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야구부의 영광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자, 일단 단순하게 평하면, 수작이라고 하기는 모자르고, 범작이라고 하기는 약간 더하다.
내면묘사는 여전히 약간 서투르고, 장면 전환과 이야기의 호흡은 여전히 능숙하다. 아직 글맛은 떨어지지만,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만큼은 좋다. 이재익 작가의 작품은 영화로 비유해 보자면 평단에 의해서는 중간 이하의 점수를 얻지만, 대중들에게는 상위권의 스코어를 얻어낼 만한 작품이다. 특히 이번엔 주 소재가 '야구' 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 출범 29년만에 누적관객 1억명을 돌파했고, 지난해엔 600만명의 관중 동원을 기록한 명실상부, 국내 제일의 스포츠. 지난 두권의 책이 어느정도 대중들의 지지를 받은 작가, 국내 제일의 청취율을 자랑하는 '두시 탈출 컬투쇼'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메인 디렉터라는 명함, 거기에 야구. 아주 솔직히, 심하게 까대듯 말하면 '팔릴 만한, 팔리기 위한, 팔리는' 작품이라는 티가 제목에서부터 풀풀 묻어난다. 

 

 솔직히 이번 작품에는 작가의 욕심이 아주 뚝뚝 묻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이 말하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도 풀어내고 싶고, 야구와의 접점을 찾아내고도 싶고, 서울대에서 야구했던 이야기도 풀어내고 싶다. 작가는 정말 감각적으로 액자식 구성을 이용해 이야기속에 이야기를 넣음으로서 등장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수많은 실제 지명과 인명, 사건들을 풀어내며 작품 전체에 전반적인 리얼리티를 불어넣는다. 무엇보다 화자인 '김지웅' 에 대한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대단히 공을 들인 티가 역력하다. 그 공은 작품안에 충분히 반영되어 화자인 김지웅을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과 등장인물들 모두가 생동감있게 통통 튀어 다니지만, 역시나 이번 작품도 클라이맥스가 약간 밋밋하다. 확 끌어당겼다가 한방에 팡 터뜨리는 스킬이 부족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이야기의 흐름상 감정이 콱 뭉쳤다가 뻥 뚫려야 하는데 그 부분들이 지나치게 서사적으로 흐르다 보니 클라이맥스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한 듯 하다. 무엇보다 지난 '압구정 소년들' 에서도 보여졌던 '도련님 스러운' 묘사는 확실히 글 읽는 맛을 잘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이재익 작가의 문장은 아직은 밍밍하고 건조한 맛이다.

 

 주인공 김지웅은 서울대를 졸업해 국내에서도 꽤 대단한 영화투자업체에 근무하던 직원이었다.

남에게 평가받기 보다 평가하는데 익숙한, 통장에 잔고가 얼마 남았는 지 보다 얼마를 쓸지가 더 궁금할 정도로 넉넉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는, 그리고, 의사인 아내와 어린 아들까지 있는 단란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부인과 이혼을 준비중인 실업자. 백수 홀아비 신세가 코앞인 그저 그런 루저. 아내와 이혼에 합의한 뒤 선고받듯 주어진 시간, [이혼 숙려 기간 3개월]. 충격적인 현실에 혼란을 느낀 지웅은  대학교 재학중에 몸담았던 '야구부' 의 감독님을 찾아간 자리에서, "얻어맞을 때 맞더라도, 한 번 쯤은 던지고 싶은 공을 던져봐야 투주 아이가." p. 48  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기 시작한다. 한국 제일의 대학교엔 서울대학교. 그 학교를 나와도 가질 수 없는 '하고싶은 일' . 직장, 아내, 아이, 서울대라는 명판. 그 모든 걸 다 잃은 서른 중반의 남자는 비로소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서울대학 시절 함께 뛰고 뒹굴던 서울대학교 야구부 동료들을 한명씩 찾아낸다.

 

 서울대학교.

'국립 서울 대학교' 의 ㄱ,ㅅ,ㄷ 을 합쳐 놓은 것 뿐이라는 '샤' 라는 구조물이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는 서울대학교 정문을 통과하는 꿈은 대한민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한번쯤은 꿈꾸고 동경했을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국내에 그와 어깨를 견줄만한 명문사학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서울대'라는 이름이 주는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 무언가는 존재한다. 고교시절이 이제는 10년이나 더 옛날 일이 된 지금이야 서울대라는 명함이 주는 대단함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아니 희석이라기 보다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상위층엔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힘은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느낄래야 느껴 볼 수도 없다는 말이 맞을게다. 게다가 내가 하는 일 자체가 딱히 학벌이나 학연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품과 주인공,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런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서울대' 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아마 서울대를 나온 독자들은 굉장히 공감할만한 장면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 나야 서울대라고는 잘난 친구 덕에 몇번 들락거려본 경험뿐이지만, 그 친구 덕에 서울대란 단지 그냥 엄청 넓은 학교일 뿐이고, 서울대 생이라고 해봐야 20대의 대부분을 어마어마한 취업고시와 각종 고시들에 파묻혀 산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각종 고시를 패스하는 것도, 대기업에 발을 들이는 것도 수 많은 서울대생들 중 일부일 뿐. 위에 언급했듯 많은 서울대 출신 졸업생들도 고학력 백수가 되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김지웅처럼 홀아비 백수 예비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기나긴 인생 중, 대학졸업은 어디쯤일까?? 그래, 이 책엔 모든 챕터들이 야구의 이닝별로 나뉘어 있고, 작품이 시작하는 김지웅의 처지를 감독님은 '5회초' 정도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볼 때 니는 이제 5회 초쯤 역전을 당한 기다. 잘 던지다가 홈런 맞고 1,2점 차 정도로 역전. 겨우 5회촌데, 게임에 진 얼굴로 인상 쓰고 있으면 되겠나? p.44"

라고 말이다.

 

 작품은 줄곧 이렇게 야구와 삶을 연관시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야구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속속 등장한다. 무시무시한 파워를 보여주었던 90년대의 해태 타이거즈의 전설과도 같은 선수들부터 시작해서, 프로야구 원년의 OB와 아련한 기억속의 삼미 슈퍼스타즈. 신바람 타선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90년대 중반의 LG트윈스와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던 현대 유니콘스. 2000년대의 지배자이자 '야신' 이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던 Sk와이번스까지.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핵심이 되는 인물인 '장태성' 은 바로 부산 사나이이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말따옴표"" 안에 들어있는 말들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경상도 사투리. 이정도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바로 롯데 자이언츠. 부산 남자를 만나면 말을 딱 두 마디만 한다고 한다. "밥 묵었나?" 그리고 "롯데 이깄나?" 라고. 아마 요즘엔 부산 여자들도 그럴 듯 하다.

