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심령학자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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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 우리나라에서는 "공상과학소설" 이라고 번역된다.

내 머릿속에서 SF는 빛의 속도로 광활한 우주를 누비는 이름모를 첨단과학 엔진을 장착한 우주선으로 이런 저런 행성에 조성된 최첨단 콜로니 도시들을 들락날락하며 각양각색의 외계인들과 갈등을 빚으며 사건을 일으켜야만 하는 장르였다. 아니면, 인간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깊고 깊은 심해나 지구의 멘틀 아래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거나, 타임머신 등이 등장해야만 했다. 최소한 인류의 자리를 노리는 로봇이나 인공지능 정도는 등장해야지!! 

 나의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려준 작품이 바로 '어슐러 르 귄' 여사님의 작품들이었다.  

사실 'SF'는 '미래' 와 어떠한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어슐러 르 귄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 과학과 마술의 경계가 애매해서 과학과 종교가 치열한 갈등을 빚던 시기,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천문학자의 이야기를 그리기도 했다.

 이야기를 통해 "과학" 그 자체를 그린 것이다. 그 작품을 맞닥뜨렸을 때의 짜릿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고심령학자] 에도 미래는 등장하지 않는다.

 광활한 우주도, 이름모를 첨단과학 엔진도 등장하지 않는다. 깊은 심해나 타임머신이 등장하지도 않고, 외계인과 우주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배명훈 작가도 이런 영역을 무척 잘 다루긴 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뿌리는 언제나 그 곳에 닿아있지 않았다. (살짝 거친 적은 있을지언정.)

배명훈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고고심령학" 이라는 기찬 아이디어로 "심령" 을 "학문" 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빙의"를 일종의 과학(사회)현상으로 치환하여 전통과 문화를 관통하는 신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런 장르의 팬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우와' '우와아아!!!!!!!!' 할 수 밖에 없었다.


"심령학적인 관찰을 통해 고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학문. 

고고심령학은 대강그렇게 정의되는 학문 분야였다. (...)

 천년 전 사람들이 쓰던 언어를 어떻게 재구성해낼 것인가? 다른 해석의 여지 없이 소리 하나하나에 정확히 대응되는 문자 체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살던 사람들이 하던 말을?

 이 질문에 대한 고고심령학의 대답은 간명하고 매혹적이었다. 천년 전에 죽은 혼령이 하는 말을 직접 들어보면 된다는 것이었다." 

p.15


작품 안에서 고고심령학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그들만의 뚜렷한 영역이 있고, 학계가 존재한다.

은수는 고고심령학계의 기린아로 문인지 박사의 제자였다. 문박사는 고고심령학의 학문적 성취가 뛰어난 학자 중의 학자였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학구적인 자세때문에 대학 중심의 학계에서는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제자를 백수로 만드는 교수를 고고심령학과를 개설한 그 어떠한 대학에서도 환영할 리 없었고, 고고심령학 역시 다른 학계와 마찬가지로 대학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수는 얼마전 타계한 문인지 박사의 마지막 수제자나  다름 없었고, 문박사보다는 유연한 편이라 현실적으로 앞길을 모색하는 중에 고고심령학에 기반한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장중인 이한철 대표의 제안으로 문박사의 개인 서재를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마치 뇌의 구조처럼 문박사가 수집한 연구 업적과 자료들을 3차원 디스플레이로 재현하는 내용이었고, 개인 소장 서적의 서지정보는 물론, 중요한 메모와 낙서등을 분리하는 작업도 필요했기에 은수야말로 적임자였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고고심령학이 대중적으로 알려질만한 큰 사건이 일어난다.

무려, 성벽, 그러니까 고대의 요새 하나가 통째로 서울에 빙의한 것이다. 고고심령학과 관계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서울의 노른자위에 자리잡고 있는 미군들까지 영향을 받게 되자 결국 서울시 당국이 나서 전문가들을 수배하면서 고고심령학 자체가 폭넓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고고심령학계에서는 이 현상을 "요새빙의" 라고 칭하며, 흔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기록이 존재하는 도시규모의 심령현상이었다.

은수는 이 거대 심령현상에 문인지 박사의 '종말론' 연구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대학 친구인 은경, 문인지 박사의 동료뻘인 한나 파키노티 박사와 함께 현상의 실체에 다가서게 된다. 


유령, 고고학, 장기, 고무줄 놀이 노래, 서울, 용산, 인도, 그리고 일제 강점기 경성.

접점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소재들을 씨줄과 날줄삼아 엄청난 작품을 짜냈다.

배명훈 작가의 작품은 [안녕, 인공존재] 부터 흠뻑 빠졌더랬다. 놀라운 상상력과 그것을 현실에 풀어내는 능력이 비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실과 인간, 그리고 사회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돋보였다. 

단편과 중편연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 모든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아쉬운 부분이 바로 드라마였다.

그의 장편은 한마디로, 매력적이긴 하지만, 유혹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이랄까.  

이것은 배명훈 작가의 감정이 절제된 세련된 문체와 간결하고 명징한 스토리 텔링 방식 때문이기도 한데, 독자들의 호흡을 가지고 놀지언정,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이 약하다고 느꼈다. 인간의 심리나 감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 텔링의 방식에 있어서 드라마의 우선순위를 약간 뒤에 두었다는 인상이 강했다. 이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배명훈 작가의 작품세계 자체가 전체적으로 드라이한 느낌이기에 통일성 면에서는 조화로운 선택이긴 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야말로 '배명훈 식' 드라마가 비로소 온전하게 드러났다는 느낌이다.

은수와 은경, 한나 파키노티, 그리고 문인지 박사와 유령 아이와 아미타브까지.

인간들의 심리가 얽히는 드라마들이 감정의 과잉 없이, 배명훈 작가만의 특유의 문체로 너무나 잘 표현되고 있다.  

드라이해도 촉촉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그 뿐 아니라, 스토리 텔링에 있어서도 크게 한 발을 내딛은 느낌이다.

마지막까지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이 파편처럼 흩어진 에피소드들이 마치 퍼즐처럼 차근차근 맞아들어가는 과정은 짜릿할 정도의 즐거움을 준다. 사실 여러 상징들을 복선으로 던져주는데, 이야기의 중심 개념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후반부에는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다 읽은 뒤에는 이 세계관의 다른 이야기들을 읽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은수와 은경의 에피소드들도 더 읽고 싶을 정도로, 모두 다 흥미롭다. 

두번 읽을때 더 재미있는 소설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새라니...

도시가 도시에 빙의한다니!!! 

