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채택된’ 서사는 조작적이고 구성적이다. 폭력은 늘 예측과 상상력을 뛰어넘는 데 반해, 서사는 줄거리라는 체계화를 피하지 못한다. 또한 서사는 늘 해석된 것이기에 실상을 왜곡한다. …오카 마리는 말과 경험, 언어와 사건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을 비판적으로 직시한다. - P90

모국어의 안전과 편안함은 당연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내 혀에 얹혀진, 내가 말할 수 있는 그 유일한 언어를 통해 나는 내 생각을 표현하고, 주어진 문화적 유산을 배우고, 타인과 소통한다. 그 언어,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단 하나의 언어는, 아렌트가 주장했고, 아메리가 믿었던 것처럼, 나와 밀착된 나의 떼어 낼 수 없는 부분이자 나의 가장 중요한 빼앗길 수 없는 정체성인가? - P106

그것은 원래 있는 의미를 고스란히 전달하겠다는 본질주의에 근거한 의미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다르게 말하기, 번역될 수 없는 것을 번역하려는 시도, 어려움이나 낯섦, 다양한 가능성이나 불가능성들을 감수하면서도 드러내어 보이고자 하는 약속이다. - P115

이런 맥락에서 ,말하기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주체적인 외향적 행위인 반면, 듣기는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내향적 응대인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발화자를 떠난 말은 듣기에 의해 취사 선택되고 재단된다. 듣는 사람이 들을 만한 내용과 그렇지 않은 내용을 가를 수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그 말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 P209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언어의 규범적 틀 안에서 내가 나를 설명해야 한다는 이 불일치는, 서사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내가 사용해야 하는 언어의 통제할 수 없는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 언어의 규범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 P2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전 신화. 오드리 로드의 조어라고 한다. ‘집’(캐리아쿠)에서부터 ‘아프리케테’에 이르는 여정이라는 책 소개가 알려주듯이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닌 본인 정체성의 기원을 찾는 탐구기록이다. 그런 면에서 더욱 다채롭게 읽힌다. 오드리 로드의 섹슈얼리티에 매료되며 읽을 수(내 케이스)도 있겠고 혼란과 자기 부정 속에서 스스로의 길을 만들며 대차게 걸어나가는 주인공의 성장소설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나 들여다 보는 렌즈가 되기도 한다. 자신에게 흔적을 남긴 여자들을 복기하며 그들과 스스로를 자미로 호명하는 신화적 여성 영웅 서사라고 하면 어떨까. 


우리 의식의 가장자리 어딘가에는 신화적 규범이라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그 기준에 맞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국에서 이런 기준은 보통 백인에, 날씬하고 남성적이며, 젊고 이성애적이고, 기독교적인,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라는 뜻이다. 권력은 이런 신화적 기준들을 활용해 사회 내부에 온갖 덫을 놓는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그래서 로드는 몸소 신화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분열과 자아 혼란은 1950년대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의 파장과 함께 소용돌이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만나는 ‘아프리케테’와의 화합은 경이롭기까지 한데 그간의 난관을 온몸으로 통과한 로드에게 주어지는 온당한 자격이자 당연한 귀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눈이 안좋고 호기심많은 이 소녀를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나는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해피엔딩을 만난 셈이다. 오드리 로드 너무 좋아서 중심을 못잡는다. 언니 다 가져요.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우리가 의지하는 진리들이 있다. 여름철엔 해가 북쪽으로 움직인다는 것, 얼음은 녹으면 작아진다는 것, 휘어진 바나나가 더 달다는 것. 아프리케테는 나에게 나의 뿌리를 우리가 가진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가르쳐주었고, 여태까지 나는 그 정의를 배우기 위한 훈련을 해왔을 따름이었다.”432 

로드는 내면의 분노와 혐오를 구분하고 스스로가 직시할 것을 늘 강조했다. 그런 깨달음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그의 언어에 힘을 부여했는지 <자미>를 읽음으로 해서 구체화된다.