 

 굳이 부산이라는 지역에 국한 시키지 않더라도, '스포츠' 는 서민들에게 가장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해주는 가장 강력한 오락거리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대중들을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하고,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곳곳에 원형 경기장을 지어 주말마다 자극적인 스포츠를 열게 했다. 박정희 시대 또한 그랬다. 3S 정책 얘기는 다들 들어보셨을 터. 스크린 Screen, 스포츠 Sports, 섹스 Sex. 대중들의 눈과 귀, 관심을 그런 말초적인 곳에 집중하게 해 정치적 판단력을 거세시켜 버리는 효과적인 정책이다. 유럽의 민주주의 선진국의 국민들이 스포츠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하고 그 역사도 깊은 이유도 어느정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일부일 뿐이다. 스포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다른 수많은 긍정적 효과들까지 한번에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야구는 그렇게 박정희 - 전두환 시대의 3S 정책의 연장선에서 자라왔다. 여전히 야구단을 거느리고 있는 대기업들은 정치판과 맞닿아있고, 야구단이 모기업의 자금세탁처로 활용된다는 점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의 이야기. 관객들은 순수하게 다이아몬드 안에서 던지고, 치고, 뛰고, 몸을 날리는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 하나에 일희 일비한다. 소리지르고 응원하고 욕하고 사랑하고 증오한다. 특히, 야구는 더욱 더 마약같은 중독성을 자랑한다. 알면 알수록 중독되는 것이 야구라고 하는데, 법전만큼 두껍다는 야구 규칙도 그 중 하나일 수도 있을터다. 다 안다고 생각해도, 그 이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1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한 장면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어떤 선수에게든 그라운드 안에 있는 선수들에게는 모두 공평하게 차례가 돌아간다.

투수와 맞 상대하는 타자는 공이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3개가 들어오기 전까지 무한한 기회를 보장받는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잘해도 동료가 도와주지 않으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9회말 투아웃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타석에 들어선다면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혹은 뒤집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무한한 기회를 제공받는다. 투수에게 스트라익 3개를 내어주기 전 까지는 말이다.

 

 솔직히,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맞춰 보기 시작한다면 인생과 비견되지 않을 것이 무에 있을까?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인생을 야구에 비유할 것이고,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인생을 축구에 비유할 것이다. 마라톤, 낚시와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그리고 이재익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일터다.

"야구를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야구는 이기려고 하는 거야(...)

다들 마찬가지야. 이기려고 하는 거야. 분명히 이길거고. p. 103"

 

삶에 이기고 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과  실패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성공은 무엇이고, 실패는 무엇일까?? 작품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당연하게도 그 중 대부분은 서울대생들이다. 그들 각자의 삶들을 하나씩짚어보면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들의 삶 속에는 평범한 나나 당신들이 그리던 '폼나는 삶, 성공한 삶, 멋진 삶' 의 모습들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키맨인 '장태성' 의 모습을 보면서는 무엇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작가는 그의 모습을 통해 " '성공하는 삶, 행복한 삶' 이란 이런게 아닐까?? " 라고 독자들에게 질문하지만, 역시 그에 대한 답 또한 당신들과 나의 몫일터다.

그래, 일단. 서울대생이라고 한다면, 작품의 문법상 어느정도일까??

인생이란 경기의 5회초, 석점 차 리드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

 

2009년 5월 12일.

잠실.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의 경기.

9회 말, 스코어는 9:1. 무려 8점을 지고 있던 경기였다.

그 경기에서 LG 트윈스는 한이닝동안 그 8점을  다 따라붙어 결국 연장전까지 갔었다.

 

5회초, 석점정도 이기고 있어도, 지고 있어도, 경기 결과는 어찌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직, 6,7,8,9 회가 남았다. 아, 연장전도 있다. 이 엄청난 호흡의 경기 속에서 순간이라도 '아 지겠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경기는 정말 져버린다. 나는 언제나 LG 트윈스의 경기를 홈페이지 중계를 통해 보는데 LG 트윈스 공식 캐스터인 안준모 캐스터는 항상 이런말을 하곤 한다.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에게는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그만큼 팬들에게도 긍정적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우리 선수들이 해줄거야,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해야하죠. 투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던지는 공, 상대 타자가 절대 못 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공에 자신감을 갖고 힘있게 뿌려야 되요. " 

MBC 스포츠 야구 전문 해설가인 이효봉 위원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많이 한다.

"투수는 마운드 위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던진 공이 상대 타자에게 맞으면 어떡하지?? 점수 내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미세하게 공을 채는 손가락이 흐트러져서 실투가 나오는거죠. "

게다가 야구의 한 시즌은 130경기 이상을 치르는 장기 레이스이다. 한 경기, 한 게임 정도, 시즌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때도 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야구도 정신력의 싸움이다.

나 자신에게 지는 순간, 상대방에게도 진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인생은 너무나도 길다.

나도 이제 갓 30년을 좀 더 살았을 뿐이고.

나보다 10살이 많으신 형, 누님들, 20살이 많으신 형 누님들도 그만큼 더 사셨을 뿐.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나보다 어린 애기들한테는 할 말도 없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 더 맞아도 된다. 점수, 더 내줘도 된다. 9회말에 8점 쫓아 갈 수 있는 것이 야구. 그렇다면 인생에선 10점, 20점까지 쫓아가고 역전하고 저만~~치 뒤로 따돌려 버릴 수도 있다.  

 

야구 해설계에 전설처럼 떠다니는 말이 있다.

"야구 몰라요."

나도 이 비슷한 말을 하나 아는게 있다.

"그래, 그거였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다."(팻 콘로이)

 

야구는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은 성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최후의 한 호흡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에서는 성공할 수 있다.

 

참, 그런데 야구 선수들이 한 시즌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는 아시려나 모르겠네.

지겠다고 징징대기 전에, 그 부분을 먼저 한 번 점검해 보는 것도 필요할 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솔직히 절반까지는 이 작품이 소년 소녀들의 성장이야기를 담고 있는 줄 알았다.

보다 내밀하고 노골적이긴 했지만, 소년 소녀들의 눈이 담아낸 현실이라고 보였다. 주인공인 신이치와 그의 친구인 하루야, 나루미는 모두 초등학교 5학년. 우리 나이로 따지면 12살정도. 이제 막 질풍노도의 시기에 발을 살짝 담근 아직은 '어린이' 에 가까운 10대 초반의 청소년들. 작품은 여느 성장 소설과 다름 아니었다. 최근의 청소년 소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요즈음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씌여진 일종의 '성장 소설' 들이 거의 충격에 가까울정도로 노골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점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10대 고교생들의 원조교제, 낙태, 담뱃불로 피부를 지지는 학원폭력은 물론, 교사들에 의한 성추행, 오토바이 폭주족등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소재들이 공공연하게 씌여지고 있다. 그렇다. 10년 전만 해도 그런 일들은 흔치 않았다.

