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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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수많은 작품들 중 장편 소설만 6권 정도를 읽었다. 굳이 찾아 읽으려 했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여기저기 그의 책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읽게 됐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20대 중반에 읽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다.
'건강하게 뚱뚱한 예쁜' 소녀(건강하게 살찐다는 개념 자체가 좋았다)가 길잡이로 등장해, 기묘한 동물이 사는 다른 의식의 세계로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의 현실판 같았다.
 [상실의 시대] 와 [어둠의 저편] 을 읽은 직후였어서 얼핏 동화같기도 한 판타지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댄스댄스댄스]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접한 나에게 그는 리얼리스트에 가까운 작가였는데, 이런 망상공상가였구나, 싶었다.
주인공의 직업도 독특했고, 세상에 대한 묘사도 이전의 작품들과는 궤가 달라서 처음엔 적응하기가 꽤나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초반 장벽만 조금 넘어서니, 그런 이질적인 느낌들이 참 좋았다.
리얼리스트가 그려내는 몽상의 세계. 
'현실처럼 뚜렷한 꿈' 이란 느낌.
꿈 속이지만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있는 느낌이 뚜렷했다. 
그래, 백일몽, 같달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한 낮에 길 위에서 문득 꾸게되는, 그런 꿈 같았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해변의 카프카] 이다.
본격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좋다고 느낀 책이었다. 외려 일부 골수팬들은 이 책을 기점으로 외면하게 된 듯도 하지만.
(어쩌면 좀 더 미래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 전반을 다룰 때, 이 책을 어떠한 기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지금 잠깐 했다.)  
 [해변의 카프카]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와 이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관의 공유'까지는 아니고, 망상공상의 범위는 현실에 가까웠지만, '비현실적인 현상이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일어나는 세계를 그린다' 는 연장선에 함께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속 판타지를 다루는 기술이 더 익숙해져서, 되도 않게 '판타지 리얼리즘' 이라는 역설같은 명칭이라도 붙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 연장선에는 당연히 [1Q84] 도 놓인다. 하지만, [1Q84] 는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던 이전의 작품과는 달리 판타지에 무게중심이 확 쏠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암살자와 종교단체가 등장하고, 패러렐월드가 차용되었으며, 책 속 인물들까지 현실에 등장하는 [1Q84]는 여러모로 장르적 장치들이 활용된 작품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여러모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물론, [1Q84]와 부모 자식처럼 닮아있다.
특히, [1Q84] 에서  후카에리의 소설 '공기번데기' 와 관련 있는 리틀피플들이 현실에 등장하는 부분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그림 속에서 이데아와 메타포가 현실에 구현되는 부분의 아이디어와 상당히 닮아있다.  