상주하는 유령, 심장을 지닌 도시, 그리고 역사. 전통. 전래.

비과학인 소재들을 인문,공학, 그러니까 과학적으로 채워넣은 절묘한 이야기이다.

 

서두에 어슐러 르 귄을 언급한 이유는,  그녀가 인문학적인 통찰로 과학을 그려내는 작가이며, 내가 배명훈 작가에게 받았던 첫인상과, 앞으로 기대하는 바 역시 그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안녕 인공존재] 도 그랬지만, [타워] 같은 연작과 [신의 궤도] 같은 장편에서도 인문학적 통찰과 과학적 사유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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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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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 바람!! 

전해들은 바로는 영화와는 결말도, 해석도 다르다고 하니 영화 보실 분들은 관계 없을지도...



굉장히 짧고, 마치 영화의 씬들이 연결된 것 처럼 수많은 단락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게 정말 김영하 작가님의 장편인가? 싶었다.

어쩌다보니, 김영하 작가님 작품도 엄청 많이 읽었다.

장편은 [빛의 제국], [퀴즈쇼], [너의 목소리가 들려] 에 [살인자의 기억법] 까지.

단편집은 너댓권 읽었으니, 어지간히 다 읽었다는 의미다. 

김영하 작가는 장편과 단편의 색채가 상당히 다른 작가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나 '오빠가 돌아왔다'(단편) 와 '빛의 제국'(장편) 이 같은 사람이 쓴 소설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더랬다.

단편은 물론, 단편답게 수많은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갖가지 심상들을 녹여내지만, 장편은 "정색하고" 글을 쓰는 느낌이랄까.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유머와 위트를 던지고, 가끔은 끝모를 낙관주의를 풀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장편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새까맣고, 진득하고, 들러붙는 끈끈이처럼 비관과 고통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그러다 결국 주인공과 독자를 나락 저 밑까지 끌어 내린다. '비상구' 라는 단편이 보여줬던 유머와 위트는 간데 없는, 그야말로 비상구가 없는 잔인한 운명의 나락으로 휙 던져버린다.

김영하 작가의 장편은 독자의 오해가 없을, 적확하고 세련된 문장과 독자가 끼어들 틈 없는 적절하게 치고 빠지는 플롯으로 꼼꼼하게 설계된 '출구 없는 미로'와도 같다. 일전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 라는 작품의 리뷰에서 '꼼꼼하게 쌓아올린 레고' 로 비유했었는데, 내가 받은 김영하 작가의 장편들이 공히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다.   


그래서, [살인자의 기억법] 은 상당히 놀라웠다.

주인공이 '치매' 라는 병에 걸리긴 했지만, 플롯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심지어 결말은, 그야말로 미로에 미로를 끼얹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런 결말을 '아 시발 꿈!' 류의 결말이라고 부르는데, 가장 싫어하는 방식의 결말이다.

책이 워낙 얇기 때문에, 정색하고 다시 읽어봤다.


이 작품은 결말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장르적으로 접근해보자, 김영하 작가는 장르적 장치의 사용에도 능한 작가니까.

숭숭 뚫린 구멍들은 독자들의 참여를 요구하는 부분들일 터다. 


기억에 관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역시 놀란 형제의 놀라운 등장이었던 "메멘토" 였을 것이다.

단기 기억 상실에 걸린 주인공이 살해당한 아내의 복수를 하는 과정을 담은 메멘토는 관객들을 이 미스테리에 참여시키기 위한 장치를 하나 사용한다.

그것을 "문신". 중요한 키워드들을 몸에 새겨놓는다. 

이 문장들은 적확하지만, 앞뒤 맥락이 생략되어 있기에 수많은 오해를 낳는다. 

관객들은 주인공의 해석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 각자의 해석을 할 수도 있다.

'무엇이 진실인가?'

기억과, 메모, 그리고 해석.


[살인자의 기억법]에도 그러한 장치가 등장한다.

주인공 병수는 70대의 중증 치매환자로서 중요한 것들을 공책에 메모한다. 그리고 녹음기를 목에 걸고 다니며 중요한 것들을 녹음한다.

공책에 적힌 메모와, 녹음.

병수의 기억은 믿으면 안된다. 마치 실제 치매환자의 기록처럼 단편적으로 펼쳐지는 씬들은 모두 진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진실은 오로지 메모와 녹음 뿐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사실은 병수의 입을 통해 되풀이된다.

망상과 팩트를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두번째 읽을 때는 진실과 망상을 구분하기 위해 이런저런 장르적 장치들을 통해 여러가지 재미있는 가설들을 세우고 혼자 검증하며 놀았다.

이 작품은 두 연쇄 살인마, 병수와 주태의 대결구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병수의 딸인 은희가 있다. 병수는 은희를 주태로부터 지켜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마지막 남은 정신을 그러모아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 병수의 기억은 끊임없이 깜빡이고, 정신을 잃고 어딘가를 헤매이다가 동네 청년들이나 경찰에 손에 이끌려 정신을 되찾기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억은 딸, 은희. 

김영하 작가는 곳곳에 허방다리를 놓았다.

밟으면 빠져드는 늪이다.

장르적인 접근으로는 수많은 가설을 세울 수 있는 장치들을 요소요소에 박아 넣었다.


 가장 먼저 든 의문은 "박주태는 진실인가, 허상인가? " 였다. 

병수는 박주태라는 인물의 명함을 잘 챙기고, 공책에도 적어 놓았다. 장치에 따르면 박주태라는 인물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병수와 같은 연쇄살인마임은 확신할 수 없다. 병수는 박주태가 연쇄살인마라는 내용을 적어놓지도 않고, 녹음해 놓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혼잣말로 되뇌이기만 한다. 작품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이 녹음기에 녹음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분명한 함정이다. 하지만, 그 밖에 힌트는 없다.

결론, 박주태는 존재하지만, 그가 연쇄살인마라는 증거는 없다.


여기서 도출되는 또다른 가설은, 박주태가 병수의 또다른 인격일 가능성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가설이 가장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병수는 자신이 연쇄살인을 끝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끝낼 수 없었기에 다른 인격이 만들어져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의 초반부에 언급되는 세명의 희생자는 병수 안의 박주태가 죽였을 것이고, 그들 중 한명은 은희의 전 개인 요양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작품속에 "개" 가 등장하는데, 이 개 역시 장르적 장치로 읽으면, "병수의 개라고 인지하는 상황" 과 "병수 이웃집 개라고 인지하는 상황" 이 존재한다. 이것은 주인공 병수의 착각이라기보다, 실제로 다른 의식임을 드러내는 것일수도 있다. 

