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남의 날개 십이국기 6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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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왕 슈쇼는 십이국기 세계관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린 왕이다.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에서 잠깐 등장하길래 '다음편은 공왕이나 공국 기린 이야기가 나오겠군' 했더니 역시나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십이국기 시리즈는 요코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이 다음 연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패턴이 있기 때문이다.

경국의 요코가 왕이 되는 이야기(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는 모험 활극에 가깝고, 태국의 기린 다이키를 통해 전해지는 태왕 교소의 이야기(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는 신화나 전설, 안국의 연왕의 이야기(동의 해신 서의 창해)는 대하 역사물 느낌이라면, 공왕 슈쇼의 이야기는 버디 무비풍의 이야기이다. 


왕이 없어져버린 공국은 날로 피폐해지고 있었지만, 슈쇼는 워낙 부잣집에서 자라 여전히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 하지만, 슈쇼는 그 안에서 상당한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주위의 이웃들은 날이 다르게 수척해져가고, 요마의 습격에 빈번하게 죽어나가지만 자신과 가족들은 부유하고 안전하다. 이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가 아닌 어른들의 세계. 부조리함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어른들은 무책임하다. 자기 자신의 몸 하나만, 가족들만, 울타리 안에서만 안전하고 부유하면 만족하는 부모님을, 어른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슈쇼는 스스로 온실을 박차고 나와 대체 어른들은 이런 세상에서 뭣하고 자빠졌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왕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봉산에 도착해 간큐와 함께 산행을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슈쇼는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다.

'도남의 날개' 또한 십이국기 시리즈 중 '히쇼의 새' 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게 된 작품인데, 재독 삼독을 해도 재미있었다. 

경왕 요코가 엉겁결에 왕으로 선택받고, 수동적인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왕도王道를 따라 걷는다면, 슈쇼는 스스로 왕이 되기를 결정하고 적극적으로, 그야말로 패기 넘치게 왕좌로 향한다. 

왕이 되는 길. 기린에게 선택받기 위한 지원자들이 스스로의 능력과 운을 시험받기 위한 봉산행은 그 시작부터 녹록치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인간들의 인육과 피를 잔뜩 먹을 수 있는 봉산의 요마들에게는 성찬의 날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산행에서 오만에 가까운 자기애로 무장하고, 어린아이 다운 천진함으로 생각하는 바를 서슴치 않고 내지르던 슈쇼는 간큐와의 산행을 통해 진정한 리더쉽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게 된다.  


요코 이야기는 아예 왕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소녀가 왕으로 성장하는 내용이라면, 슈쇼 이야기는 이론과 사상으로 무장된 소녀가 경험을 통해 성숙되는 내용이었다. 요코 이야기가 전형적인 성장의 플롯이라면 슈쇼 이야기는 역시 전형적인 성숙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 

슈쇼는 스스로 택한 고난과 고통스러운 경험들 속에서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의지를 다듬고, 심지를 굳건히 한다.

경청을 배우고, 사과를 배우며, 포용을 배운다. 



제아무리 훌륭한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다 한들, 현실과는 다르다.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삶은 텍스트가 아니다. 슈쇼는 올곧은 생각을 가지고 당당하게 걸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수많은 벽을 맞닥뜨릴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마지막 대사 한방으로 슈쇼와 공국에 대한 걱정을 상당히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 어째서 내가 태어났을 때 오지 않았어, 이 멍청아!"






+덧: 조금 거슬렸던 부분은, 슈쇼는 전형적인 금수저라는 점이었다. 

금수저로 태어나긴 했으나, 누리기 전에 다 빼앗기고 맨몸으로 흙바닥에서 굴러 왕이 되는 이야기가 요코 스토리였다면, 금수저로 태어나 그 모든 것들을 풍족하게 다 누리며 최고의 길잡이들까지 얻어 왕이 되는 이야기.... 이긴 한데, 그냥 이 책을 읽던 시기에 내 심사가 좀 뒤틀려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아하는 타이틀이라니까.ㅎㅎ

전형적인 금수저 마인드가 얄밉기도 했지만, 어른들 틈에서 무시당하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했고, 말수가 적은 간큐가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 것도 얄미웠으니, 밉상 둘이 어우러져 한 편의 재미난 버디무비를 이끌어 냈으니, 좋은 점수를 줄 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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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2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형적이나 역시 전형적이다 ...라는 말에 지극한 동감!^^
 
히쇼의 새 십이국기 5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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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는 십이국기 세계관의 단편집이다. 