 

 이 작품 또한 그런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암으로 아빠를 잃고 엄마와 할아버지, 세 가족이 살고 있는 신이치. 재미삼아 자식을 폭행하고 폭언을 일삼는 아버지와 한가족인 하루야, 사고로 엄마를 잃고 아빠와 단 둘이 살고 있는 나루미. 한 반에 서너명 씩은 꼭 있을 '결손' 가정의 아이들. 이 세 아이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간다.

현실을 담담하게 담아가면서 현실속에서 변화해 나가는 아이들의 심리상태가 상당히 디테일하고 면밀하게 그려져 나간다.

작품의 시점은 3인칭 이지만, 주인공인 신이치의 시점에서 서술되어진다.즉, 신이치의 내면묘사만이 직접적이고 하루야와 나루미의 심리는 신이치의 입장에서 추측한 내용만이 그려진다. 결국, 작품은 아버지를 잃은 신이치와 새로운 연인이 생긴 어머니, 그리고 하루야와 나루미 사이의 묘한 삼각관계가 중심이 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달과 게] 라는 소설이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작품의 중반까지 신이치의 마음 속 갈등은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홀몸이 된 어머니에게 생긴 새로운 연인이 중점이 된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신이치에게 단순한 가족의 상실 그 이상이다. 그에게 아버지의 상실이란 세상의 일부분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것과 같다. 최초의 상실. 사랑, 존경, 의지의 대상이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그것은 신이치의 마음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킨다. 이 균열은 신이치가 성장하면서 점차 메꿔질테지만, 그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 가 된다. 즉, 작품속에서 신이치가 겪어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트라우마가 만들어지는 과정' 이 그려져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품 안에서 어떤 계기로 '게' 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신이치는 아버지의 상실이라는 빈 공간을 어머니로 채우려고 하지만, 어머니에게 새로운 남자가 등장한다. 그 나이때의 아이들은 마음의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잊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신이치는 아버지를 잃은지 2년이 다 되었지만, 그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아버지를 상실하던 그 순간의 공포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 빈자리를 '빈자리' 로 인식하고 '어머니' 라는 존재를 통해 메꾸어 내려고 하지만, 어머니는 뜻밖에도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상실을 경험했던 신이치는 이번엔 어머니를 상실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인간은 어떤 존재에 공포감을 갖게되면,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그 자체를 망각코자 노력한다. 그 대상이 '사람' 이라면, 단연 그 방법은 '미움, 증오' 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신이치는 어머니가 만나는 새로운 남자를 미워하게 되고, 그런 남자를 만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게된다. 결국 신이치는 유일한 친구인 하루야와 시간을 보내는데 집중하게 되고, 둘은 필연적으로 단짝이 되고 만다.

 

 같은 반 급우인 나루미가 신이치와 하루야 사이에 끼어들면서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중반부부터 이야기는 보다 무겁고 농밀해진다. 10대 초반은 충분히 이성에 대한 연애감정에 휩싸일 수 있는 나이이다. 10세에서 15세의 사이. 남자든 여자든 이 시기에 신체적, 심리적으로 '성' 을 알아간다. 신이치는 나루미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고, 하루야에게 나루미를 서서히 빼앗겨 감을 느끼면서 급격한 심리변화를 경험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장' 이 아니다. 신이치가 경험하는 심리변화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거의 비슷하게 경험하며, 그 행동양상 또한 거의 비슷하게 일어난다. '사랑' 은 파괴적인 감정이다. 결국 신이치는 아버지의 상실과, 그에 맞먹는 어머니의 상실의 주범인 '어머니의 남자친구' 를 증오하고 저주하지만, 그로 인한 감정과 행동이 하루야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아버지 - 어머니 - 어머니의 남자친구

신이치 - 나루미 - 하루야

 

라는 대치구도가 완성되면서 소년들의 이야기는 어른들의 이야기와 정교하게 부합된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어두운 감정들은 결국 사랑, 애정, 집착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상과 그 맥을 함께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들은 인간의 본성들 중 하나라는 사상 또한 기저에 깔려있다.

 

 인간의 '성장' 이란 '인격이 만들어지는 과정' 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성장기' 의 소년, 소녀들은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감정' 들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억눌러야 할 본성과 끌어올려도 되는 본성들을 발견하고,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 그것들을 구분해낸다. 신이치와 나루미, 그리고 하루야는 자신들의 본성을 발견해냈다. 본능적으로 어두운 부분들과 밝은 부분들을 구분해냈지만, 신이치와 하루야가 본성을 드러내고 억누르는 방법은 사뭇 달랐다. 그래도 비교적 따뜻한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고 자랐던 신이치와 인간을 가장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폭력' 속에서 자라온 하루야. 

 

 적어도 신이치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게는 먹어도 되지만 가니는 먹으면 안되"

(...)

가니란 말이다, 이 검은 부분이란다. 이거 보렴, 배에 붙은 이 바나나 같은 거. 여기에 독이 있단다."

p. 8~9

 

사람이 먹는 게에 먹어도 되는 부분과 먹으면 안되는 부분이 있듯, 인간의 마음에도 먹으면 안되는 부분이 있다.

[검은 부분] 바로 감정의 어두운 면.

신이치는 시시각각 찾아오는 어두움과 확연하게 대치한다. 그것은 신이치가 아버지를 잃었건, 어머니를 잃어가고 있건, 올바른 인격을 가진 부모의 역할 덕분이다. 신이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들과의 관계를 통해 억눌러야 하는 부분과 꺼내 올려야 하는 부분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반면, 하루야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장난으로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뭐고 니 진심으로 받아들인기가. 내가 니 때리고 걷어찬 거 진심으로 받아들있나. 그런 거 전부 농담이다. 이카더라. 그런 아부지를 보이까. 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엄따는 생각이 들더라. " p. 402

 

자신의 하루하루를 지옥으로 만든 폭력이 '농담' 이었음을 느낀 하루야의 마음은 어땠을까?

손목을 담뱃불로 지지던 그 고통이 농담이었다니. 12세 소년의 더이상 어둠과 밝음의 경계따위는 무의미해졌다.

 인격이 형성되는 데에는 역시 가족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 과거, 우리 조상들에게 자녀의 교육은 공동체 전체의 몫이었다. 부모들은 어렸을 때 부터 자녀들에게 사람의 도리가 적혀있는 책을 외우게 했다. 그리고, 이웃들은 부모의 인격과 교육 방식을 검사했고, 높은 인격을 지닌 어른이 공동체의 어린이들을 모두 모아 공부를 시켰다. 나의 자녀는 모두의 자녀였고, 모든 자녀가 나의 자녀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화내고 혼내면서 감정 소모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귀찮아 하기도 한다. 심지어 잘 잘못을 깨우쳐 주지도 않는다.