즉, "우리 개" 라고 대답하는 은희와, "우리개가 아니" 라고 대답하는 은희는 서로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 요양사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에.) 병수는 두명, 혹은 세명의 은희가 번갈아가며 등장해도 서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중증 치매 환자이다. 


 두번째 의문은 '안형사 는 누구인가?'  이다. 

안형사는 작품 안에서 끈질기게 병수의 뒤를 캐는 인물인데, 이 인물도 상당히 미스테리하다.

병수가 박주태와 안형사를 혼동하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안에서 안형사의 존재는 활용도가 무척 높다. 맥거핀처럼 이용될 수도 있고, 사실은 그가 형사의 탈을 쓴 살인마일수도 있다. 수많은 장르소설 안에서 경찰은 범죄를 덮는 가장 큰 위장복이 아니던가? 

 안형사가 이중생활을 하는 연쇄살인마라면 이 역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나 이미 병수가 연쇄살인마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고, 그의 개인 요양사와 친하게 지내면서 병변을 확실히 파악한 뒤, 자신의 죄를 덮어씌울 계획을 꾸몄을 수도 있다. 

이런 가설로 이야기를 읽어도, 맞아 떨어지는 대목들이 있어서 클라이맥스의 많은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김영하작가의 장편이지만, 단편처럼 신선하고 새로운 시도들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마치 페이스 북이나 인스타에 올릴 법한 짤막한 단락들, 단락 사이에 중간 점을 찍어 명확하게 전달한 '분절' 의 의미, 수많은 생략과, 없는 듯 하지만, 정확하게 작동하는 플롯 등 도전적인 실험들이 이채롭다.

주인공 병수가 앓고 있는 중증 치매 증상에 대한 병변들도 명확하다.

작가는 발로 쓴다는 말이 있다. 만화가도 마찬가지지만, 현실을 그리는 작가에게 '디테일'은 필수다.

인터뷰 하지 않는 작가에게, 취재하지 않는 작가에게 미래는 없다. 관찰과 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이 작품을 읽고 치매나 요양사에 대한 태클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완벽한 취재와 연구가 돋보이는 디테일이 여기저기서 듬뿍 느껴진다.


장르적 재미를 차치하고, 작품이 주는 '치매' 에 대한 공포는 대단하다.

나는 '자아' 란 '타자' 가 있음으로 의미가 생긴다고 믿는다. 그것이 같은 인간이건, 동물이건, '나' 는 '너' 로 인해 존재한다. 

헌데, 내 주변의 수많은 타자들이 나의 기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 사실은 내 기억과 다르고, 내가 겪었던 사건들이 내 기억과 다르며, 나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도 하나도 없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성은 "내가 나" 임을 인지하면서, 그리고 "내가 왜 나?"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짐으로써 진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증거는 대부분 '기억'에 의존한다. 타인에게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함께 했던 기억뿐이다. 치매가 무서운 이유는 그 기억들을 지워버리는 병이기 때문이고, '노화' 라는 피할 수 없는 '살아있음의 증거' 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방을 위한 노력이 없다면, 당신이나 내가 높을 확률로 피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의 지성은,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어느날 갑자기 모든 기억을 잃고, 심지어 말하고, 읽고, 쓰는 법가지 잃고, 무엇을 배워야 할 지 알려줄 부모나 선배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지성이라고 부르는 것.

어쩌면, 영혼과 가장 비슷한 것이 사라진다. 

소시오패스건, 쾌락 살인마이건, 누구에게다 동등하게 찾아오는 노년. 

이 책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은 살인마가 아니라, 노년 그 자체였다.

현대 영미문학의 찬란한 대가인 '필립 로스' 는 '에브리맨' 이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년은 학살이다.'

 그리고, 이 책은 노년을 맞은 학살자의 이야기.