십이국기는 기본적으로 장편은 왕과 기린 등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사건이 펼쳐지고, 단편들을 통해 세계관 내의 다양한 인종과 계층들을 보여주곤 한다.

십이국기의 세계 자체가 작가가 단편을 한편씩 완성해 나가며 아이디어를 확장시키고, 논리를 맞추어 나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는 장편보다 단편을 좀 더 높이 평가하고, 장편보다 단편을 좀 더 좋아한다.

지난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편을 리뷰하면서 전체적인 세계관을 정리했었는데, [히쇼의 새] 에서는 십이국기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하급 관리들의 이야기가 소소하게 펼쳐지며 세계관을 두텁게 만들어 간다. 

표제작인 '히쇼의 새' 를 필두로 '낙조의 옥', '청조란' ,'풍신' 이렇게 네 편의 단편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히쇼의 새' 에서는 요코가 까메오처럼 등장해서 당시 일본의 팬들에게는 마치 선물과도 같았으리라 생각된다.(띠지에 적혀있듯 히쇼의 새는 오노 후유미의 12년만에 발표된 십이국기 제목을 달고 나온 작품이었으니!!.)


'히쇼의 새' 는 궁전의 큰 행사때 사용되는 일종의 제의를 관장하는 하급 실무 관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도자기로 만든 새를 날려 화살로 맞춰 부수는 일종의 쇼인데, 죽지도 않고 영원히 그 일만 해야한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 지기도 하지만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죽지도 않고 영원히 뭔가를 만들어내고 보여주는 일을 한다는 건 꽤나 행복할 수도 있겠다 싶다. 특히 히쇼의 경우처럼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알아봐주는 이를 만난다면 더더욱. 


작품 속에 등장하는 히쇼는 마치 오노 후유미 본인처럼 느껴진다. 

십이국기라는 방대한 세계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려 나가는 일 말이다. '십이국기' 는 한 이름을 가진 거대한 시리즈이지만 면밀히 따져보면 연작이라 부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매 작품들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다. 

창작자에게 창작물은 언제나 찰나의 산물이다.

그것은 문학이든 미술이든 마찬가지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품에 따라 감상할 때 마다 느낌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것은 엄연히 독자의 입장에서의 해석의 자유일 뿐, 창작자에게는 창작하는 순간의 찰나에 불과하다. 나 역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써 한번 그린 그림은 결코 두 번 다시 똑같이 그릴 수 없다. 디지털의 시대로 넘어와 복사+붙이기라는 신공이 있지만, 복사해서 붙여넣은 그림은 창조가 아니라 복제일 뿐이다. 같은 종이 위에 같은 붓으로 같은 터치를 했다고 해도 순간에 불과하다.

히쇼가 날리는 도자기 새 역시 마찬가지. 깨뜨리기 위해 만드는 도자기라니.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무의미하지만, 예술이란 관점에 따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다. 

히쇼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찰나를 영위하기 위한 영생이라니. 그 역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무의미하지만, 인생이란 관점에 따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다.  

도자기가 만든 새가 하늘로 날아올라 화살에 맞아 조각나는 순간 히쇼는 끝났다고 말했지만, 요코는 시작이라고 말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보는 군주를 위해 죽는다지만, 예술은 자신을 알아보고 즐기는 이를 통해 살아난다.

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예술이라 불리지도 못하고 너무 쉽게 '쓰레기' 라 이름 붙여져 재가 되어 사라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했으며,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못한 채 사라졌을까.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단 한 작품도 인정받지 못한 채 괴로움 속에서 굶어 죽어갔을까? 

창작자의 입장에서 타인에게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새삼재삼 통감하는 요즘이기에 정말 깊이 와닿았던 작품이다.

한시간 사이에 서너번을 다시 읽고, 또 다시 읽고, 또 생각에 잠겼던 작품이다.

앞으로도 여러번 되 읽어 보게 될 것 같다. 


'낙조의 옥', '청조란' ,'풍신' 역시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직급의 관리들이 등장한다. 

현대의 공무원들이 관리직부터 기술직까지 다양하게 있듯 십이국기의 세계 안에서도 다양한 일을 하는 관리들이 등장한다.