 

"달빛이 말이다, 위에서 내리비쳐서...바다 속에 게의 그림자가 생기거든.

(...)

자신의 그 그림자가 너무 추해서...게는 무서운 나머지 몸을 움츠리지... 그러니까 달밤의 게는 말이야..."

p. 391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고 몸을 움츠렸던 신이치와,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하루야.

 

 이 두 소년의 성장기는 이제부터이다.

과연 신이치와 하루야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까...

우리 세대의 아이들은.

과연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
그렇다. 나에게 아주 복잡 다단한 사정이 있듯,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복잡하기 짝이없는 상황들에 빠져있다. 직장 동료들과의 갈등, 가족간의 갈등,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과의 갈등과 같은 인간관계는 물론, 10년 남은 주택 대출금과 그 이자들, 미래를 위해 적립하고 있는 각종 보험금들, 매 달 날아오는 신용카드 사용 내역서와 한도가 다 되어가는 마이너스 통장들, 자동차 보험료에, 적금과 곗돈, 각종 모임 회비, 통신비와 같은 돈관계. 밤마다 터져나오는 이유를 알수 없는 기침과 때만되면 쑤시는 관절, 이유없이 찾아오는 위통, 두통. 옷정리 할 것도 한가득, 책정리, 책상정리, 대청소, 화장지도 다 떨어져가고, 식재료도 부족하다. 반찬도 없을거고, 쌀은 언제 사야 되더라. 세일이 언제지? 어디서 사는게 제일 싸더라?? 이번 달에 들어올 돈은 왜 아직 안 들어오고 있지?? 게다가 일주일 전에 온라인으로 구매한 상품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전화를 해봐야 할까, 아니 그 전에 게시판에 글을 먼저 올릴까.

 이런 단순한 신변잡기만 나열해도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데. 여기에, 각종 업무나 나의 미래나 장래에 관한 고민이 개입되면, 그야말로 위가 꼬일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인다. 갈등에 갈등, 고민 또 고민. 얽힌 매듭을 잡아 당기면 당길수록 매듭은 더 꽉 조여진다. 내가 처음 잡아당긴 부분이 어떤 매듭의 어느 부분이었는지도 잊고 만다. 애초에 이 매듭이 무엇 때문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매듭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꽉 막혀오다가, 이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머리가 멍해지고, 눈 앞에 뭔가 투명한 막이 끼인 것 처럼 먹먹해진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위를 들어 매듭을 마구 잘라댄다. 매듭 사이에 끼인 뭔가가 함께 난자되면서 끈적거리고 비릿한 액체가 흘러내린다.

 

 누구에게나 그런 '선' 이 존재한다.

'이성의 끈'이 매듭지어서 줄줄이 연결되어있는 '선'. 마치 거대한 괴물이 봉인되어있는 커다란 항아리를 두겹 세겹 둘러싸고 있는 결계의 새끼줄 같은 선이 말이다. 매듭이 하나만 끊어져도 이성의 끈은 쉽게 풀어지고 항아리 안에서 거대한 괴물이 뛰쳐나온다. 이 매듭은 남들이 보기에 아주 어이없는 일이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엔도 마유미' 는 자신을 항상 '당신' 이라고 부르는 제멋대로인 딸 '아야카' 를 꾿꾿하게 참아내고 있는 엄마였다. 화가나면 손에 닿는 물건을 뭐든지 집어 던지며 악을 써댄다. 짐승같이 소리지르며 자신을 '할망구' 라며 각종 욕을 쏟아내는 중학생 딸을 보며 마유미는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자신에게 왜 저렇게 상처를 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까. 마유미는 딸을 이해 하기를 포기하고 무조건 수용하고 포용하기로 한다. 남보다 더 남같은 남편, 엔도 게이스케에게는 수용과 포용을 넘어 포기에 가까운 마음이다.

 

 그런 마유미의 이웃집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엘리트 의사 부부의 집. 고급 주택가 안에서도 상당히 고급 단독 주택인 다카하시 가족의 집. 장남은 유명 대학 의학부에 다니기 위해 독립해 있고, 차남과 차녀도 유망한 사립학교에 다니며 성적도 상당하다. 엘리트 가정의 분위기를 폴폴 풍겨내는 다카하시 가족의 저택 주변에 각종 보도진들과 경찰차가 가득하다. 피살자는 가장인 다카하시 히로유키. 그리고 범인은 그 부인인 준코. 아이돌 가수와 비슷한 외모의 우등생 다카하시 신지는 사건에 연루된 듯 행방불명 상태이다. 대체 그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언제나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상처가 가장 깊고, 가장 고통스러우며, 가장 치명적이다. 너무 당연한 말일까... 어쩌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유일한 것은 사람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주는 상처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가까운 사람들이 주는 상처이다. 절친한 친구, 가족. 부모, 형제, 자매.  역시 너무 당연한 말일까... 마음을 열어 보이는 상대들이기에, 그들이 주는 상처는 맨살에 파고드는 비수처럼 쉽고 간단하게 마음을 파고들어 깊고 치명적인 상처를낸다. 하지만, 역시, 마음을 열어보이는 상대들이기에 참고 또 참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연인, 가족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는 언제나 무방비 상태이다.

 

 살인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야행 관람차]을 쉽게 장르소설이라고 분류하기는 모호하다. 본 작품은 최근 10년 사이에 일본 장르소설에서 감지된 크고도 의미있는 변화인, '사회파' 장르소설들의 대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건은 그다지 미스테리하지 않고, 무슨 트릭이나 비밀이 있는것도 아니다. 이야기는 사건보다는 사건의 주변인물들의 묘사에 집중되어 있다. 살인자의 가족들, 이웃들. 그리고 그들에겐 어떤 사정이 있는가. 그들에겐 어떤 어두움이 자리잡고 있는가. 똑똑하고 착한 남편과 잘 성장하는 아이들을 가지고 있는,  마유미의 집처럼 히스테릭하게 엄마를 욕하며 물건들을 벽에 집어 던져서 깨뜨리는 딸이 아닌,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예쁜 딸과 말 잘듣는 착한 아들이 있는 다카하시 씨네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천상 귀부인 같던 엘리트 의사 출신인 다카하시 준코는 어떤 경로로 남편을 살해하게 된 것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갈등들과 문제들, 고민들, 그리고 어둠들.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온화하다면 온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꿈틀대는 어둠이 선을 뚫고, 봉인을 뚫고 나와 괴물이 되는 데에는 어떤 과정이 작용하는 것일까?? 크고도 끈적거리는 새카만 어둠이 속에서 튀어나와 한 사람을 집어 삼키게 되는 결정적인 방아쇠 역할을 하는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강한 살의를 품어도 죽였다는 사실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 사이에는 크나큰 경계선이 있다. 그 경계선을 뛰어넘을 것인지, 눈앞에서 그칠 것인지, 결정은 의지가 크게 좌우한다고 믿었다. 윤리관, 이성, 인내심.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나는 지금쯤 살인자 신세다. 말려주는 사람의 유무가 결정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결코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p. 285~6"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역할이란 과거의 그것보다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대가족 사회에서 자식의 역할은 집안의 어른 전체의 몫이었다. 자식은 자연스럽게 부모님이 당신의 부모님에게 하는 것을 보며 자란다. 할아버지와 삼촌, 고모들에게서 웃어른을 대하는 방법을 배우고,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요즘은 바쁜 부모 아래에서 홀로 자라는 자식들이 훨씬 많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어둠을 제어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다. 바빠서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원초적인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자식들의 욕망을 모두 수용하고 포용함으로서 죄책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망치는 일이 될터다.