[살인자의 기억법] 은 그래서, 무척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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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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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수많은 작품들 중 장편 소설만 6권 정도를 읽었다. 굳이 찾아 읽으려 했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여기저기 그의 책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읽게 됐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20대 중반에 읽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다.
'건강하게 뚱뚱한 예쁜' 소녀(건강하게 살찐다는 개념 자체가 좋았다)가 길잡이로 등장해, 기묘한 동물이 사는 다른 의식의 세계로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의 현실판 같았다.
 [상실의 시대] 와 [어둠의 저편] 을 읽은 직후였어서 얼핏 동화같기도 한 판타지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댄스댄스댄스]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접한 나에게 그는 리얼리스트에 가까운 작가였는데, 이런 망상공상가였구나, 싶었다.
주인공의 직업도 독특했고, 세상에 대한 묘사도 이전의 작품들과는 궤가 달라서 처음엔 적응하기가 꽤나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초반 장벽만 조금 넘어서니, 그런 이질적인 느낌들이 참 좋았다.
리얼리스트가 그려내는 몽상의 세계. 
'현실처럼 뚜렷한 꿈' 이란 느낌.
꿈 속이지만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있는 느낌이 뚜렷했다. 
그래, 백일몽, 같달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한 낮에 길 위에서 문득 꾸게되는, 그런 꿈 같았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해변의 카프카] 이다.
본격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좋다고 느낀 책이었다. 외려 일부 골수팬들은 이 책을 기점으로 외면하게 된 듯도 하지만.
(어쩌면 좀 더 미래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 전반을 다룰 때, 이 책을 어떠한 기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지금 잠깐 했다.)  
 [해변의 카프카]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와 이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관의 공유'까지는 아니고, 망상공상의 범위는 현실에 가까웠지만, '비현실적인 현상이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일어나는 세계를 그린다' 는 연장선에 함께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속 판타지를 다루는 기술이 더 익숙해져서, 되도 않게 '판타지 리얼리즘' 이라는 역설같은 명칭이라도 붙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 연장선에는 당연히 [1Q84] 도 놓인다. 하지만, [1Q84] 는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던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판타지에 무게중심이 확 쏠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암살자와 종교단체가 등장하고, 패러렐월드가 차용되었으며, 책 속 인물들까지 현실에 등장하는 [1Q84]는 여러모로 장르적 장치들이 활용된 작품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여러모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물론, [1Q84]와 부모 자식처럼 닮아있다.
특히, [1Q84] 에서  후카에리의 소설 '공기번데기' 와 관련 있는 리틀피플들이 현실에 등장하는 부분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그림 속에서 이데아와 메타포가 현실에 구현되는 부분의 아이디어와 상당히 닮아있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꽤나 묘한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화가인 '나' 에게 얼굴없는 남자가 찾아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안개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는 남자이다. 화가로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고, 초상화가로서도 평판이 좋은 '나' 이지만, 이런 모델은 처음이다. 얼굴 없는 남자의 얼굴을 어떻게 그린단 말인가?!  '나'는 얼굴 없는 남자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겨우 돌려보낸다. 
책을 다 읽으면 알 수 있지만, 꽤나 오싹한 느낌을 주는 이 부분은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이다. 마치 순환구조처럼 작품의 맨 앞에도 어울리지만, 시간상으로는 작품의 가장 마지막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얼굴이 없는 남자의 방문을 받기 한참 전으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니 '나' 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뒤적여 봤는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1인칭 작품에는 종종 화자의 이름이 등장하는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는 아내인 '유즈' 와 몇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이혼조정에 맞춰 별거에 들어간다. 집과 재산에 대한 처분은 일단 아내인 유즈에게 맡기고 몇주간 정처없이 홋카이도 지방을 떠돌다가 같은 미대 동기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오다와라 지역의 깊은 산골에 위치한 저택에 신세지게 된다. 이 저택은 아다마 마사히코의 아버지인 아다마 도모히코의 자택이자 작업실이었다. 마사히코는 90세가 넘은 고령에 중증 치매를 앓고 계신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면서 빈 집 관리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마침 대학 동기이자 전업 화가인 '나' 에게 선듯 내준 것이었다. 
 '나'는 집안 곳곳을 살피던 도중, 지붕으로 통하는 다락방 입구를 발견하게 되고, 그 곳에서 봉인된 듯 포장되어 먼지를 잔뜩 먹고 있던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아다마 도모히코의 그림으로 보이는 일본화로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이 그림을 찾은 뒤, 건너편 골짜기의 화려한 저택에 사는 '멘시키' 라는 인물과 인연을 맺게 되고, 한 밤 중에 정체모를 방울 소리를 듣게 된다. 멘시키의 도움으로 찾아낸 방울 소리의 근원지는 저택 뒤편 깊은 골짜기에 있는 커다란 우물과도 같은 깊은 석실이었고, 실제로 그 안에 방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뒤, 멘시키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마리에' 라는 소녀의 초상화를 그려주게 되고,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 안에 있던 기사단장의 형체가 스스로를 '이데아' 라고 칭하며 '나'의 눈 앞에 나타나며 이야기는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구조적인 완성도나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정신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려고 보니 뚜렷한 중심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다닌다. 회수되지 않는 떡밥들의 잔치, 의도를 알 수 없는 맥거핀들의 향연, 비록 '나' 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내러티브들이 단지 '나' 의 주변을 멤돌 뿐, 명확히 수렴되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모더니즘 시대의 의식의 흐름에 기반한 작품들처럼 읽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다. 흡인력은 보장한다는 의미. 거침없는 아이디어 전개와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 특유의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정갈한 문장들은 여전하다.

 멘시키와 마리에, '나' 가 만들어내는 삼각 관계, 그리고 "나" 와 유즈, 그리고 불륜남과의 삼각관계, 그리고 "스바루의 남자" 등 인물관계의 설정이 굉장히 흥미롭다.
인물들이 서로 맞붙는 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재미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성적 긴장감을 표현하는 데에는 이제 명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대사 하나하나와 행동 하나하나가 직간접적으로 성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심지어 동성간의 관계에서도. 
 멘시키와 "나" 가 보여주는 케미스트리는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문화 전반에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한 재력가에, 미적인 안목도 뛰어난 멘시키는 그야말로 성을 막론한, 매력의 화신이다. 남자라면 닮고싶고, 여자라면 만나보고 싶은. "나" 가 멘시키와 나누는 대화의 수준이나 내용, 자세와 행동에 대한 묘사들은 몇번씩 읽어도 재미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잃어버린 동생에 대한 애착과 트라우마로 인한 폐소공포증이 있는 화자 "나" 의 캐릭터도 참 좋았다. 예술가다운 섬세한 성격을 드러내기에 좋은 장면들을 무척 설득력 있게 그려냈고, 표현들도 아주 세심해서 그의 삶 자체가 부러울 정도였다.
'스바루의 남자' 는 얼핏, 맥거핀처럼 보였다. 중심 서사의 주변에서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매우 잘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맥거핀이랄지, 떡밥이랄지, 그렇게 중심 스토리의 긴장감을 완화하거나, 가중하는 등 장치의 사용에 무척 능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정말 빛을 발한다. 

 내가 이 작품을 다 읽은 뒤에, 서사적으로 겉돈다고 느낀 부분은 이데아와 메타포, 그리고 그림 속 세계에 대한 부분이다.
이데아나 긴 얼굴의 남자(메타포) 같은건 집어 치우고, 인물들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었어도 굉장히 밀도 깊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됐을 것 같다.
 결론만 놓고 보면, 이데아와 메타포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과거를 서술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이들 존재가 '역사적 사건' 을 끌어내기 위해 다소 억지로 갖다붙인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절대적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서사 자체가 비틀리는 느낌이었다.
 
 소설에서 작위적인 설정이 과연 단점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 소설이 곧 작위적인 이야기 아닌가' 라고 대답할 것이다. 작위를 숨기는 것이 소설의 '기술' 일 수는 있겠지만, 그 기술의 수준으로 소설의 완성도나 의미를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이데아'와 '메타포'의 등장과 활용은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다.
[1Q84]의 세계처럼 패러렐 월드를 상정한 것도 아니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처럼 "의식핵" 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데아의 등장은 정신분열처럼 불현듯 등장하고, 그 모습도 뜬금없다.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을 불러온다.

  물론 독자들에게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의도였을 수는 있으나, 비슷한 장치가 사용되는 [해변의 카프카] 같은 작품과 비교하면, 관념적이고 신화적인 피안의 존재들 피상의 세계로 불러오는 방법이 거칠고 투박하다.
 특히, 뭐든지 "모른다" 고 설정들을 얼버무리는 방식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이질적인 존재를 이 세계로 불러들이는 방식은 판타지 작가들도 잘 하지 않는 방식이다. 마법을 쓰거나 드래곤이 등장하는 데에도 세계관에 따른 명확한 개연성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이데아와 메타포의 등장은 뜬금없을정도로 개연성이 없고, 이들의 존재적 증명에 관해 이야기 안에 어떠한 힌트도 없다. 무슨 이유로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다른 세계와의 접점이 생겼으며, 이데아라는 자가 어떻게해서 현실에, 그것도 "나" 와 "도모히코" 에게만 보이는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또 그 세계가 지하 석실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그 어떤 인과관계도 제시되지 않는다. 단순히 "모른다" 고 얼버무릴 뿐이다.  
캐릭터의 등장과 활용에 비하면 허술하게 툭툭 던진 느낌인데, 이것이 의도적이라면, 어떤 의도였을지 감이 잘 안잡힌다.