관리가 되어 선적에 들어가면 평범한 이전의 삶과 일별해야 한다. 가족들과 동반해서 선적에 들 수도 있지만, 모두가 영생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뿐 아니라 영원히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권태로운 일. 관리도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영생을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유쾌한 일은 아닌 듯, 남편을 버리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일도 잦은 듯 하다. 

비교적 한직에 머무는 하급 기술 관리들의 삶도 꽤나 흥미로웠다. '풍신' 은 나라의 수목을 관리는 기술직 관리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십이국기 세계에서 선적에 든 관리들은 어지간하면 나무만큼 오래 산다. 나무가 돌처럼 단단히 굳어버리는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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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쇼의 새 십이국기 5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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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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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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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 그 어떤 논란도 김훈 작가와 그의 글을 폄하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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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 상 십이국기 4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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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스크롤 압박, 논리적 비약, 비문 주의. 







 수 년 전, 십이국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야기 자체보다는 십이국기 세계관의 정치형태에 큰 흥미를 느꼈었다.

'천황' 이라는 시스템과 사방이 막힌 섬나라 민족 일본인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인상은 지극히 중국적이고, 사회 시스템도 중국의 것을 많이 따왔지만, 그 기저에 흐르는 설정 자체가 대단히 일본적이라고 느껴졌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여점의 난립과 함께 소위 '킬링타임용' 판타지 소설이 판치던 시기였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판타지 소설의 홍수 속에서 '마계마인전(로도스도 전기)', '반지전쟁(반지의 제왕)', '얼음과 불의 노래' 등 해외의 명작 판타지 문학은 물론, '퇴마록(이우혁)', '드래곤 라자(이영도)', '비상하는 매(홍정훈)' 등 문학성을 인정 받을 만한 한국 판타지 소설들도 주머니속의 송곳처럼 솟아 올랐더랬다. 


 '십이국기'는 그러한 한국 판타지 문학 시장의 양적인 팽창의 거품이 잦아들고 안정기를 향해 서서히 하락하던 즈음에 국내에 찾아왔는데, 애니메이션 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오랜 기간동안 꾸준히 출간되었다. 나는 2000년대 초반, 군대에서 전역한 뒤, 우연히 애니메이션을 접하고 난 뒤에야 원작 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국내에 출간 되었던 원작 소설이 절판된 상황이어서 별 수 없이 여기저기 대여점과 인터넷 중고 서점을 기웃거려야 했다. 

 당시에 십이국기를 읽다가, '아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 라고 느꼈던 시점이 6,7권 즈음(구판 기준)이었는데, 부제가 바로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이었다. 재미가 있다 없다를 떠나, 나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었던 흥미요소가 십이국기만의 독특한 세계관 때문이었는데, 6, 7권에 이르자 저자가 하고자 했던 말들을 다 들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세계관의 허점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며 전반적인 호기심이 줄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번에 다시 읽으며, 다음권에 대한 기대감이 엄청나게 부풀었다.

그 때와 다른 것들이 읽혔기 때문이다.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은 십이국기 시리즈의 1부인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를 통해 경국의 왕이 된 요코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왕이 되었지만 자신이 살던 현대의 일본과는 너무나 달라 경국의 정치상황은 커녕, 기본적인 생활상식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요코는 덜컥 주어진 무거운 책임들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 한 두 해 집중적으로 생고생을 했다지만, 평범한 여고생 아니던가. 자고로 군왕이란 조기교육을 통해 키워지는 법이다. 어쨌든, 진짜 왕이 등극하며 경국에는 기나긴 자연 재해가 끝나고 황폐해진 대지가 빠르게 수복되고 있었지만, 정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탓에 경왕 요코의 눈길이 닿지 않는 각 지방의 봉건 제후들의 악행은 끊이지 않았고, 그동안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앉았던 고관 대작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어린 새 여왕의 눈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러한 탓에 이 세계에 대한 상식도 부족한 경왕 요코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저간의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경국의 기린 게이키는 선문답을 내뱉으며 요코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행동파 요코는 자신의 성격에 맞게 직접 민생을 살피기 위해 게이키에게 일체의 정무를 일임한 뒤 변복을 하고 하계의 평민들 사이로 녹아든다. 십이국기 세계에서 왕은 나이를 먹지 않는 불멸의 존재. 요코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시간을 들이고 발품을 들여 바닥부터 차근차근 살피기로 한 것이다.    