 

 누구에게나 어두움은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을 제어하는 장치와 함께 어둠을 촉발시키는 방아쇠 또한 공존하고 있다.

어둠을 촉발시키는 방아쇠의 힘을 클수록, 어둠은 더 쉽게 튀어나와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집어삼킨다.

당신에겐. 그리고, 나에겐 어떤 어둠이 있는가.

그 어둠을 촉발시키는 방아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걸 말려줄 사람은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썬더볼츠 Thunderbolts 1 : 악당을 믿다 시공그래픽노블
워런 엘리스 지음 / 시공사(만화)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블의 세계에서 일어났던 초대형 사건이었던 '시빌 워'.

그것은 한 어리석은 슈퍼 히어로들에서부터 촉발된 사건이었다. 초능력을 지닌 '슈퍼 휴먼' 들이 공공연히 인정받던 마블 유니버스의 어느 지구.(우리 세계이다.) 한쪽에서는 '뮤턴트' 라 불리우는 인종들이 차별받고 있었고, 캡틴 아메리카나 아이언 맨, 스파이더맨 같은 초능력자들은 군.경에 속하지 않은 자경단원으로서 존경받고 있었다. 퍼니셔처럼 언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슈퍼 히어로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의미가 강했기에, 자신들의 능력으로 악당들을 사로잡아 법 테두리 안으로 밀어넣는 역할을 해 오고 있었다. 보통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슈퍼 휴먼' 들이 모두 그렇게 정의감 넘치고 애국심 넘치는 정의의 히어로가 될 리는 만무. 많은 능력자들은 악의 길로 빠져들어 '슈퍼 빌런' 이 되기도 했다.

 정부의 입장에서 슈퍼 히어로들과 슈퍼 빌런들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언제나 탐탁치 않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국가를, 정부를 제압할 수 있는 '슈퍼 휴먼' 들이었고, 평범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정부' 는 이들을 제어할 수단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일련의 슈퍼 히어로들과 슈퍼 빌런들이 뒤섞인 대결에서 대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엄청난 사건이 발발했고, 이를 기화로 정부는 '초인등록법안' 을 통과시킨다. 흔히 우리가 '슈퍼 휴먼' 이라고 부르는 초인들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이런 양날의 검에 스스로가 베이지 않기 위해 그들 한명 한명을 정부가 파악하고 관리하겠다는 의도였다. 또한 잠재적으로 슈퍼 빌런이 될 수도 있는 슈퍼 휴먼들은 적확하게 파악해서 슈퍼 히어로로서 국가에 봉사할 수 있도록 조기 교육을 시키겠다는 포석도 깔려있는 방안이었다.

 

 아이언맨은 기꺼이 정부의 정책에 동의한다. 법안을 지지하는 일파의 수장으로서 다른 히어로들을 설득시켜서 자신의 정체를 정부에 등록하도록 한다. 많은 히어로들이 그에게 협력했지만, 그만큼 많은 히어로들은 그와 정부의 법안에 거세게 반대했다. 아이언맨을 아버지처럼, 큰 형처럼 따랐던 스파이더맨은 가장 먼저 대중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고 정부에 등록하며 아이언맨의 수족이 된다. 한편, 미국의 전쟁영웅인 캡틴 아메리카는 그 법안에 격력하게 반대하며 아이언맨의 대척점에 서서 반대파들을 규합해 레지스탕스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시빌 워'. 지구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들간의 내전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시공사에서 출간했던 [시빌 워] 본편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전은 결국 반대파인 캡틴 아메리카가 스스로 아이언맨에게 굴복하고 반대파의 해산을 요구하면서 찬성파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 와중에 아이언맨의 권력의 근간이기도 했던 정부산하 슈퍼 히어로 관리 독립부서인 'SHILD'(이하 '쉴드') 의 최고 책임자였던 아이언맨이 직위해제되고, 쉴드의 모든 권한과 기물들은 '썬더 볼츠' 라는 팀에 강제 종속 된다. 정부가 임명하는 '쉴드' 의 총 사령관이었던 '닉 퓨리' 가 [시빌 워] 의 전초전이기도 했던 [시크릿 워] 임무 이후 행방불명 된 뒤, 사실상 쉴드의 모든 권한은 아이언맨이 가지고 있었다. 아이언맨이 정부의 명령을 받아 슈퍼 히어로들을 규합하고 반 강제로 국가에 등록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쉴드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정보력이었다. 일찌감치부터 슈퍼 히어로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쉴드를 넘겨받은 아이언맨이었기에, 쉴드의 강제 종속은 사실상 아이언맨에 대한 정부의 불신임이나 다름없었다.

  

 정부는 초인등록법안의 활성화와 반대파 잔당의 일소를 위해 쉴드를 대신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 관리팀 '썬더볼츠' 를 창설하고, 그 수장에 '노먼 오스본' 을 임명한다. 노먼 오스본은 스파이더맨의 가장 큰 숙적. 영화 '스파이더맨' 을 보신 분도 아실 수 있을 '그린 고블린' 이라고 불리는 슈퍼 빌런이었다. 노먼 오스본은 자신의 능력으로 슈퍼 히어로들을 움직일 수는 없었고, 정부에 의해 강제 구금되어있던 슈퍼 빌런들을 활용하기로 한다. 노먼 오스본은 악당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악당들의 몸 안에 엄청난 위력의 전기 충격을 줄 수 있는 칩 '나노 체인' 을 이식하고 악당들을 제어한다. 이 시도는 [시빌 워] 에서도 있었던는데, 당시엔 악당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었다. 그 전례에 비추어 노먼 오스본은 우선적으로 활용 가치가 있는 슈퍼 빌런들을 대면하고, 그들의 몸에 나노체인을 이식함으로서 공포와 고통으로 그들을 제어하고자 한다.