“우리의 역사가 가르쳐 준 게 있다면,억압의 외적 조건만을 변화시키는 걸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려면, 억압이 개개인의 마음에 심어 둔 절망을 인식해야 한다. … 우리는 각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이 혐오를 우리 손으로 끄집어내, 그것이 누구를 멸시하게 부추기는지 직시해야 한다. “251 <시스터 아웃사이더>

“자아 존중감은 이론적으로 말해 봐야 별 효과가 없다. 그런 척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 나는 나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현재의 내가 아닌 것을 경험하는 고통을 무릅쓰며, 현재의 내 모습이 선사하는 달콤함을 맛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 335 <시스터 아웃사이더>

나를 혹독하게 들쑤셔대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감히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314 <자미>


자미 아름답다고 깨방정과 주책 떨며 신봉하고 있지만ㅋㅋ 억울하고 비통한 에피소드가 그득한 이 책을 읽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더 있다. 페이지(생각나는대로 사건과 트라우마를 나열해본다)마다 트라우마 생존자만이 지닌 강단과 여유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제네비브, 유도라, 키티, 진저, 엠마, 비, 뮤리엘

-엄마

-학교

-인종차별, 성차별과 정체성 고민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서조차 느낀 분열과 고독

-불법 낙태 수술

-열악하고 부당한 노동환경, 시대의 정치적 혼돈과 가난

-멕시코와 워싱턴 견학, 할렘에서의 어린시절


김애령의 책 <듣기의 윤리>에서 저자는 아렌트를 인용하며 불멸성을 획득한 이야기의 조건을 짚는다. 

“그렇다면 불멸할 삶, 시와 역사로 기록되는 이야기는 곧 영웅들의 이야기뿐인가? 영웅들의 이야기만이 불멸할 가치가 있는가? 아렌트가 그것을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이야기가 드러내는 주인공은 어떤 영웅적 자질도 필요 없다”고 부연한다.”오히려 그녀는 불멸성을 획득할 위대함은 용기와 대담성, “기꺼이 행위하고 말하려는 의지”에 있다고 지적한다. .. 그렇다면 이야기하기 자체가 곧 용기와 대담성의 표출이며, 세계에서의 출현 자체가 곧 가치 있는 삶, 한정된 사적 필멸성의 영역을 벗어나는 자유를 의미하게 된다. 40 <듣기의 윤리>

로드는 피해자 혹은 승리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로서 모든 것을 재정의했다. 고통스럽고 불완전한 스스로를 드러내며 자미는 온전한 연대기가 되고 로드의 자전신화는 마침표를 찍었다.



마무리 못하겠어. 마냥 벅차. 오드리 로드 사랑해요. 사우스와 절구, 11챕터의 모든 문장도 사랑해요.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3-02-22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이 책 읽고 있어요. 오드리의 엄마가 마야 안젤루의 엄마랑 겹쳐 보이는데 하얀 피부의 엄마를 갖고 있는 흑인 여자아이의 마음을… 전 모르는데 넘 두근두근하고요.
김애령… 기억해두겠어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자주자주 오소서!!

유수 2023-02-22 21:47   좋아요 1 | URL
저 마야 안젤루 안읽어봐서 너무 궁금해요. 뭐부터 읽을까요. 새장 책 말씀하시나요? 쓰는 건 요원하나 자주는 오죠! 자미도 단발님이 리뷰 먼저 쓰라고 해서 쓴 걸요??!! 김애령 <듣기의 윤리>도 너무 좋다는…

난티나무 2023-02-22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책 읽기가 고통스럽지 않았다!!!! 저도 백자평 쓰면서 그 비슷한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길이 땜에 삭제함요.ㅋㅋㅋ
유수님이 정리도 잘 해주시고 글 잘 써주셔서 늠 좋아요!!!!!!!!!!! 😍 11챕터 다시 읽어야지^^

유수 2023-02-22 21:44   좋아요 1 | URL
같은 책 읽는 즐거움 너무 좋다!! 정리는 뭐 아시다시피 책은 크고 저의 역량은 작다는 걸 또 느꼈지만ㅋㅋㅋㅋ 자미는 사랑입니다. 난티님 백자평 말고도 길게 또 써주세요.

오후 2023-11-27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미도 좋지만 이 글도...💗 잘 읽었습니다!

유수 2023-11-27 10:28   좋아요 0 | URL
다시 읽어보니까 제 얘기는 그냥 와앙 좋아 좋다..뿐이네요 ㅎㅎ 어떻게 읽으셨는지 넘 궁금합니다.
 

인간군상, 자아실현, 정복욕, 서구인들의 에베레탈리즘(?).. 등산얘기이면서 등산 얘기일 수만은 없으니 흥미로울 수 밖에. 곧 비극이 시작되는 듯.