-여기부터 스포일러 있음 -



전체적인 구성은 오노 후유미 답게 짜임새도, 리듬도, 특히 캐릭터의 묘사까지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요코와 함께 이야기 전체를 이끄는 스즈와 쇼케이의 삼각 연출은 참 좋았다. 세 캐릭터는 자신의 위치에서 능란하게 역할을 수행해내는데, 특히 환경과 주변 사람들에 영향을 받아 입체적으로 변화해가는 심리 묘사는 정말정말 훌륭했다. 

 

 반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전투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완성도가 떨어진다. 

요코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부분도 극의 흐름에 맞지 않게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고, 그녀가 갖고 있는 능력 자체가 먼치킨이나 데우스 엑스마키나라 불러도 될 정도로 무적이라 전투 장면의 긴장감이 엄청나게 떨어진다. 게다가, 이번 타이틀의 오프닝은 다른 왕국의 왕이 허무하게 척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지라, 넘사벽인 요코의 무력은 전체적인 완성도를 위협할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클라이맥스를 완성하는 금군과의 대치 장면에서는 단순히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수습되는 등, 조금만 신경 썼으면 엄청난 서스펜스와 카타르시스를 주었을 장치들을 너무 어이없이 허비해버린다. 

힘껏 잡아당긴 고무줄을 탁 하고 놓았는데, 정작 고무줄의 탄성이 없어져 그냥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져 버린 느낌이랄까. 

 오노 후유미라는 작가가 갖고 있는 '전투' 와 '전쟁'에 대한 연구와 상상력의 빈약함이 드러나는데, 왜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편에서 요코가 가짜 왕을 물리치고 진정한 왕이 되는 과정을 단 한 문장으로 마무리 했는지 이해했다. 

4/5 지점까지는 90점에 가까웠던 이야기가 마지막 1/5는 30점을 주기에도 아까운 완성도를 보이며 무척 특별했던 마지막 페이지의 감동을 쑥쑥 갉아먹었다. 

 지금까지 읽어온 [십이국기] 시리즈 중 가장 극적인 엔딩을 갖고 있는 작품이지만, 직전의 한 발자욱 때문에 그 효과가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특히 스즈와 쇼케이, 요코가 같은 공간 안에서 공공의 적을 향해 발을 맞추게 되는 과정이 마치 작은 블럭을 쌓아나가듯, 뚜렷한 인과관계 안에서 차근차근 완성된 것이라 특히 더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판타지 소설의 완성도를 따지는 가장 큰 기준은 세계관의 설득력이다.

예를들어, 날개가 있는 지적인 종족이 존재하는 세계라면 그 세계의 문명은 우리와 참 다를 것이다. 

우리의 신화처럼 눈에 보이는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나, 드래곤 같은 지적인 포식자가 존재하는 세계의 인류 문명도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사고방식과 사회구조의 차이점, 사상과 개념들이 무한한 상상력과 현실적인 통찰력이 만나 합치되는 지점이야말로 판타지 문학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낯선 것이 익숙함이 되는 순간, 비일상이 일상으로 느껴지는 순간.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판타지를 읽을 필요도, 사랑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어쩌면 고작 이야기의 배경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세계관을 왜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냐고 묻는다면, 위에 언급한 판타지 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특정점인 동시에 저자의 '사상' 과 '철학'이 가장 짙게 묻어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어슐러 르 귄은 우주의 외딴 행성에 살고 있는 외계인들을 창조했다. 

이 외계인들은 성의 구별이 없다. 후손을 잇는 방법도 다르고, 가족의 개념과 형태도 다르다. 당연히 사회의 구조와 정치도 다르다. 어슐러 르 귄은 이 외계인들의 사회구조와 풍습, 종교 등을 통해 현실의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성 역할 구분의 불합리와 성 차별의 폭력성을 직관적으로 그려냈다. 