 

바야흐로 세상은 슈퍼 빌런들의 세상. 노먼 오스본의 세상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악당을 믿다' 라는 부제를 가진 '썬더 볼츠' 는 위에 줄거리를 통해 언급했듯 [시빌 워] 이벤트와 이어지는 크로스 오버 프로젝트(각 타이틀롤을 가지고 있는 슈퍼 히어로들이 한 데 모여서 하나의 큰 이야기를 축으로 모이는 프로젝트) 이다. [썬더 볼츠] 이벤트가 진행되는 중간에 수많은 팬들로부터 엄청나게 욕을 먹었던 [시크릿 인베이전] 같은 짧은 이벤트도 있었지만, [썬더 볼츠] 는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꽤 인기있는 이벤트이다. [시빌 워] 가 슈퍼 히어로들이 한 데 크로스 오버 된 이벤트였다면, [썬더 볼츠] 는 슈퍼 빌런들이 크로스 오버 된 이벤트이다. '본격 악당 주인공 만화' 인 셈이다. 아무리 사회를 리얼하게 그려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권선징악적인 메시지를 추구하는 미국 문화의 특성상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과거에도 악당들이 주인공인 이슈가 있긴 있었으나, 그것들은 대부분 4~8회 정도의 짧은 단발성 이슈가 많았다.

(지난 해 출간되었던 '킬링 조크' 가 좋은 예. 조커가 주인공이긴 했지만, 결국 배트맨에게 붙잡히며 끝나고 불과 4회에 지나지 않는 60페이지의 짧은 원샷 이슈였다.)

 

 그래픽 노블에 대한 리뷰를 쓸 때 마다 언급하지만, 미국 문화에 있어 만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미국만화는 마치 미국 드라마처럼 많은 인력과 자금이 투입되는 킬러 콘텐츠로 여겨지고 있고, 캐릭터는 대단히 유기적으로 문화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특히 최근 몇년간 개봉되고 있는 헐리웃 블록 버스터 영화들의 원소스가 모두 만화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올해도 줄줄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그린랜턴(DC)' 과 '토르(마블)', '스파이더맨' 의 새로운 시리즈 등이 모두 만화 원작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큼직한 영화엔 언제나 만화가 프롤로그나 에필로그, 혹은 영화 본편이 그대로 출간되기도 한다. 지난해 '인셉션' 의 경우에도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이미 영화 내용의 프리뷰 격인 4편짜리 미니시리즈 만화가 발표되기도 했었고, 트랜스 포머나 배트맨의 경우도 영화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스토리 라인을 가진 만화가 발표된다. 누구나 쉽게 어디서든 손에 들 수 있고, 펼쳐볼 수 있으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지 않아도 읽어볼 수 있다는 강점때문에 만화는 엄청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시빌 워] 라는 초대형 크로스 오버 프로젝트는 미국 내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초대형 이슈였다. 거대한 컨텐츠 회사인 마블사의 거의 모든 캐릭터가 등장하고, 마블사가 자랑하는 초일류의 스토리작가, 그림작가, 컬러작가들이 달라붙었다. 이 메인 이벤트 외에도 동시간대에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들을 보다 디테일하게 조명하는 '스핀 오프' 격의 작품들도 수두룩하게 발표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시리즈가 이어지고 있는 [썬더 볼츠] 처럼 아직까지 완벽하게 마무리 되지 않은 에피소드이다. (지금까지는 썬더볼츠 외에 따로 진행되는 크로스 오버 프로젝트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슈퍼 히어로들은 각자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가 시빌워가 남긴 참상들을 뒷수습 하고 있는 중이다.)

 

 [썬더 볼츠] 는 그 노골적인 악당들이 참으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봐 온 슈퍼 히어로들은 수만명을 죽이겠다고 선포하는 악당 한 명 앞에 두고, 얠 죽여야 되나, 말아야되나 전전긍긍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이며 때려도 꼭 안죽을 것 같은 곳만 골라서 때리는 조금은 아쉬운 모습을 보인건 사실이다. 뻑하면 말로 해결하려고 하고, 주변 사람들 다 잃어도 복수할 생각도 안하는 등. 하지만, 썬더볼츠의 악당들은 참으로 못됐다.

언제나 동료라고 부를만한 썬더볼츠의 조직원들을 속여 넘기거나 뒷통수 치며 이용할 생각만 하고, 심지어 수장인 노먼 오스본은 브리핑때 팀원들에게 전자 수갑을 채워놓아야만 한다. 수많은 약을 먹는 노이로제 걸린 정신 분열증 환자이기도 하다!! 팀의 최고 실력자인 불스아이는 '데어 데블' 의 숙적이자 미치광이 싸이코 패스 살인마이기도 하고. 그의 머릿속엔 살인 이라는 단어로 가득하지 않은가.

 

 슈퍼 히어로들과 싸워온 슈퍼 빌런이라면 어쩔 수 없을터다.

애매하면 바로 잡혀갈테니. 게다가 아이언 맨 같은 놈에게 제대로 한 대 맞으면 그냥 머리 터져서 죽는거다. 그런 놈들을 피해 나쁜짓을 하려면 얼마나 신경이 쓰일까!! 그렇다고 나쁜 짓을 안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더 머리를 써서 작전을 짜야하고, 장비를 개발해야 하고,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불안을 이기기 위해 정신은 하나로 몰아서 밀 그대로 '미쳐야' 할 터다. 또다른 자아를 만들어내든, 싸이코 패스가 되든. (뭐 슈퍼 히어로들과 상관없이 원래 그런 놈들이기도 하지만..)

그런 슈퍼 빌런들의 통쾌한 액션. 그리고, 치졸하고 쪼잔한 음모들. 얽히고 설킨 사건들

 

[썬더 볼츠] 는 비록 Vol1. 이라는 부제가 붙어있긴 하지만, 미국 만화의 특성대로 한 이야기가 한 권에서 완벽하게 마무리 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4개의 주요한 사건들이 시간의 흐름대로 얽히다가 결국 하나로 맞아 떨어지는 구성과 연출은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다른 슈퍼 히어로들이 주인공인 빅 이슈들보다 못 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4개의 사건, 8명의 인물들. 초인등록법안을 피해 각각 자신의 근거지에서 몰래몰래 활동하고 있는 3명의 미등록 슈퍼 히어로들. 그리고, 그런 미등록 슈퍼 히어로들을 사냥하기 위해 조직된 [썬더 볼츠] 의 슈퍼 빌런들.