 일단, 그렇다 치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이데아와 메타포를 매우 '뜬금없이' 등장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 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물고기 비가 내린 것 처럼(이것은 실제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뜬금없는 쪽으로 흐르게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데아" 였을까? 왜 하필 "메타포" 였을까?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하루키가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이 부분들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주인공 "나" 는 화가이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미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
미술을 손재주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림은 사실 '손'의 재능보다 '눈'의 재능이 더 필요하다.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실제 스케일의 오브제들을 캔버스라는 제한된 공간안에 적정 배율로 축소시켜 집어넣는 과정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뇌에서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직관적으로 이뤄지는 속도가 '그림' 의 재능이다. 
 가끔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릴때 연필을 든 손을 쭉 뻗어 비율을 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렇게 정확하게 축소시킬 수 없다. 때문에 연필을 가늠자로 이용해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자신의 눈과의 거리에 따른 배율을 측정하여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의 일정 수준에는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 화가의 성격이나 재료의 사용법에 따라 약간 편차는 있지만, 시간을 들이면 누구나 대가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때문에 미술 작품의 완성도는 붓질이나 재료의 활용도로 결정되지 않는다. 물론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정도로 과감한 사용법이나 활용도는 인정받지만, 연습하면 누구나 똑같이 따라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똑같은 붓과 물감, 종이를 주고, 똑같은 사과를 줘도, 100개의 완전히 다른 사과 그림이 나온다.
 눈은 뇌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배아가 태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뇌에서 더듬이처럼 두개의 줄기가 뻗어나와 눈이 되고, 꼬리처럼 줄기가 뻗어나와 중추신경이 된다. 중추신경은 뼈와 근육, 피부로 감싸지지만, 눈은 그렇지 않다.
 눈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돌출된 뇌'인 것이다.
화가들이 해부학을 공부하고, 산업디자이너들이 기계공학을 공부하는 이유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무조건 뇌를 거친다. 그리고 화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것들로 필터링되어, 손을 통해 캔버스에 옮겨진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에서 나온 인물들의 이름이 "이데아" 이고, "메타포" 인 이유일 것이다.
화가의 그림속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어떠한 현실이 화가의 머릿속에서 분해되고 재구성되어 종이 위에 새로운 형상으로 재조합된다. '정신(이데아)' 과 결합되어 일종의 아이콘화, 혹은 도식화, 혹은 기호화, 혹은 이미지화(이 모든 것들을 '은유(메타포)' 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는 은 일종의 기록화이다. 과거에 오스트리아에서 겪었던 사건은 도모히코의 삶을, 삶에 대한 시각을 변모시켰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손을 통해 뇌 밖으로 흘러나와 캔버스 위에서 형체를 얻었다. 
다른 장르의 그림들보다 더더욱 정신과 은유와 관련이 깊다.

 그렇게 읽다보니, 얼핏 맥거핀처럼 사용된 "스바루의 남자" 가 "나" 에게는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사실이 읽혔다.
마리에의 감상이었던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다' 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을 터. "나"는 스바루의 남자를 그리면서 창작자로서의 '벽' 을 인지한다. 자신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한 '이데아' 가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어쩌면, "나" 가 홋카이도를 여행했던 그 남자는 아직 그리지 않은 '스바루의 남자' 에서 튀어나온 이데아일수도 있다. 과격한 방식으로 성관계를 맺었던 여인은 역시, 아직 그리지 않은 그림에서 나온 '메타포' 였을수도 있고. 

자신의 창작물이, 생명을 얻고 형체를 얻는다는 것. 그림을 그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은 생명을 얻는다. 
"나"가 이혼중인 아내 유즈와 꿈속에서 관계를 맺었던 것 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아이가 잉태된 것 처럼.
 창작자들에게 창작물은 자식과도 같다.
애정과 정성을 쏟는 대상이고, 산고의 고통에 비한다는 창작의 고통도 있지만, 완성되어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순간이야말로 자식의 탄생과도 같다. 창작물들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순간, 아이가 부모의 의도와 상관 없이 독립된 인격체로 자라나듯이, 작품 역시 창작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해석으로 나름의 생명력을 얻기도 한다.

 어쩌면 도모히코에게 [기사단장 죽이기]는 '원치 않았던 자식' 같은 작품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지 말았어야 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나' 가 마리에의 조언으로 '스바루의 남자' 그리기를 멈춘 것 처럼, 도모히코도 '기사단장 죽이기' 그리기를 멈췄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도모히코가 [기사단장 죽이기] 를 그린 정확한 시점이 작품 속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일본화로 완전히 전향한 후가 아닌, 전향을 고려하던 '도중' 에 그렸을 것 같다.
 충분한 수련을 거치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전. 서양화가에서 일본화가로 전향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작품 발표를 하지 않는다고 화가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췄을 리는 없다.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 여러 이유로 일본화로 화풍을 바꾸는 동안 많은 습작을 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기사단장 죽이기] 는 마지막 습작이 아니었을까?
 도모히코가 공백기동안 몰두했던 그림은 온전히 자신의 치유를 위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도모히코는 일본화로부터 작은 치유를 경험했고, 전향의 계기가 마련됐을 것이다. 어쩌면 서양화의 본고장이나 다름없는 오스트리아에서 얻은 상처였으니, 서양화 자체가 상처를 들쑤시는 것이었을수도 있고.
여하튼, 도모히코는 과거의 것들을 떨쳐버리기 위한 그림을 그렸을터다. 그리고 그 와중에 과거의 기억을 은유하는 상징으로 가득찬 그림을 그려버린 것이다.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에 녹아든 심상(이데아)는 "죽음" 이다. 
  "나" 가 "얼굴 긴 남자; 메타포' 를 따라 방문했던 공간에 있던 거대한 강은 사후 세계로 건너가는 레테의 강이 연상된다. 도모히코는 그림 안에 "죽음" 이라는 이데아를 메타포로 투영했다. '기사단장'의 형태를 한 이데아의 죽음을 통해 메타포가 등장하고, 그 뒤의 일들이 벌어진 이유이다.
죽음이 죽는 역설.
어쩌면 그것이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여는 키였을지도 모른다.
이데아, 메타포, 그리고, 역설.  