이영도는 눈에 보이는 시간축을 가진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흐른다' 고 표현하는 시간개념을 전복시키며 매 순간 시간에 얽매여 사는 우리의 삶을 우회적으로 비꼬았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특별한 창조물 역시 세계관의 논리적 인과성 안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앤 라이스는 뱀파이어가 우리와 함께 살아 숨쉬는 세계를 창조해냈다. 얼마나 은밀하게 인간들의 눈을 속여가며 어둠속에서 살아가는지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조앤 롤링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현실에 마법사들을 우겨 넣은 것이 아니라, 마법사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처럼 세계관을 꼼꼼히 살펴보면 저자가 갖고 있는 철학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에, 주제의식에 보다 깊이 다가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판타지 세계의 세계관을 꼼꼼히 살펴보며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애쓴다. 



 [십이국기] 역시 충분히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일단, 지금까지 출간된 작품들에서는 기린이 어떤 존재이고, 왕은 어떻게 선택되며, 기린과 왕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려졌다. 기린의 탄생과 왕의 탄생은 일종의 천부적 권리이다. 기린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린이고, 잘못된 환경에서 성장해도 타고난 재능을 잃지 않는다. 기린의 재능이란 왕을 알아보고 선택하는 능력이다. 모든 기린이 갖고 있는 능력이며, 기린은 한 국가에 단 한 명 만 존재한다. 

 기린이 동전의 한 면 이라면, 왕은 다른 한 면이다. 

기린은 탄생부터 명확하지만, 왕은 그렇지 않다. 왕기는 발현, 연마된다. 왕기 역시 한 국가에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데, 관점에 따라 선천적일수도, 후천적일수도 있다. 기린의 성정이 결코 변하지 않는 것에 반해, 왕이 갖고 있는 왕기는 변질된다. 왕기를 인정받고 기린에게 선택받아 영원불멸의 지배자가 되는 왕은 초기에는 선정을 펼치지만, 종국에는 폭정, 실정을 거듭하여 결국엔 왕기를 잃고 천벌을 받아 병들어 사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왕기가 절대적인 것이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고대 제정분리 사회의 제사장 역할을 기린이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 작품 안에서도 일반 사람들은 기린에게는 신비감을, 왕에게는 경외감을 갖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동의 해신 서의 창해]에서 왕과 기린을 통해 십이국기 세계관의 절대적인 '섭리' 를 선보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그러한 섭리 아래서 성립된 사회 시스템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십이국기 세계는 전제정인 동시에 선인(귀족)과 평민의 뚜렷한 계급사회이다.

왕은 어떠한 법에도 저촉받지 않는 불가침의 존재로써 시간의 흐름조차 구애받지 않는다. 

실정을 하면 병이들고 국가에 재난이 찾아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이므로, 사실상 왕의 행위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그 어떠한 것도 없다. 심지어 신의 대리인과 다름없는 기린조차도 왕에게는 절대 복종할 수 밖에 없기에 왕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신으로써 국가 위에 군림한다. 재미있는 부분이 이 부분인데, 왕이 정해지는 과정은 종교적이지만, 왕이 폐해지는 과정은 세속적이다.

 일반인들이 정치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선인이 되어야 가능하다. 추천은 다른 이도 할 수 있지만, 선적에 오르거나 지워지는 것은 오로지 왕만이 결정한다. 한 사람이 선적에 오르면 직계 가족들도 선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권력의 세습도 어느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선적에 오르는 순간 불사의 존재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세습은 단순히 물려받는 개념과는 다르다. 일반인들에 비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보다 쉬워진다는 의미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하지만, 고위 관료의 자식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지는 그려진 바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회라면, 선적에 오른 고위 관료의 자식은 정치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올바를 것 같다.) 현실 사회의 귀족들에게도 '급' 이 있는 것 처럼 선인들에게도 '급' 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의 갑을관계도 뚜렷하다. 

 왕은 누군가에게 불멸의 생명을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있는 유일한 존재인 셈이고, 바로 이 결정권을 통해 왕은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한 소리 했다가 왕의 미움을 사 선적에서 지워지기라도 하는 날엔 영원한 생명이 사라져버릴테니, 신하들은 쉽게 왕 앞에 나설 수 없고, 자기들만의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신 앞에 선 인간들처럼, 왕 앞의 신하들은 더욱 더 소심하고 의기소침할 수 밖에 없다.  


왕은 제후를 선적에 등록시켜 영원한 삶을 약속하고 공과에 따라 다스릴 수 있는 봉토를 내린다. 

제후는 영원한 삶과 봉토의 대가로 복종을 약속하고 세금을 바친다. 

