품이었던 [올빼미 법정]에서부터 엄청나게 강력한 '탈론' 을 통해 배트맨을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괴롭히더니, [가족의 죽음]을 통해서는 정신적으로 탈탈 터는데, 정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 


조커가 아직 조커라 불리지 않고, '레드 후드 리더' 로 불리던 무렵으로 되돌아가는 [제로이어-비밀의 도시] 를 읽고 다시 읽으면 새롭게 눈에 들어오게 되는 장면들도 있고, 조커에게 일말의 연민을 느끼게 하는 장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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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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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작가만큼 호불호가 크게 나뉘는 작가도 많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편에 속하는데,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특히 여성 독자층 중에 정이현 작가를 싫어하는 분들이 꽤 많다는 것을 꽤 여러번 느꼈다.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달콤한 나의 도시]는 특정 연령대에 어필할 만 한 매력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가졌지만, 통속성이라고 폄하 할 수도 있겠고, [너는 모른다] 는 상당히 재미있으나 전반적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랑의 기초]는 딱 봐도 '냉정과 열정 사이'의 기획을 모방한 상품에 가까운 작품이니 그 역시 '깔' 거리가 무궁무진하다.

무엇보다 정이현 작가의 데뷔 작품집과 다름없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 는 동성의 팬들에게 불편을 줄 구석이 많다. 

우리 사회 안에서 속물적으로 소비되(하)는 여성성을 너무나 날카롭게, 관용 없는 차가운 시선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정이현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역설적으로 여성들의 시각을 통해 우리 사회가 단지 '여성' 이라는 이유로 그녀들에게 행하는 수많은 유무형의 폭력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이현 작가의 데뷔 작품집이나 다름없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작품들 역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의 연애, 결혼, 직장, 동성애 등의 소재들을 생활에 밀접시켜 다양하게 풀어내고 있다. 남성으로서 때로는 읽기 불편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 위한 피할 수 없는, 다소 속물적이라는 비판을 들어 마땅한, 선택들에 대해 진지하게 그려내고 있다. 능동적으로 남성들의 세계에 비집고 들어가려는 여성들의 시각으로 비틀린 우리 사회의 비틀린 남성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단지 '여성' 이란 이유로 당연스레 가해지는 수많은 유무형의 폭력들, 그리고 그것을 감내하기 위한 여성들의 전략과 전술, 타협과 대결을 대해 다채롭게 그려낸다.

 

표제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 는 주인공 여성이 사회적인 지위가 번듯한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처녀성을 잘 지키면서 적당히 즐기는 내용이 펼쳐지는데, 우리 사회가 한 때, 어쩌면 지금도 일부, 여성의 성경험 유무를 인격, 인성, 인생과 결부시키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 오래 된 일도 아닐터다. 

주인공 유리는 때론 여러 남자들을 만나며 잠자리만은 피하기 위해 낡은 속옷을 입고 다니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처녀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인데,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상승시켜 줄 수 있는 남성을 위해 가질 수 있는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20~30년 안쪽이었을 것이다. 여성에게 혼전순결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가치였던 시절이. 지금 친구들은 콧방귀를 뀌겠지만, 90년대 소설만 찾아봐도 '첫날 밤 이불 위의 붉은 꽃' 따위의 메타포를 수두룩하게 찾아볼 수 있을터다. 

우리 사회가 그랬다. 남성들이 그랬다. 불과 내가 10대이던 시절만 해도, 그렇게 원초적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트렁크 안에서 소녀의 시신을 발견하고 야릇한 관계인 회사 상사에게 연락을 하지만 결국 스스로 모든 걸 처리하는 여성이 등장하기도 하고(트렁크), 아빠 차를 한 번 몰아보고 싶어하는 짝사랑하는 용이오빠의 부추김이 있었지만 오히려 한 술 더 떠 부모님을 상대로 자작 유괴극을 펼치는 여고생도 등장한다(소녀시대). 마녀처럼 주변 사람들을 파국으로 이끄는 특별한 기술을 지닌 여성도 등장하고(순수),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끊긴 동성 연인을 찾으려는 레즈비언 여성의 이야기(홈 드라마)는 소수 중에도 소수의 이야기를 다뤄낸다. 결국은 현실에 좌절하고 마는 비만여성의 이야기(신식 키친)도 빼놓을 수 없다. 

작품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20세기 모단 걸; 신 김연실 전'은 일제 강압기에 당당하게 일본으로 유학간 김연실이라는 여성이 한 남성의 찌질함 때문에 결국은 사회의 편견에 굴복하고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되지만,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정도의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김연실도 남성의 폭력에 의해 인생이 '바뀐' 것이었을 터. 


사회에 맞서 '남녀평등'!!! 을 외치며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순응하고, 순응하는 것 처럼 위장하고, 타협하고, 타협하는 것 처럼 위장하며 살아갈 것이다. 

책 말미의 해설(이광호)에도 언급되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녀들의 '위장술' 과 '정치학' 을 참으로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다이제스트로 훑어본 정도였던 [여자가 섹스를하는 237가지 이유] 라는 책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확실히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복잡한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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