그들이 톱니바퀴처럼 하루의 일상 속에서 얽혀 들어가고 예상치 못했던 대치를 하면서 일은 꽤나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이 정말 미드처럼 짜임새있고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단순히 슈퍼 빌런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들의 얽힘과 설킴. 그리고 대결구도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즐거움을 주는 수작이다.

 

다음권도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기대된다. 

 

 

잠시 작품을 감상해보자.

 




 

 

뭐, 전형적인 미국 만화.

하지만, 주인공들이 악당들이어서 내용도 좀 하드코어하고, 액션도 노골적이다.

 

 

 

 

 

 

 

 

 

P.S

 국내에 마블과 DC의 여러 판권을 가지고 있는 '시공사' 도 참 용자스럽다.

슈퍼 히어로들이 주인공인 작품들도 낯선 판에, 슈퍼 빌런들이 주인공인 작품들을 떡하니 발간하고, 게다가 Vol1. 인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죽죽 내겠다는 심산인 듯 한데.... ㅎㄷㄷ

[시빌 워] 에 관련된 이슈들은 죄다 정식 발매할 생각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비싼 책들을 빠짐없이 모으고 있는 나도 참 용자스럽다.

 

 



[시크릿 워] 부터 [시크릿 인베이젼] 까지 책이 꽂혀있는 순서가 사건이 일어난 순서이다.

[시크릿 워] 에서 히어로들의 갈등이 생기고, 쉴드의 사령관이던 닉 퓨리가 마지막에 모습을 감춘다. 그 뒤부터 마리아 힐이 쉴드의 책임자가 된다.

[하우스 오브 엠] 에서 엑스맨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줄고, '뮤턴트'라는 종 자체의 멸종 위기를 맞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슈퍼 히어로들이 헐크를 우주로 날려버리면서 [헐크: 플래닛 헐크] 의 대 서사시가 시작된다.

[하우스 오브 엠] 이 마무리 되자 초인등록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슈퍼 히어로들이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기 시작한다.

하지만 멸종을 막기 위해 엑스맨들은 [메시아 컴플렉스] 에 목을 메고, 당연히 내전에는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엑스맨을 제외한 슈퍼 히어로들은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치열한 [시빌 워] 를 벌이게 되고, 결국 찬성파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아이언맨이 시빌워의 뒷수습을 하고 흩어진 반대파 출신 슈퍼 히어로들을 처리하고 다닐때, 우주로 쫓겨났던 헐크가 지구로 돌아와 [헐크: 월드 워 헐크] 라는 초호화 이벤트를 일으키고, 오래지 않아 무시무시한 외계인 '스크럴' 들이 지구를 공습하며 [시크릿 인베이전] 이 일어난다. 우주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슈퍼 찬성파와 반대파 히어로들은 일시적으로 손을 잡지만, 스크럴들을 무찌른 뒤에 토니와 쉴드는 결국 정부에 의해 축출되고, 쉴드의 모든 정부와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정부 재산들은 모조리 새로이 창설된 [썬더 볼츠] 와 그 수장인 노먼 오스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물론 다른 칸에는 세미콜론의 그래픽 노블도 가득하다.

 

아마, 두 출판사가 마블과 Dc 각 출판사에 캐릭터 위주로 저작권을 사 온 모양이다.

Dc 의 [슈퍼맨] 이라는 캐릭터와 마블의 주요 이슈에 대한 저작권은 시공사가 손에 넣은 모양이고,

역시 Dc 의 [배트맨] 과 관련된 캐릭터들은 세미콜론이 손에 넣은 모양이다.

덕분에 Dc 의 간판 스타인 슈퍼맨과 배트맨이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책이 발행되는 모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슈퍼맨과 배트맨은 아주 긴밀한 사이로서, 함께 활약하는 작품이 꽤나 많다. 아예 '배트맨 & 슈퍼맨' 이라는 시리즈까지 있을 정도이다.

세미콜론의 배트맨 만화인 '배트맨: 허쉬 " 와 시공사의 슈퍼맨 만화인 '슈퍼맨: 포 투머로우' 같은 작품은 아예 같은 스토리작가와 같은 그림작가가 창조해 낸 쌍둥이 같은 작품들이다.

 

 

무튼, 이렇게 재미난 미국만화를 정식 발매본으로 접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도 기쁜일이다.

내일이면 그린랜턴 이슈중에서도 재밌기로 소문난 '시네스트로 코어 워' 도 도착할 예정.

 

조만간 그린랜턴: 리버스 의 리뷰와 함께 계속해서 리뷰를 올릴 예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밤의 궁전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소설' 을 즐기는 방법은 아주 여러가지가 있다.
그리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도 소설을 즐기는 데에는 최소한 세가지의 방법이 있다.

즉, 한 편의 소설을 읽을때 최소한 세가지의 관점에서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방법인데, 등장인물, 특히 화자나 주인공에 감정이입해서 읽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소설들을 이러한 방법을 따르고 있고, 작가들 또한 독자들을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곤 한다. 아주 평범해서 어떤 독자라도 거울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보편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이야기를 진행하게 한다. 물론 이런 경우엔 이야기의 주인공은 화자가 바라보는 제3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화자인 경우도 많은데, 이런 경우엔 서술시점 또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에 독자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화자에게 이입될 수 있다. 독자는 마치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 혹은 화자의 실제 경험담을 듣는 듯한 착각을 경험할 수 있다.

 

 두번째는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한 방법인데, 등장인물들 중 화자와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에게 집중해서 읽는 방법이다. 어느정도 볼륨이 있는 직품이라면 주인공이나 화자 외에 이야기의 축을 이끌어가는 안타고니스트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아니, 그렇게 프로타고니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안타고니스트가 아니더라도 그들 주변에는 흥미로운 조연들이 자리잡고 있다. 아주 쉬운 예로, [배트맨]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이 작품에서 프로타고니스는 '배트맨' 이다. 당연히 안타고스트는 '조커' 나 '펭귄' '캣우먼' 등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아주 흥미로운 조연들이 있으니, 바로 고담시의 형사과장이자 배트맨의 조력자인 '짐 고든' 형사. 그리고 배트맨의 오랜 친구이자 웨인가의 집사인 '알프레드' 이다. 그 밖에 배트맨의 사이드킥인 '로빈' 이나 고든의 딸인 '오라클' 그리고 후에는 강력한 안타고니스트로 변모하는 투페이스 '하비 덴트' 검사 등도 있다. 이런 주변 인물에 집중해서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알프레도의 입장에서 '배트맨' 영화를 다시 보아도 아주 새로운 느낌일 것이다.