재미있는 부분은 왕과 제후 사이에 군사력이 배제된다는 사실이다. 

 실제 현실의 봉건사회에서 왕은 외국과의 외교관계에 책임을 지고, 관계가 파탄나서 전쟁으로 치달으면 제후들은 병력을 지원했다. 하지만 십이국기 사회에서 대외적인 외교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의 위정자들은 서로 '외국의 사정에 참견하지 않는다' 는 섭리에 의한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십이국기의 세계에서 모든 군권은 왕에게 있을 것이다. 

작품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유추할 수 있는 대목들은 존재한다. 작품 안에서는 지방 제후들에게 왕의 사자가 한명씩 파견되어 지방권력을 견제하는데, 각 지방의 치안을 책임지는 군사들 또한 왕의 사자가 관리했을 것이다. 우기의 치수권조차 왕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경직된 정치구조 아래에서 지방 제후들이 사사로이 병력을 거느릴 수 있었을 리 없다. 때문에 경국에서는 특정 지역의 병장기 대규모 거래만으로도 내란 음모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십이국기의 세계는 지극히 폐쇄적이고 변화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정체되어 있다.

어떤면에선 안정된 구조라고 볼 수 있겠지만, 발전이 불가능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선 백성들에게 국가의 개념이 희박하다.  

왕은 자연현상의 일부에 가깝다. 왕이 실정을 펼치거나 죽는다는 것은 곧 자연재해이다. 실제로 자연재해가 일어나기도 하고. 당연히 다른 나라로 옮겨 가는 것이 순리에 맞다. 

 문명의 발전은 자연현상을 탐구하고 이용하기 위한 연구에서 시작된다. 천체를 관찰하고, 생명들의 생몰을 관찰하고, 신의 섭리, 자연의 섭리를 연구하며 과학이 발달하고, 철학이 발달한다. 평등사상이나 시민의식은 자연철학 속에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평범한 백성들은 자연현상을 탐구할 필요도 없고, 의문을 가질 이유도 없다. 

 자연재해는 오로지 왕의 유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왕만 있으면 가물지도 않고 홍수도 나지 않는다. 때문에 왕이 없으면 백성들은 왕이 없는 현실을 한탄하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결국 다른 나라로 피난한다. 

 외국과의 전쟁도 없다. 인류 문명의 가장 큰 발전은 대부분 전쟁을 통해 이룩했다. 

 하지만 십이국기의 세계에서는 전쟁이 없기 때문에 혁신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 십이국기의 세계에서 백성은 노예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오로지 왕과 제후에만 기댄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이번 작품에서 요코와 반란군들이 전투를 하는 과정 중에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세계관의 맹점 안에 작가인 오노 후유미가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변화가 불가능한 세계.

이 안에서 라크슌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변혁의 싹을 틔워내고, 요코를 통해 위로부터의 변혁을 시도한다.


 십이국기의 세계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가장 두려운 상황은 오로지 '왕이 없는 상태' 이다. 

왕이 있는 한, 자연재해도 일어나지 않고, 경작할 땅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원시사회에서 해와 달을 섬기던 농경부족이 해와 달이 없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 십이국기의 세계에서는 절대 외국을 침략하지 않는다. 외세의 침입이 없다면, 군대가 필요없어진다. 

토지의 소유도 한시적이다. 부부와 가족의 개념도 마을 공동체의 개념보다 크게 강력하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혈연으로 이루어진 씨족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혈연이 없는 사회 공동체라는 것이 솔직히 상상이 잘 안되지만, 상당히 진보적인 개념임은 확실하다. 사실 공동체의 개념을 살펴보면 십이국기의 세계관은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을 배제시킨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와 비슷하다.  