 [기사단장 죽이기] 는 꽤나 묘한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화가인 '나' 에게 얼굴없는 남자가 찾아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안개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는 남자이다. 화가로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고, 초상화가로서도 평판이 좋은 '나' 이지만, 이런 모델은 처음이다. 얼굴 없는 남자의 얼굴을 어떻게 그린단 말인가?!  '나'는 얼굴 없는 남자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겨우 돌려보낸다. 
책을 다 읽으면 알 수 있지만, 꽤나 오싹한 느낌을 주는 이 부분은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이다. 마치 순환구조처럼 작품의 맨 앞에도 어울리지만, 시간상으로는 작품의 가장 마지막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얼굴이 없는 남자의 방문을 받기 한참 전으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니 '나' 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뒤적여 봤는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1인칭 작품에는 종종 화자의 이름이 등장하는 않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는 아내인 '유즈' 와 몇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이혼조정에 맞춰 별거에 들어간다. 집과 재산에 대한 처분은 일단 아내인 유즈에게 맡기고 몇주간 정처없이 홋카이도 지방을 떠돌다가 같은 미대 동기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도움으로 오다와라 지역의 깊은 산골에 위치한 저택에 신세지게 된다. 이 저택은 아다마 마사히코의 아버지인 아다마 도모히코의 자택이자 작업실이었다. 마사히코는 90세가 넘은 고령에 중증 치매를 앓고 계신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면서 빈 집 관리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마침 대학 동기이자 전업 화가인 '나' 에게 선듯 내준 것이었다. 
 '나'는 집안 곳곳을 살피던 도중, 지붕으로 통하는 다락방 입구를 발견하게 되고, 그 곳에서 봉인된 듯 포장되어 먼지를 잔뜩 먹고 있던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아다마 도모히코의 그림으로 보이는 일본화로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제목을 갖고 있었다.
이 그림을 찾은 뒤, 건너편 골짜기의 화려한 저택에 사는 '멘시키' 라는 인물과 인연을 맺게 되고, 한 밤 중에 정체모를 방울 소리를 듣게 된다. 멘시키의 도움으로 찾아낸 방울 소리의 근원지는 저택 뒤편 깊은 골짜기에 있는 커다란 우물과도 같은 깊은 석실이었고, 실제로 그 안에 방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뒤, 멘시키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마리에' 라는 소녀의 초상화를 그려주게 되고,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 안에 있던 기사단장의 형체가 스스로를 '이데아' 라고 칭하며 '나'의 눈 앞에 나타나며 이야기는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구조적인 완성도나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정신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려고 보니 뚜렷한 중심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다닌다. 회수되지 않는 떡밥들의 잔치, 의도를 알 수 없는 맥거핀들의 향연, 비록 '나' 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내러티브들이 단지 '나' 의 주변을 멤돌 뿐, 명확히 수렴되지는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모더니즘 시대의 의식의 흐름에 기반한 작품들처럼 읽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다. 흡인력은 보장한다는 의미. 거침없는 아이디어 전개와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 특유의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정갈한 문장들은 여전하다.

 멘시키와 마리에, '나' 가 만들어내는 삼각 관계, 그리고 "나" 와 유즈, 그리고 불륜남과의 삼각관계, 그리고 "스바루의 남자" 등 인물관계의 설정이 굉장히 흥미롭다.
인물들이 서로 맞붙는 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재미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성적 긴장감을 표현하는 데에는 이제 명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대사 하나하나와 행동 하나하나가 직간접적으로 성적인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심지어 동성간의 관계에서도. 
 멘시키와 "나" 가 보여주는 케미스트리는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문화 전반에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한 재력가에, 미적인 안목도 뛰어난 멘시키는 그야말로 성을 막론한, 매력의 화신이다. 남자라면 닮고싶고, 여자라면 만나보고 싶은. "나" 가 멘시키와 나누는 대화의 수준이나 내용, 자세와 행동에 대한 묘사들은 몇번씩 읽어도 재미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잃어버린 동생에 대한 애착과 트라우마로 인한 폐소공포증이 있는 화자 "나" 의 캐릭터도 참 좋았다. 예술가다운 섬세한 성격을 드러내기에 좋은 장면들을 무척 설득력 있게 그려냈고, 표현들도 아주 세심해서 그의 삶 자체가 부러울 정도였다.
'스바루의 남자' 는 얼핏, 맥거핀처럼 보였다. 중심 서사의 주변에서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매우 잘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맥거핀이랄지, 떡밥이랄지, 그렇게 중심 스토리의 긴장감을 완화하거나, 가중하는 등 장치의 사용에 무척 능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정말 빛을 발한다. 

 내가 이 작품을 다 읽은 뒤에, 서사적으로 겉돈다고 느낀 부분은 이데아와 메타포, 그리고 그림 속 세계에 대한 부분이다.
이데아나 긴 얼굴의 남자(메타포) 같은건 집어 치우고, 인물들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었어도 굉장히 밀도 깊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됐을 것 같다.
 결론만 놓고 보면, 이데아와 메타포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과거를 서술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이들 존재가 '역사적 사건' 을 끌어내기 위해 다소 억지로 갖다붙인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절대적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서사 자체가 비틀리는 느낌이었다.
 
 소설에서 작위적인 설정이 과연 단점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 소설이 곧 작위적인 이야기 아닌가' 라고 대답할 것이다. 작위를 숨기는 것이 소설의 '기술' 일 수는 있겠지만, 그 기술의 수준으로 소설의 완성도나 의미를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이데아'와 '메타포'의 등장과 활용은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다.
[1Q84]의 세계처럼 패러렐 월드를 상정한 것도 아니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처럼 "의식핵" 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데아의 등장은 정신분열처럼 불현듯 등장하고, 그 모습도 뜬금없다.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을 불러온다.

