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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심령학자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8월
평점 :
SF, 우리나라에서는 "공상과학소설" 이라고 번역된다.
내 머릿속에서 SF는 빛의 속도로 광활한 우주를 누비는 이름모를 첨단과학 엔진을 장착한 우주선으로 이런 저런 행성에 조성된 최첨단 콜로니 도시들을 들락날락하며 각양각색의 외계인들과 갈등을 빚으며 사건을 일으켜야만 하는 장르였다. 아니면, 인간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깊고 깊은 심해나 지구의 멘틀 아래에 펼쳐진 또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거나, 타임머신 등이 등장해야만 했다. 최소한 인류의 자리를 노리는 로봇이나 인공지능 정도는 등장해야지!!
나의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려준 작품이 바로 '어슐러 르 귄' 여사님의 작품들이었다.
사실 'SF'는 '미래' 와 어떠한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어슐러 르 귄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 과학과 마술의 경계가 애매해서 과학과 종교가 치열한 갈등을 빚던 시기,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천문학자의 이야기를 그리기도 했다.
이야기를 통해 "과학" 그 자체를 그린 것이다. 그 작품을 맞닥뜨렸을 때의 짜릿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고심령학자] 에도 미래는 등장하지 않는다.
광활한 우주도, 이름모를 첨단과학 엔진도 등장하지 않는다. 깊은 심해나 타임머신이 등장하지도 않고, 외계인과 우주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배명훈 작가도 이런 영역을 무척 잘 다루긴 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뿌리는 언제나 그 곳에 닿아있지 않았다. (살짝 거친 적은 있을지언정.)
배명훈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고고심령학" 이라는 기찬 아이디어로 "심령" 을 "학문" 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빙의"를 일종의 과학(사회)현상으로 치환하여 전통과 문화를 관통하는 신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런 장르의 팬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우와' '우와아아!!!!!!!!' 할 수 밖에 없었다.
"심령학적인 관찰을 통해 고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학문.
고고심령학은 대강그렇게 정의되는 학문 분야였다. (...)
천년 전 사람들이 쓰던 언어를 어떻게 재구성해낼 것인가? 다른 해석의 여지 없이 소리 하나하나에 정확히 대응되는 문자 체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살던 사람들이 하던 말을?
이 질문에 대한 고고심령학의 대답은 간명하고 매혹적이었다. 천년 전에 죽은 혼령이 하는 말을 직접 들어보면 된다는 것이었다."
p.15
작품 안에서 고고심령학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그들만의 뚜렷한 영역이 있고, 학계가 존재한다.
은수는 고고심령학계의 기린아로 문인지 박사의 제자였다. 문박사는 고고심령학의 학문적 성취가 뛰어난 학자 중의 학자였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학구적인 자세때문에 대학 중심의 학계에서는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제자를 백수로 만드는 교수를 고고심령학과를 개설한 그 어떠한 대학에서도 환영할 리 없었고, 고고심령학 역시 다른 학계와 마찬가지로 대학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수는 얼마전 타계한 문인지 박사의 마지막 수제자나 다름 없었고, 문박사보다는 유연한 편이라 현실적으로 앞길을 모색하는 중에 고고심령학에 기반한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장중인 이한철 대표의 제안으로 문박사의 개인 서재를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마치 뇌의 구조처럼 문박사가 수집한 연구 업적과 자료들을 3차원 디스플레이로 재현하는 내용이었고, 개인 소장 서적의 서지정보는 물론, 중요한 메모와 낙서등을 분리하는 작업도 필요했기에 은수야말로 적임자였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고고심령학이 대중적으로 알려질만한 큰 사건이 일어난다.
무려, 성벽, 그러니까 고대의 요새 하나가 통째로 서울에 빙의한 것이다. 고고심령학과 관계가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서울의 노른자위에 자리잡고 있는 미군들까지 영향을 받게 되자 결국 서울시 당국이 나서 전문가들을 수배하면서 고고심령학 자체가 폭넓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고고심령학계에서는 이 현상을 "요새빙의" 라고 칭하며, 흔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기록이 존재하는 도시규모의 심령현상이었다.
은수는 이 거대 심령현상에 문인지 박사의 '종말론' 연구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대학 친구인 은경, 문인지 박사의 동료뻘인 한나 파키노티 박사와 함께 현상의 실체에 다가서게 된다.
유령, 고고학, 장기, 고무줄 놀이 노래, 서울, 용산, 인도, 그리고 일제 강점기 경성.
접점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소재들을 씨줄과 날줄삼아 엄청난 작품을 짜냈다.
배명훈 작가의 작품은 [안녕, 인공존재] 부터 흠뻑 빠졌더랬다. 놀라운 상상력과 그것을 현실에 풀어내는 능력이 비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실과 인간, 그리고 사회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돋보였다.
단편과 중편연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 모든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아쉬운 부분이 바로 드라마였다.
그의 장편은 한마디로, 매력적이긴 하지만, 유혹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이랄까.
이것은 배명훈 작가의 감정이 절제된 세련된 문체와 간결하고 명징한 스토리 텔링 방식 때문이기도 한데, 독자들의 호흡을 가지고 놀지언정,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이 약하다고 느꼈다. 인간의 심리나 감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 텔링의 방식에 있어서 드라마의 우선순위를 약간 뒤에 두었다는 인상이 강했다. 이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배명훈 작가의 작품세계 자체가 전체적으로 드라이한 느낌이기에 통일성 면에서는 조화로운 선택이긴 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야말로 '배명훈 식' 드라마가 비로소 온전하게 드러났다는 느낌이다.
은수와 은경, 한나 파키노티, 그리고 문인지 박사와 유령 아이와 아미타브까지.
인간들의 심리가 얽히는 드라마들이 감정의 과잉 없이, 배명훈 작가만의 특유의 문체로 너무나 잘 표현되고 있다.
드라이해도 촉촉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그 뿐 아니라, 스토리 텔링에 있어서도 크게 한 발을 내딛은 느낌이다.
마지막까지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이 파편처럼 흩어진 에피소드들이 마치 퍼즐처럼 차근차근 맞아들어가는 과정은 짜릿할 정도의 즐거움을 준다. 사실 여러 상징들을 복선으로 던져주는데, 이야기의 중심 개념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후반부에는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다 읽은 뒤에는 이 세계관의 다른 이야기들을 읽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은수와 은경의 에피소드들도 더 읽고 싶을 정도로, 모두 다 흥미롭다.
두번 읽을때 더 재미있는 소설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새라니...
도시가 도시에 빙의한다니!!!
상주하는 유령, 심장을 지닌 도시, 그리고 역사. 전통. 전래.
비과학인 소재들을 인문,공학, 그러니까 과학적으로 채워넣은 절묘한 이야기이다.
서두에 어슐러 르 귄을 언급한 이유는, 그녀가 인문학적인 통찰로 과학을 그려내는 작가이며, 내가 배명훈 작가에게 받았던 첫인상과, 앞으로 기대하는 바 역시 그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안녕 인공존재] 도 그랬지만, [타워] 같은 연작과 [신의 궤도] 같은 장편에서도 인문학적 통찰과 과학적 사유가 넘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