 토지 시스템은 우리나라의 삼국, 고려시대의 균전제와 비슷하다.(애초에 균전제 자체가 당나라의 것을 바탕으로 했으니.) 우선 땅은 모두 왕의 것으로, 봉건 제후들이 우선적으로 봉토를 하사받고, 제후들은 그 땅을 백성들에게 국가적으로 정해진 역법을 통해 분배한다. 제후등의 귀족들은 왕에 의해 선적에 들어 선인이 되므로 굳이 후손을 가질 필요가 없고, 외적이 출몰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를 조직할 필요도 없다. 사회 치안을 위한 최소한의 병력은 중앙 정부로부터 내려온다. 사적인 재산을 축적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선인이 되면 죽지도 않고 병에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왕이 존재하는 한 삶에 불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왕이 없어진다 해도 제후까지 영향을 받는 일은 없다. 왕이 없어지면 요수나 요마가 출몰하고 자연재해가 시작되는데, 그를 대비한 제후들을 위한 독립적인 시스템이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왕이 없어진 뒤의 봉건 제후들은 영주민들에게 선행을 베풀수도 있고, 악행을 일삼을 수도 있다. 왕이 없는 기간동안 두각을 드러내 중앙정부를 장악하는 고위 관료도 생겨날 것이다. 


 이번 작품의 주 무대가 되는 경국의 경우에는 요코 전의 선대 여왕이 오랜시간 실정을 했고, 그 뒤에는 가왕이 통치했기 때문에 중앙권력의 체계가 많이 무너져 있었을 것이다. 지방 제후들은 닥치는대로 자치권을 하사받아 각 지역의 왕처럼 행사했을 것이고, 정치에서 멀어진 여왕은 중신 몇명에게 권한을 위임했을 것이다. 중앙 정부는 중신 몇명에게 좌우되며 지방 제후들 역시 자신의 이익을 좇아 편을 나누었을 것이다. 각 지방에 파견된 군사들 역시 자연스레 각 지방에 편입되었을 터다.


 1권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에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요코가 가왕으로부터 왕권을 되찾아 오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외국의 사정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깨준 연왕의 힘을 빌려 수도와 왕궁에서 꽤나 격렬한 전투가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결국 승리해서 요코가 정당한 왕권을 되찾았지만,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요코로서는 중앙정부를 일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와 북한의 해방정부가 친일파들을 숙청할 수 없었던 사정과 같다.

경국은 오랜 시간동안 중앙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지방 제후들이 독자적인 권력을 구축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지방 제후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중앙 관료들을 일거에 숙청할 수는 없다. 요코는 아직 제대로 군권을 장악하지 못했을테니, 만약 그렇게 했다면 각 지방에서 일거에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자비로운 기린의 종족 특성 상 게이키가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을 것이고. 요코는 우선 자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전에 중앙 정부를 안정화 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가왕과 관련된 과거를 불문에 부치고 모두 포용하는 정책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왕 편이었던 중신들과 끝까지 가왕에게 반대했던 중신들은 반목할 수 밖에 없다. 이번 작품 안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정치적 이슈가 바로 이 부분이다. 


 

 이렇게 폐쇄적이고 안정적인 시스템 안에서 원인이 불분명한 현상은 오직 단 한가지, '식' 이다.

식으로 인해 기린이 열린 열매가 봉래로 넘어가기도 하고, 봉래의 평범한 사람들이 허해를 건너 십이국기의 세계로 넘어오기도 한다.

십이국기 세계의 정체된 역사에 조금이나마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불특정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십이국기의 세계에 영향을 끼치기 힘들다.

[동의 해신 서의 창해] 에서 보였듯, 기린은 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들의 종족적 특성 자체가 안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이라면 어떨까? 

왕은 기린과 다른 '인간'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안정한 존재.

세계관 안에서 절대적인 힘을 지녔으면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왕' 이라는 요소를 '식' 을 통한 변수로 집어넣은 것이다.


 이렇게 세계관을 이해하고 읽으면 요코와 스즈, 쇼케이가 맡고 있는 역할을 보다 극적으로 읽을 수 있다.

십이국기의 세계관은 끔찍할 정도로 정체되어있는 사회이지만, 요코가 등장한 시기에 십이국기의 세계 전반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지방 제후들의 악행이 이어지며 백성들의 의식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진보적인 사상가로서의 길을 걸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라크슌 같은 인물이 바로 그런 이다. 가까운 국가에서는 실정을 거듭하고 있는 왕을 지방 제후가 세를 규합해 척살하고 마는, 성공한 쿠데타의 사례까지 등장했다. 

 요코와 스즈, 쇼케이의 만남은 아래로부터의 변화와 위로부터의 변화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리고, 요코의 첫번째 칙령은 십이국기 세계관 전체의 변혁을 이끌어낼 것이 분명하다.

과연, 십이국기의 세계에서 또 어떤 일들이 더 일어날까??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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