  물론 독자들에게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의도였을 수는 있으나, 비슷한 장치가 사용되는 [해변의 카프카] 같은 작품과 비교하면, 관념적이고 신화적인 피안의 존재들 피상의 세계로 불러오는 방법이 거칠고 투박하다.
 특히, 뭐든지 "모른다" 고 설정들을 얼버무리는 방식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이질적인 존재를 이 세계로 불러들이는 방식은 판타지 작가들도 잘 하지 않는 방식이다. 마법을 쓰거나 드래곤이 등장하는 데에도 세계관에 따른 명확한 개연성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이데아와 메타포의 등장은 뜬금없을정도로 개연성이 없고, 이들의 존재적 증명에 관해 이야기 안에 어떠한 힌트도 없다. 무슨 이유로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다른 세계와의 접점이 생겼으며, 이데아라는 자가 어떻게해서 현실에, 그것도 "나" 와 "도모히코" 에게만 보이는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또 그 세계가 지하 석실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그 어떤 인과관계도 제시되지 않는다. 단순히 "모른다" 고 얼버무릴 뿐이다.  
캐릭터의 등장과 활용에 비하면 허술하게 툭툭 던진 느낌인데, 이것이 의도적이라면, 어떤 의도였을지 감이 잘 안잡힌다.

 일단, 그렇다 치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이데아와 메타포를 매우 '뜬금없이' 등장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 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물고기 비가 내린 것 처럼(이것은 실제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뜬금없는 쪽으로 흐르게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데아" 였을까? 왜 하필 "메타포" 였을까? 
[기사단장 죽이기] 에서 하루키가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이 부분들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주인공 "나" 는 화가이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미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
미술을 손재주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림은 사실 '손'의 재능보다 '눈'의 재능이 더 필요하다.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실제 스케일의 오브제들을 캔버스라는 제한된 공간안에 적정 배율로 축소시켜 집어넣는 과정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뇌에서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직관적으로 이뤄지는 속도가 '그림' 의 재능이다. 
 가끔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릴때 연필을 든 손을 쭉 뻗어 비율을 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렇게 정확하게 축소시킬 수 없다. 때문에 연필을 가늠자로 이용해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자신의 눈과의 거리에 따른 배율을 측정하여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의 일정 수준에는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 화가의 성격이나 재료의 사용법에 따라 약간 편차는 있지만, 시간을 들이면 누구나 대가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때문에 미술 작품의 완성도는 붓질이나 재료의 활용도로 결정되지 않는다. 물론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정도로 과감한 사용법이나 활용도는 인정받지만, 연습하면 누구나 똑같이 따라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똑같은 붓과 물감, 종이를 주고, 똑같은 사과를 줘도, 100개의 완전히 다른 사과 그림이 나온다.
 눈은 뇌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배아가 태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뇌에서 더듬이처럼 두개의 줄기가 뻗어나와 눈이 되고, 꼬리처럼 줄기가 뻗어나와 중추신경이 된다. 중추신경은 뼈와 근육, 피부로 감싸지지만, 눈은 그렇지 않다.
 눈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돌출된 뇌'인 것이다.
화가들이 해부학을 공부하고, 산업디자이너들이 기계공학을 공부하는 이유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무조건 뇌를 거친다. 그리고 화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것들로 필터링되어, 손을 통해 캔버스에 옮겨진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에서 나온 인물들의 이름이 "이데아" 이고, "메타포" 인 이유일 것이다.
화가의 그림속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어떠한 현실이 화가의 머릿속에서 분해되고 재구성되어 종이 위에 새로운 형상으로 재조합된다. '정신(이데아)' 과 결합되어 일종의 아이콘화, 혹은 도식화, 혹은 기호화, 혹은 이미지화(이 모든 것들을 '은유(메타포)' 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는 은 일종의 기록화이다. 과거에 오스트리아에서 겪었던 사건은 도모히코의 삶을, 삶에 대한 시각을 변모시켰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손을 통해 뇌 밖으로 흘러나와 캔버스 위에서 형체를 얻었다. 
다른 장르의 그림들보다 더더욱 정신과 은유와 관련이 깊다.