 어쩌면 도모히코와 "나" 가 나누는 관계는 일본의 전쟁세대와 전후세대의 단절이나 소통, 뭐 그런 평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갈등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는 수많은 작품들에 넘치고 넘쳤으니, 특히나 사람 관계를 잘 그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굳이 중증 치매로 인해 말도 안통하는 노인을 전쟁세대의 메타포로 활용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예술 작품이 품고 있는 의미와 해석, 그것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과 가치는 시간 속에서도 끊임없이 후대로 전달된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오히려 예술에 몰두한 예술가와,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예술가, 즉, 과거시대의 예술가와 현대시대의 예술가의 차이를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확실한 건, "나" 는 도모히코와 다른 아버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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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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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다 리쿠의 작품을 펼칠 때는 언제나 마음이 편하다. 

그녀는 사람들을 참 좋아하기 때문이다. 문장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긍정이 묻어나고, 작품 안에는 그 어떤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마저 단어로 감싸안는다. 문장으로 포옹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엄청나게 오랜 시간동안 일본 미스테리 문학계에서 손꼽히는 장인이다.

살인도, 납치도 없이 순수하게 '미스테리' 만으로 강렬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에는 허망한 허무주의도, 죽음에 대한 자기파괴적인 동경도 없다. 

삶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지혜, 충실한 즐거움.  

'인간의 상상력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는 명제에 충실한 온다 리쿠의 작품 세계는 상상력으로 인한 오해와 거짓말, 추측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이 온통 미스테리와 수수깨끼 투성이인 이유는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모든 미스테리와 수수깨끼가 풀리는 이유 역시 인간에게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온다 리쿠는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활용하는 작가이다.

물론 그녀가 장르소설 작가인 것은 확실하다.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범인, 형사처럼 쫓는자와 쫓기는 자가 만들어진다. 비밀을 숨기려는 자와 파헤치는 자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명백한 장르적 장치들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들을 활용하는 방법은 여타 미스테리 스릴러들과 전혀 다르다. 


 온다 리쿠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단어는 "대화" 와 "추억(기억)" 그리고 "성장" 이다. 

일정한 수의 인물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는 설정 역시 장르적 장치이지만, 등장인물들이 모여있는 공간 안에서는 어떠한 살인도, 폭력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오손도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의 화제는 굉장히 다양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얽혀 있는 질기고도 진득한 과거의 기억에 관한 내용으로 수렴된다. 이 과정 안에 심리적으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등장하고, 비밀을 갖고 있는 자와 그것을 파헤치는 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형사가 범인을 취조하고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여 힌트를 찾아내듯이, 서로가 심도깊은 대화를 나누고, 대화 안에 일종의 함정들을 만들고, 때로는 과거의 단초를 찾아 비밀들을 끄집어낸다. 

'그때,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리고 그 때 나의 행동이 그녀에게 어떤 결과를 미쳤나?'

마치 나비효과처럼, 내가 과거에 했던 사소한 선택이 현재의 그를 엄청나게 바꾸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등줄기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에, 내가 했던, 사소하기 짝이 없는, 선택. 

온다 리쿠가 일본 팬들 사이에서 "노스탤지어의 전령사" 라고 불리우는 이유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을 읽으면 여지없이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당시에 했던 선택들과, 내게 미쳤던 여러 결과들. 

그것들을 생각하면, 금새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고, 곧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시절에 대한 깊은 향수에 젖는다.

그래서 그녀는 노스탤지어의 전령사인 것이다. 국내에선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라고 번역되지만, 그 명칭만큼은 일본식이 좋다.  


[꿀벌과 천둥]은 온다 리쿠의 이러한 특징들이 모두 녹아있는 작품이지만, 한가지, '무서운 상상력' 은 빠져있다.

이 작품은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라는 피아노 경연대회(?)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다룬 이야기이다.

미스테리의 여왕이, 미스테리를 버렸다. 그 사실만으로 깜짝 놀랐더랬다.

판타지나 미스테리 잡지가 아니라, 음악 잡지에 기고되었던 소설이 묶여 나왔더랬다.

신박한 음주 이야기나 여행 이야기가 에세이로 묶여 나온 적은 있었지만, 소설은 언제나 미스테리와 판타지의 대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는데. 음악소설이라니.


이야기는 이미 저명한 피아니스트인 미에코로부터 시작된다.

역사는 짧지만, 수상자가 일약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성장하면서 함께 명성을 얻은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 에 참여할 경연자들을 뽑는 오디션의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자리였다.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의 오디션은 모스크바, 파리, 밀라노, 뉴욕 그리고 일본 요시가에에서 열리고 있었고, 서류 심사를 통과한 연주자들이 각지에서 펼쳐지는 오디션을 거쳐야 콩쿠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파리 심사를 맡은 미에코와 오랜 동료들은 그 자리에서 깜짝 놀랄만한 재능을 만나게 된다.


"엄청난 재능을 목격한다는 것은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p.37

 

 각지에서 오디션을 통과한 피아니스트들이 일본 요시가에로 모여들어 국제 콩쿠르의 예심이 시작된다.

이야기가 주목하는 인물은 총 네명.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는 천재 피아니스트였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난 뒤 연주에 대한 흥미를 잃고 무대를 무단으로 이탈하고 수년 째 평범한 학창생활을 해나가던 소녀 에이덴 아야.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프로 솔로 연주자로서 시니어 무대에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피아노를 너무 사랑했지만, 생업으로 삼지 못하고 악기점 매니저로 평범한 삶을 이어가는 다카시마 아카시.

그리고 음악의 신이 내려보낸 것과 같은 천재소년 가자마 진.

이 네명의 인물이 요시가에 국제 콩쿠르에서 수많은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서로의 음악을 겨룬다.

  

온다 리쿠의 소설답게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서로에게 얽혀 풍성한 드라마를 펼쳐내는데, 그들의 이야기도 정말 너무 재미있지만,  작품 전반에 펼쳐지는 장대한 음악과 연주에 대한 묘사가 정말이지 '끝내준다'!!!  

다시 말하지만, 온다 리쿠는 인간의 "상상력" 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상력" 으로 인한 사건을 겪고, "상상력" 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 

690여 페이지가 넘는 볼륨 안에 수많은 피아노 곡과 연주가 묘사되어 있는데, 당연하게도 음악과 연주는 모두 '텍스트' 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

이번 작품에서도 온다 리쿠는 인간의 "상상력" 을 가장 큰 무기로 삼았다.

바로 우리들. 독자들의 상상력이다. 