…에 있는 쿰의 맨 위 지점까지 올라갔다가 눈 속에 파묻혀 있는 또다른 시신을, 정확히 말하자면 시신의 하반신을 목격했다. 옷차림과 가죽으로 된 구식 등산화로 미루어 그 희생자는 유럽인인 것 같았고 그 산에서 적어도 10년 내지 15년 정도 묵은 듯했다.
먼젓번에 시신을 처음 봤을 때는 몇 시간 동안 몸이 떨렸지만 이번에는 그 충격이 금방 가셨다. 그 두 시신 곁을 지나가던 다른 사람들은하나같이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눈길을 돌려버렸다. 마치 그 냉동 건조된 시신들이 현실적인 존재가 아닌 척하는 것이 그 산에서는 일종의 불문율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우리 중의 그 누구도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솔직하게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것처럼. - P160

셰르파들이 그런 의식을 소중히 여기고 많은 공을 들이긴 하나 그들의 불교는 독단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대단히 유연한 종교다. 예컨대맨처음에 빙폭으로 들어갈 때는 어느 팀이든 간에 우선 사가르마타의자비로운 은총을 빌기 위해 푸자라는 복잡한 종교 의식을 치르게 되어있다. 그런데 푸자를 주재할 노스님이 사정이 있어 예정된 날짜에 멀리떨어진 마을에서 그곳까지 올 수가 없게 되자 앙 체링은 우리가 가능한한 곧 푸자를 치를 뜻을 갖고 있다는 걸 사가르마타가 알고 있으므로그대로 빙폭을 통과해도 괜찮다고 선언했다. - P189

그날의 남은 시간 동안 제2캠프에는 불안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에베레스트가 최악의 면모를 드러낸 것도 아닌데 우리는 안전을도모하기에 급급했으니까. - P185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3-02-20 0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의외의 포스팅에서 간헐적이지만 꾸준히 추천 받아 와서 언젠가는 직접 읽고 싶은 책 중 한 권이네요^^ 원제목 그대로 옮겼는데 더 멋스러운 타이틀인 것 같아요.

에베레탈리즘.
유수님 통해 처음 들으면서도 짐작이 가는 용어네요^^

유수 2023-02-20 07:56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얄라알라님! 에베레탈리즘 ㅋㅋ 제가 막 지어냈어요. 이 열병?을 가리키는 용어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죠 ㅎㅎ 존 크라카우어도 그렇고 번역도 그렇고 말씀대로 멋스럽고 흥미진진한 책이에요.

단발머리 2023-02-20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구인들의 에베레탈리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고 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은 구매이력이 있으신데 다시 구매하세요?”


중고서점 카운터에서 직원이 물었다. 반사적으로 앗, 내가 뭘 착각했나 싶었는데 양해중 말이었다. 결제해달라고 했다. 그랬지. 이 책을 샀었다. 여러 번. 이제는 집에 없는데. 이 책이 절판이라니 너무 아쉬우면서도 이해가는 바가 있었다. 서가에서 마주치곤 바로 바구니에 담았다.


 













이 소설집을 왜 좋아했을까. 선물할 때 **야, &&언니, 네가 내 양해중(주인공 이름, 여자다)이었던 것 같아서, 라는 말을 덧붙였다.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 사이가 됐어도 건수(?)가 생기면 보냈다. 대소사에 매번 함께 하지는 못해도 같이 지낸 시간이 든든하고 즐거웠다고, 그 기억이 떠오르면 웃곤 한다는 말을 대신하는 메시지. 


<성희의 소파>

성희는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이유 없이 남동생로부터 맞고 차이고 목을 졸리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부모는 방관했다. 거실의 소파에서 티비라도 보면 목이 졸릴새라 집에서는 거의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렇게 소파는 하나의 트리거가 되었다. 성희는 공공장소에서조차 소파를 피하며 살았다. 

독립하고 나서 이런저런 주거 형태를 거쳐 이제 성희는 새로운 아파트를 마련했다. 휑한 거실에 앉아 해가 넉넉히 드는 바닥을 바라본다. 다리를 쭉 펴고 앉는다. 인터넷 쇼핑을 시작한다. 소파를 검색한다.