 그렇게 읽다보니, 얼핏 맥거핀처럼 사용된 "스바루의 남자" 가 "나" 에게는 '기사단장 죽이기' 라는 사실이 읽혔다.
마리에의 감상이었던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다' 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을 터. "나"는 스바루의 남자를 그리면서 창작자로서의 '벽' 을 인지한다. 자신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한 '이데아' 가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어쩌면, "나" 가 홋카이도를 여행했던 그 남자는 아직 그리지 않은 '스바루의 남자' 에서 튀어나온 이데아일수도 있다. 과격한 방식으로 성관계를 맺었던 여인은 역시, 아직 그리지 않은 그림에서 나온 '메타포' 였을수도 있고. 

자신의 창작물이, 생명을 얻고 형체를 얻는다는 것. 그림을 그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은 생명을 얻는다. 
"나"가 이혼중인 아내 유즈와 꿈속에서 관계를 맺었던 것 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아이가 잉태된 것 처럼.
 창작자들에게 창작물은 자식과도 같다.
애정과 정성을 쏟는 대상이고, 산고의 고통에 비한다는 창작의 고통도 있지만, 완성되어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순간이야말로 자식의 탄생과도 같다. 창작물들이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순간, 아이가 부모의 의도와 상관 없이 독립된 인격체로 자라나듯이, 작품 역시 창작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해석으로 나름의 생명력을 얻기도 한다.

 어쩌면 도모히코에게 [기사단장 죽이기]는 '원치 않았던 자식' 같은 작품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지 말았어야 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나' 가 마리에의 조언으로 '스바루의 남자' 그리기를 멈춘 것 처럼, 도모히코도 '기사단장 죽이기' 그리기를 멈췄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도모히코가 [기사단장 죽이기] 를 그린 정확한 시점이 작품 속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일본화로 완전히 전향한 후가 아닌, 전향을 고려하던 '도중' 에 그렸을 것 같다.
 충분한 수련을 거치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전. 서양화가에서 일본화가로 전향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작품 발표를 하지 않는다고 화가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췄을 리는 없다.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 여러 이유로 일본화로 화풍을 바꾸는 동안 많은 습작을 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기사단장 죽이기] 는 마지막 습작이 아니었을까?
 도모히코가 공백기동안 몰두했던 그림은 온전히 자신의 치유를 위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도모히코는 일본화로부터 작은 치유를 경험했고, 전향의 계기가 마련됐을 것이다. 어쩌면 서양화의 본고장이나 다름없는 오스트리아에서 얻은 상처였으니, 서양화 자체가 상처를 들쑤시는 것이었을수도 있고.
여하튼, 도모히코는 과거의 것들을 떨쳐버리기 위한 그림을 그렸을터다. 그리고 그 와중에 과거의 기억을 은유하는 상징으로 가득찬 그림을 그려버린 것이다.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에 녹아든 심상(이데아)는 "죽음" 이다. 
  "나" 가 "얼굴 긴 남자; 메타포' 를 따라 방문했던 공간에 있던 거대한 강은 사후 세계로 건너가는 레테의 강이 연상된다. 도모히코는 그림 안에 "죽음" 이라는 이데아를 메타포로 투영했다. '기사단장'의 형태를 한 이데아의 죽음을 통해 메타포가 등장하고, 그 뒤의 일들이 벌어진 이유이다.
죽음이 죽는 역설.
어쩌면 그것이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여는 키였을지도 모른다.
이데아, 메타포, 그리고, 역설.  

 어쩌면 도모히코와 "나" 가 나누는 관계는 일본의 전쟁세대와 전후세대의 단절이나 소통, 뭐 그런 평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갈등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는 수많은 작품들에 넘치고 넘쳤으니, 특히나 사람 관계를 잘 그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굳이 중증 치매로 인해 말도 안통하는 노인을 전쟁세대의 메타포로 활용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예술 작품이 품고 있는 의미와 해석, 그것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과 가치는 시간 속에서도 끊임없이 후대로 전달된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오히려 예술에 몰두한 예술가와,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예술가, 즉, 과거시대의 예술가와 현대시대의 예술가의 차이를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확실한 건, "나" 는 도모히코와 다른 아버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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