 음악과 연주에 관한 수많은 묘사들 중 진부하거나 중복되는 표현이 거의 없다.

음악에 대한 묘사를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오감을 자극하는' 문장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장문과 단문, 은유와 직유, 비교와 비유. 그야말로 수사법의 백과사전이다. 그리고, 상상력의 보고이다.

문장들이 상상력을 엄청나게 자극한다!!   

그래선지, 오히려 음악이 줄 수 있는 이상의 감동을 준다.(정작 음악을 찾아 들으면 졸립....쿨럭.)

독자들의 머릿속을 열고, 상상의 피아노를 연주한다. 

텍스트가 움직이는대로 머리속에 빛이 팡팡 터지며, 들어본 적 없는, 들을 수 없는 음악들이 연주된다.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책 전체를 옮기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지금 막 넘기면서 눈에 띄는 구절을 몇구절만 옮겨보겠다. 


"베토벤의 곡이 가진 독특한 벡터가 소년의 손가락 끝에서 화살처럼 홀을 향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p.37


"객석 전체가 하나의 귀가 되고 눈이 되어 달아오르고 있다. 무대 위의 청년은 그 열기에 지거나 눌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관객의 추파를 받아들이며 그에 응하고 있다. (...)

 한 음, 한 음이 깊고 풍부하다. 그대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벨벳으로 감싼 것 같다. 그런데 간결하면서도 조금 냉소적인 바로크읭 ㅜㄹ림이 뚜렷이 드러난다.

음, 장식음이 아름답네. 아야는 혀를 내둘렀다."  p.188


"뭐야, 이 소리는. 어떻게 내고 있는 거지?

마치 빗방울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내리는 듯한....(...)

조율만으로 소리가 이렇게 달라질 리 없다. 이 아이 전에 나온 참가자도 같은 피아노로 연주했다.

어째서 이런, 하늘에서 소리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멀리서, 또 가까이서, 마치 피아노가 혼자 노래하는 것처럼 주선율이 차례로 떠올라 여러 연주자가 연주하는 음악을 스테레오 사운드로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렇다. 소리가 기가 막힐 정도로 입체적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p218-219


"모차르트 본연의 시원스러운 지고한 멜로디. 진흙 속에서 순백의 꽃망울을 틔운 탐스러운 연꽃처럼, 아무런 주저도 의심도 없다.

쏟아지는 빛을 당연하게 두 손 가득 받아들일 뿐이다.

이 아이, 앉았을 때부터 계속 웃고 있다.

아카시는 눈치채고 있었다. 건반을 전혀 쳐다보지 않는다. 소년이 피아노를 연주한다기보다 피아노가 소년을 연주로 이끄는 것 같았다.

그가 피아노를 부르면 피아노가 기거이 그에게 화답하는 듯한."

p. 220


"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이 음악을 드넓은 곳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요? 

소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가만히 선생님에게 속삭였다.

언젠가 반드시 선생님과 약속한 대로, 음악을 데리고 나가겠어요."

p.310




 결국 이 작품은 '기프트'; 재능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이야기이다.

아니, 재능을 받은 자들 중에서, 좀 더 좋은 행운을 만난 자들의 이야기랄까. 

안타깝게도, 예술적 재능은 사람마다 크나큰 격차가 존재한다. 

지금도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루브르 미술관 문턱에서 좌절하며 돌아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 옛날 사람들의 기예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 책에는 정확한 타이밍에, 자신의 재능을 정확히 찾아내, 그것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붓는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심사위원, 경연에 참여한 피아니스트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 피아노 조율사는 물론 주인공들의 가족, 친구들까지 대충 보아 넘길 사람들이 없다. 한명한명이 다 다정하고, 상냥하다.

 하지만, 상냥하고 다정하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작품의 중심 소재는 "콩쿠르". 인생과 자존심을 건 경연인 것이다.

인물들은 상냥할지언정, 평가는 날카롭고 매정하다. 연주가 끝날 때 마다 연주는 냉철하게 평가되고, 반응은 그 즉시 나타난다. 

그렇기에 음악에 대한 묘사를 읽는 즐거움도 상당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카자마 진, 마사루, 아야, 아카시 중 누가 우승하게 될지, 그 결과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네명의 뜨거운 각축전이 [꿀벌과 천둥]의 가장 강력한 서스펜스 요소인 것이다.

온다 리쿠는 무척 노련하게 독자들과 밀당하며 이 네 명의 대결을 무척 흥미롭게 펼쳐놓는다.

끈끈하게 이어진 인물들의 드라마만큼 승부의 결과에 대한 긴장감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인물들에 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승부가 심장 쫄깃하게 펼쳐진다.  


 그와 동시에,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단단한 카르텔에 새로운 세대들이 비집고 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젊은 세대를 착취하고 기만하기에 바쁜 기성세대에게 날리는 통렬한 일침이고, 위대한 재능을 눈 앞에 두고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까봐 노심초사하는 어른들을 향한 일갈이다.


"말 그대로 그는 '기프트' 이다.

아마도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시험받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이자 여러분이다.

그를 '체험' 하면 알겠지만, 그는 결코 달콤한 은총이 아니다.

그는 극약이다.

(...)

그를 진정한 '기프트' 로 삶을 것인지, 아니면 '재앙' 으로 삼을 것인지는 여러분, 아니 우리에게 달려있다."

p.41



 클래식. 

이 얼마나 고루한 단어일까.

하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예술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삶을 삶답게 만들어주는 너무나 중요한 그 일부이다.

수백년 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삶답게 만들어준 단어인 것이다.

인터넷 세상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축복은 누구나 많은 클래식들을 집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일터다.

물론, 직접 가서 듣는 것 보다는 떨어지고, 엄청난 가격을 호가하는 장비들과 싸구려 스피커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클래식은 불과 200여년 전만 해도 선택받은 소수의 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누구나 시도할 수 있으나, 아무나 다다를 수 없는 경지.

누구나 볼 수는 있으나, 아무나 알아볼 수 없는 능력.

누구나 꿀 수 있으나, 아무나 이룰 수 없는 꿈.

누구나 받았지만, 아무나 일깨울 수 없는 재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선사하는 이들의 이야기.

[꿀벌과 천둥] 

참 좋았다. 



*참고로 작품에 등장하는 연주곡들의 선집 음반이 발매되었다.

http://music.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5686825

노다메 칸타빌레 앨범도 여러장 있는 걸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귀로 즐기는 것보다 온다 리쿠의 텍스트만으로 즐기는 것도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음악 듣고 온다 리쿠의 텍스트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없다궁...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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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차무진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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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릭시르의 한국 작가 장르문학 라인은 정말 최고인 것 같다.