“5분 전에 올라온 게시물이었다. 잡지 광고나 백화점에서 볼 법한 브랜드의 소파였고, 검색해보니 판매자가 내놓은 가격은 정가에서 0이 두개나 빠진 값이었다. 지역도 성남으로 되어 있어 성희는 바로 쪽지를 보냈다. 답장으로 판매자가 보내온 주소는 같은 아파트 단지였다. 판매자에게 구매 의사를 전한 성희는 한 시간 후로 방문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성희는 해중을 만난다. 둘은 거래하기로 단번에 결정하는데 소파를 옮겨야 한다. 거리가 가까워 용달을 부르기가 뭐했다는 성희에게 해중은 쓰고 버려도 된다며 고무장갑을 건넨다. 자연스럽게 카트로 소파를 함께 옮긴다. 물 한 컵 달게 얻어 마신 해중은 볕 때문인지 자기 집과 다르게 여기 기운이 좋다며 하시는 일 잘되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떠나며 소설은 끝난다.


<언제나 양해를 구하는 양해중 씨의 19가지 그림자>는 양해중 씨가 양해를 구했던 19가지의 상황이 담긴 단편을 엮어 만든 소설집이다. 이 단편 <성희의 소파>에서 양해중은 유흥탐정앱으로 남자친구의 성매매 이력을 알고 막 파혼한 참이었다. 그 상황이 아주 짧게, 단 몇줄로 제시된다. 양해중은 아마도 약혼자가 샀을 소파를 팔아치우고 나서 신혼집으로 정했을 아파트를 떠난다. 같은 아파트 옆동에서 소파를 구매한 성희는 안정/안정감을 처음 자기 것으로 여기며 정착을 시작하고. 접점이라고는 같은 아파트단지에 거처한 잠깜 뿐인 둘의 마주침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길다.


왜 길지.

양해중이 유흥탐정 앱을 깔고 나서 파혼했다는 것과 성희가 손아래 남자형제에게 맞고 자랐다는 정보만으로 소설이 왜 충분해질까.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와 잊고 있던 기억, 떠오르는 누군가의 이름 혹은 얼굴. 이 서사에게 마련된 자리가 이미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다가 다시 책의 두 인물이 대화하는 장면으로 돌아간다. 

“와, 이렇게 볕이 잘 드는 집도 있었구나. 같은 아파트인데 너무 다르네요.”

“이쪽이 남향이더라고요. 옮기는 것까지 도와주시고 너무 고생하셔서 어떡하죠. 소파도 너무 새거고…”

“같이 살 사람이 산 건데 따로 살게 돼서 처치 곤란이었어요. 올리자마자 팔려서 오히려 절 도와주신 거죠.”


소설은 간결하게 마무리되는데 평범한 이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았었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머물게 된다. 초면인 두 사람이 볕이 가득한 거실에서 대화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무해함과 평온함이 있다. 각자의 짐을 뒤로 하고 나아가는 인물들의 교점, 그 순간을 잠시 지켜봤다는 희열에서 나온 여운일까. 


‘여성서사’라는 설명이 따라오는 콘텐츠를 자주 본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복수극이기도, 경험을 가감없이 녹여낸 드라마거나 로맨스일 때도 있고,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일 때도 있다. 어떤 걸 보더라도 자연히 내가 기대하게 되고 즐기는 것들이 있다. 사실적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해지는 현실 묘사와 그걸 버티게 하는 주인공의 자조적인 위트. 고도의 조롱. 불합리한 현실에 ‘개사이다’로 응징하는 인물, 혹은 피와 무기가 난무하는 액션.


오드리 로드는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집을 해체하는 새로운 연장을 찾으려면 이것저것 써봐야겠지.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그런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고 그런 의미에서 물고 씹고 뜯는 더 다양한 이야기를 기다린다. 자매애와 연대를 여러 각도에서 시험하고 사이다썰, 크고 작은 복수, 때로는 환각이나 빙의라는 연장을 써서라도 집을 두드리는 시도를 응원한다. 그러는 동시에, 언젠가는 그런 게 필요 없어지는 세상도 열심히 상상해보는 것이다. 성희와 해중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두 여자, 해방이라는 과제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을 시작점에 데려다 놓았다는 점에서 내게 특별한 잔상을 남겼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티나무 2023-02-19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절판이군요. 늘 제목만 보고 지나치곤 했는데 유수님 글 보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유수 2023-02-19 21:28   좋아요 0 | URL
난티님이 안 읽어보신 책이라니! 이 책이 담는 동시대성이 좋았어요. 그런 시대가 싫고요 ㅜㅜ

단발머리 2023-02-20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동시대를 읽는 게 항상 어렵더라구요. 그니까 확 밀고들어오는 느낌을 감당하기가 어렵구요. 제가 좀 갈등을 회피하는 스타일이라서 그런 거 같기도 해요.