 

 세번째는 작가의 다른 작품군을 폭넓게 읽어봐야 가능한 방법인데,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며 읽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평소에 책을 정독해서 읽고, 읽은 뒤에 그 내용을 곱씹어 사색해보는 타입이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경우엔 '장 도미니크 보비' 의 [잠수복과 나비] 나 '키토 아야'의 [1리터의 눈물] 을 접한 뒤에야 진지하게 생각해본 방법이다. 고등학교 때 까지는 오로지 언어영억 문제풀이를 위한 독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속독법엔 몇가지 스킬이 있는데, 아마 왠만한 분들은 다 아실만한 방법들이다. 눈으로 읽는 단계를 거쳐, 대각선으로 읽기, 주어구와 서술구 나눠 읽기, 동사만 읽기, 명사만 읽기 등등 말이다. 20대 중반까지는 나 역시 이런 독학한 속독법에 익숙해져서 '정독' 을 하는 책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쥐어짜듯, 눈을 깜빡거려서 한권의 책을 완성했던 장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복과 나비]를 손에 들었을 때, 그렇게 쉽게 술렁술렁 읽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전신이 마비된 장 도미니크 보비가 힙겹게 완성한 한 권의 얇은 책. 과연 그 안에 작가는 어떤 메시지를 담았을까. 나비처럼 날고 싶은 영혼을 끈덕지게 붙들고 있는 잠수복 같은 육체안에 갖혀서,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철자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을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나아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든 작품들엔 그와 같이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세가지 방법만 이용하더라도 책 한 권 읽는데 한주일은 우습게 넘어간다. 시간이 부족하다. 그동안 설렁설렁 읽은 책들도 다시 손에 들게 된다.

내가 놓친 인물들 한명 한명들이 다 사랑스러워 진다. 5번도 더 통독한 폭풍의 언덕에서도 새로운 인물들과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이후에 만난 작품들 중에 '루이스 사폰' 의 [천사의 게임] 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다른 작품들도 접하게 되었다.

유럽 특유의 모호함과 서양 특유의 뚜렷한 분할, 스페인 특유의 음울함과 유럽 특유의 낙천적임이 말도 안되게 조화를 이룬 환상적인 소설이었다.

지금 막 종장을 덮은 [한밤의 궁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마음을 단순히 선과 악 - 그리고, 그 중 악에 속한 부분은 한없이 잔인하고 끔찍한것으로 이분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점을 가지고 메시지를 또렷하게 전달하고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며 뚜렷한 인과관계 속에서 개연성 있는 스릴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며, 권선징악의 동화적인 결말 또한 너무 2차원적이다. 

 확실히 가장 최근작인 [천사의 게임] 에 비하면 여러 부분에서 아쉬움을 준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처음에 콱 박혀진 베이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야기 내내 평면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지만, 루이스 사폰이라는 작가가 초기작부터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한밤의 궁전]의 이야기는 인도의 캘커타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그려진다. 

캘커타의 한 보육원에 살고 있는 7명의 고아 소년들. 절친한 친구사이인 동갑내기 소년둘 중 리더인 '벤' 의 출생의 비밀과 무시무시한 악당인 '자와할' 과의 숙명적인 대결. 작가는 애초에 등장인물들의 성장을 디테일하게 그리려는 의도를 완전히 배재하고, [대결]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벤과 소년들은 피할 수 없는 [대결] 을 인지하고 그것을 준비해 나간다. 등장인물들의 성장이 그려지는 부분은 이 부분에서 아주 잠깐이다. 단호하게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에 맞설 수 밖에 없음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 임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소년은 어른이 된다.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대결] 그 자체로 끌어들이기 위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벤' 이 아닌 평범하기 짝이없는 소년 '이언' 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중간중간 편지문을 등장시킴으로서 이야기의 화자가 '이언' 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주지시킨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인도의 [캘커타] 라는 도시 또한 상징적이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던 인도. 모든 유럽인들이 황금이 넘치는 낙원.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던 신화와 전설의 나라, 인도. 각종 도시 괴담들과 정령,악령, 불 같은 이미지들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트레이트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몽환적이고 신비한 이미지를 훌륭하게 자리잡아 나간다.

 

작품은 확실히 작가의 초기작답게 이야기를 간결하고 적확하게 전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적당히 독자들을 속이기도 하는데, 그 부분은 '자 이제부터 독자들을 속일겁니다' 라는 암시를 드러내 버려서 오히려 더 긴장하고 집중하게 만든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나를 속이는 걸까? 어느 부분을 어떻게 속이는 걸까?' 라고 의심하며 바짝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대결부분에 대한 정신없고 스펙타클한 묘사도 굉장하다. 아마 책의 클라이막스부분에서 책장을 덮은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 오싹함과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경험하지 못한 독자들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 사폰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는 낯설지만 익숙하다.

흔히들 서양 문학의 정서 전달은 보다 직접적이고, 한국 문학은 보다 우회적이라고들 한다.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호러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면, 헐리웃 작품은 베고 썰고 죽이는 살인마들이 눈 앞에 불쑥 불쑥 등장하며 깜짝 깜짝 놀래킨다. 한편, 한국 영화는 뭔가 있는데, 뭔지는 모르겠고, 나올락 말락 하다가, 웃음소리나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며 소름끼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루이스 사폰은 독자들의 감정을 그 두가지를 아주 잘 활용하며 쥐락 펴락 한다. 그리고,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우며 대단히 능숙하다. 명확하지만 몽환적이고, 뚜렷하지만 음울한데 바로 그 점이 우리에게 낯섦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들 역시 참 다들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다. 벤의 이야기가 중심이기에 큰 비중 없이 배치되어 있지만, 한 명 한 명이 모두 개성적이다.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더욱 길게, 많이, 오래 보고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어떻게 이런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주변에 멤돌게만 할 수 있었을지. 작가도 아주 아쉬웠을 것 같다.

 

누구나 마음속에 악을 품고 있다.

위에도 언급했듯, 선과 악의 구분은 대단히 모호하지만, 누구나 양심이 가로지른 라인이 존재한다. 그 라인의 이쪽 편은 선이고, 저쪽편은 악이다. 때로는 선과 악이 혼합된 영역도 있으며, 그 두 가지가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삶의 대부분의 일에서 사실 선과 악을 구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가지 너무나 완벽한 '악' 을 분별하는 방법은 있다. 바로 그 감정이 무엇으로부터 파생되었는지 생각해내는 것이다. 때론 사랑에서 파생된 행위가 악한 것으로 규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증오에서 파생된 행위가 선한 것으로 규정되는 경우는 없다. 증오는 언제나 악이다. 이분법적인 구분을 싫어한다고 몇번이나 언급했지만, 싫어한다고 해서 안 한 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수 많은 것들 중에서 두 가지를 나눠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이 경우일 터다.

증오는 반드시 악을 파생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한다면, 삶은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서 언제나 지글거리며 나의 살을 태워낼 뿐일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