[궁극의 아이], [불로의 인형], 그리고 [해인]에 이르기까지. 

아주 신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익숙한 개념들과 중심 스토리의 조화가 무척 뛰어나다.

세련된 문체와 유려한 필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관과 설정을 억지로 현실 세계에 가지고 들어오면 자기 파괴적인 오류가 일어나곤 한다. 팬들은 흔히 "설정 오류" 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장르적 완성도를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이야기의 흥미마저 떨어뜨린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을 키워 나가는 '팩션' 이라는 하위 장르의 경우는 더 위험하다.

상상력을 덧대 실제 역사적 사건의 인과를 재조합하는 작업은 '역사소설'은 물론 '역사서'에도 필요한 일이다.

'팩션' 은 그러한 인과에 완전히 세계관이 다른, 생경한 개념을 집어넣는 일이다.

주술이나, 마법, 특별한 능력을 지닌 초인이나 불사인 등 말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을 직접 다룰 땐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오류를 가늠한 '눈' 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해인]은 '아기장수 설화' 를 모티프로 아기장수를 잉태할 '성모' 와 성모를 수호하는 '박마' 라는 존재를 만들어 역사의 이면에 녹아들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다. 자칫 세계관을 설명하다가 끝날 수도 있는 복잡하고도 장대한 설정이 세밀하게 정립되어 있다. 

시점상 현재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는, 조선시대로 훌쩍 거슬러올라가며 성모와 박마, 아기장수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아기장수는 현실을 뒤엎을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사람이다. 아기장수가 무사히 태어나, 자라나면 세상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제대로 정기를 물려받지 못한 아기장수의 혁명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혁명에 실패한 사람들은 거의가 '쭉정이' 아기장수였다.

성모는 아기장수를 수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여성이고, 남자의 씨와 관계없이 아기장수를 가질 수 있다. 박마는 성모가 아기장수를 잉태하면 아기장수가 무사히 태어날 때 까지 성모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 특수 요원이다. 성모가 아기장수를 무사히 낳지 못하면 박마는 죽거나 승려가 되야 한다. 새로운 성모가 태어나면, 새로운 박마가 그 역할을 물려받는다. 지역마다 비밀리에 양성되는 박마들이 있다. 소수지만, 천문, 지리, 무술에 능통한 박마들은 성모가 태어나면 자신의 임무를 시작한다. 

 하지만, 백한은 벌써 몇번이나 눈 앞에서 성모와 아기장수를 잃었음에도 이 땅 위에 살아있다. 죽기는 커녕, 불사의 몸이다. 그가 지켜야 할 성모 '숙지' 가 영원히 성모로 다시 태어나는 저주와도 같은 윤회에 갇혔기 때문이다. 아기장수를 잉태할 숙지가 영원한 윤회를 되풀이하게 된 계기는 한때는 친구이자 연인, 형과도 같았던 '만인' 이라는 박마였다. 만인은 백한과 함께 영원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숙지를 살해한다. 백한은 만인을 막고 숙지를 지켜내야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항상 한 발씩 늦고 만다. 

만인은 고려시절, 여진족이었던 백한을 박마 스승인 '백지' 에게 소개해준 인물이기도 했다. 백한은 백지로 인해 불사의 몸을 얻었고, 박마의 칭호까지 얻었다. 그 사이에 '숙지' 라는 성모가 나타났다. 

백한은 숙지를 사랑하지만, 숙지는 백지를 사랑했고, 만인은 숙지에게서 태어날 아기장수를 보필해 혁명의 한 축을 담당할 계획을 세운다.

영원한 술래잡기의 시작이었다. 


작품의 서사는 널을 뛰듯 시간축을 평행으로 옮겨다니지만, 읽기는 쉬운 편이다.

저자가 친절하게 연도를 알려주고, 이자춘(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이순신(충무공), 전봉준(동학농민운동), 윤심덕(사의 찬미)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내세우기에 시대가 헷갈릴 이유는 없다. 설사, 헷갈린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중심 흐름에서 벗어날 일은 없다. 

작가가 애초에 시간의 흐름을 뒤섞은 이유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조금 헷갈리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메인 혼란' 에 지장을 줘선 안된다. 시간축은 양념이자 미장센일 뿐, 진정한 혼란은 클라이맥스 부분에 느닷없이 달려든다. 

시간축을 흐트러뜨린 것은 오롯하게 엔딩을 위한 것으로, 세심히 읽어보면 반전의 단초들이 섬세하게 자리잡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인 백한과,  안타고니스트랄 수 있는 인물, 만인이다. 

백한은 만인으로 인해 박마가 되었지만, 끊임없이 그를 옭아매는 그림자다. 언제나 '한 발 빠른' 그림자. 이것이 반전의 힌트.

이 두 인물의 독특한 설정이 이야기에 강력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해인]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고려시대 에피소드는 역시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데, 특히 만인과 백한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만인과 백한은 수직적인 관계다. 군인인 이들은 실제 지위상으로도 그렇고, 실력면에서도 그렇다. 거침없는 폭력과 동성애적 행위들이 공존하는 이 둘의 관계는 정립된 직후부터 최후의 그 순간까지 변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폭력과 섹스는 특정 인물들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치였지만, 이 작품이 활용한 방식은 꽤나 흥미로웠다. 어쩌면,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 - 특히 섹스라는 장치를 사용함에 있어 품고 있던 낭만주의나 나이브함이 확 깨지는 느낌이었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눅진하고 질퍽한 불쾌감이 녹아있다.

임신, 낙태, 태아살해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필연적으로 사람을 가르고, 베고, 피를 쏟아내는 장면들 또한 끊임없이 등장하는데다가, 끊임없이 실패하는 백한에 대한 정서적인 피로감이 중첩되고, 사실은 결말조차도 개운하기는 커녕 더 진창속으로 잡아 끄는 내용이어서 템포조절에는 다소 실패한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정서적으로 안도감을 줬으면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그럴만한 대목에서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이 드러나는 바람에 카타르시스나 위안보다는 혼란과 충격이 강했다.

그 뒤에라도 다소 정신적인 여유를 줬으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주구장창 괴롭기만 한 이야기는, 다음이 기대되지 않으니까...

투비 컨티뉴?? 영원히 고통받는 백한!!! 읽기싫어!!!! ㅜㅜㅋㅋㅋ 


그래도 소재 발굴부터, 여러 장치들까지. 장르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술들을 골고루 맛본 느낌이었다.

여러모로 공부할 가치가 있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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