유수님이 말씀해주신 여성서사의 그런 무해함과 평온함, 너무 좋네요. 그런 글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고요, 그럴러면 독자들이 더 많이 읽어줘야 하는데.... 나부터 실천하자... 오늘의 결론입니다.

유수 2023-02-20 16:49   좋아요 0 | URL
앗! 맞아요. 저도 비슷해요. 리얼리즘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리얼리티가 아니었을 때의 얘기였구나, 최근에 깨달았어요. 단발머리님 말씀대로 독자들의 책무기도 한 거 같아요. 동시대 문학을 소비하는 것.. 주저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ㅎㅎ 저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유수 2023-02-20 16:51   좋아요 0 | URL
그리고 다른 단편은 평온하지 않은 부분도 많이 등장합니다. 아주 짜증나는 사람들과 상황들….%^&*&#^$%ㅋㅋㅋ
 

소재도 흥미로운데 글도 유려하고..

번역가 이름 보고 흠칫 놀랐지만 다른 사람인 듯.

요즘 부쩍 느끼는 건데 논픽션의 재미를 평생 모르고 살았구나.














“산 정상에 오르는 일은 확고 부동하고 항구 불변하고 실질적인 일이었다. 등산하는 과정에서 으레 따르게 마련인 여러 가지 위험들은 그 일에 내 삶의 다른 측면들에서는 크게 상실되어 가고 있는 목적의 중요함을 더해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진부한 삶의 평면을 뒤집어엎는 데서 오는 새로운 관점 속에서 쾌감을 느꼈다.”43

그리고 등산은 일종의 소속감 같은 것도 안겨줬다. 산악인이 된다는 건 세상의 관심권 밖에 있고 또 세상의 타락상에 크게 물들지 않은, 과묵하고 아주 이상주의적인 집단에 들어간다는 걸 뜻했다. - P43

요컨대 행복이라는 한 마디 말로 귀결될 수 있는 사소한 만족감들로 인해 등산에 대한 갈증은 많이 무디어졌다. (…) 하지만 나는 소년 시절의 꿈들은 여간해서는 죽지 않으며 그럴 때 사리 분별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1996년 2뤌 말, 브라이언트는 내게 전화를 해서 곧 출발할 예정인 로브 홀의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다고 했다. 그가 내게 정말로 이 일을 해내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그렇다"고 대답했다. - P51

그러다 마침내 에베레스트의 뚜렷한 윤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피라미드 형의 정상부는 주위의 다른 봉우리들 위로 아주 선명한 윤곽을 그리면서 시커멓게 떠올라 있었다. 제트 기류 속으로 돌출한 그 산은 눈에 보일 정도로 깊게 갈라진 상처를 드러냈으며 그 상처자국에서는 시속 120노트의 강풍을 받아 반짝이는 얼음조각들이 비단 스카프처럼 동쪽으로 길게 휘날리고 있었다. 허공에 가로걸린 그 하얀 얼음조각 구름을 지켜보는 가운데 문득 에베레스트 정상부가 일정한 기압을 유지하면서 하늘을 나는 그 제트기와 정확히 같은 높이로 떠올라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 P56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3-02-16 14: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너무 좋아합니다. 손에 꼽는 인생 책 중 하나예요. 논픽션 재미나죠ㅎㅎ 반갑네요!

유수 2023-02-16 17:30   좋아요 2 | URL
정말요? 초반만 읽었는데도 흥미로워요. 끝까지 그럴 거라는 말씀으로 들려서 저도 기분 좋습니다!!

은오 2023-02-17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수님은 그럼 문학 파시다가 비문학 읽으시는거예요? 유수님 요즘 거의 비문학 읽고계신 것 같던데... 저는 완전 반대예요!! ㅋㅋㅋㅋ아니다 그래도 아직은 비문학이 더 좋다! 저는 처음도 비문학이었구요

2023-02-17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17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수 2023-02-19 15:04   좋아요 1 | URL
저도 언어쪽 분들 좋아해요. 똑똑한 여자 안 좋아하기 힘들어요. 그치만 전공 운운하기엔 저는 먼먼옛날 얘기 ㅋㅋ 은오님 비문학 추천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