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x4의 세계 - 제29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대상 수상작(고학년) ㅣ 창비아동문고 341
조우리 지음, 노인경 그림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와 이건 찐인데. 큰 게 왔다." 라는 작품을 가끔씩 만난다. 감수성이 떨어져서인지 그 주기가 갈수록 길어진다. 나름대로 괜찮은 작품은 자주 접하지만 이렇게 감탄하는 일은 드물다. 오랜만에 가슴에 안는 작품을 만났다.
사실 이 책이 알라딘 메인에 떴을 때부터 사고 싶었다. 근데 슬픈 말이지만 난 지난 겨울 책정리를 일부 한 이후로 이제 책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 도서관만 이용하기로.... (이로써 난 진정한 독자의 자격을 상실했다. 어쩔 수 없지 뭐.ㅠ) 그러다보니 이제서야 이 책이 내 차지가 됐다. 읽으면서 약간은 후회가 되었다. 사서 읽어도 좋았을걸....;;;;
이 책의 세계는 크지 않다. 오히려 매우 작다. 기껏해야 4×4의 천장 패널만 하루종일 봐야하는 좁고 지루한 병실이다. 거기에 가로(본명 제갈호)가 입원해 있다. 이름이 가로인 것도 작가의 치밀한 계산이다. 왜냐고? 가로는 세로를 만나기 때문이다. (본명 오새롬) 세로 또한 그 병원의 장기 입원자로 보인다. 두 아이가 만나는 방식, 그게 내겐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것 같다. 아프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이 서로 얼굴도 모른 채 만나는 방식. 그게 재미있으면서도 눈물겹고 흥미로우면서도 애틋했다.
병원신세를 져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곳은 본인과 가족 모두에게 퇴원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게 만드는 곳이다. 평소 좋아하지 않았던 집이라도 애타게 그리워지게 만드는 곳. 나는 부모님 간병으로 잠깐씩 있어봤을 뿐인데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어린 장기 환자들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보호자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호야(가로)는 돈벌어야 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할아버지가 옆에 붙어있다. 옆 침대 누나는 엄마와 매일 싸우고, 간병인이 붙어있는 아이는 하루종일 목소리 한 번 들어보기 어렵다. 좁은 공간 안에서 저마다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삭막한 공간 안의 이야기가 이렇게 노란색의 색조로 펼쳐졌다는 것이 작가님의 역량이라 생각한다. 노인경 작가님의 그림도 한몫한다. 보도블록 틈에서도 민들레가 피어나듯이, 좁고 괴로운 공간에 갇힌 아이들도 이렇게 노란빛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노란색 포스트잇을 사용해서.
그 매개가 책이었다는 점. 그중에서도 특히 <클로디아의 비밀>이었다는 점이 너무 반갑고 좋았다. 명작은 이렇게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20여년 전, 내가 동화를 다시 읽기 시작하던 때 기름을 부어줬던 바로 그 책! 어린이병동 복도 구석에 간이도서관이 생겼다. 애용하던 호야가 그 책에 꽂혀 여러 번 가져다 읽다가 어느날 구석에 그려진 누군가의 흔적, 작은 강아지 그림을 발견한다. 그 표시에 한참 머물렀던 호야는 그 옆에 자신의 표시를 남긴다. 가로세로 세 줄, 열 여섯칸이 되는 그림. 강아지 그림의 아이도 그걸 봤다. 그리고 단번에 알아챘다. 그때부터 두 아이는 <클로디아의 비밀>에 포스트잇을 붙여 도서관에 꽂아두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손가락질 몇번이면 지구상 어디든 톡이 가는 세상에, 같은 병동에 입원해 있으면서 이 아날로그적 소통이라니!! 하지만 이 소통은 너무 귀엽고, 예쁘면서도 신선하고 설렜다. 지루한 시간을 기대로 채워주는 마법. 그게 어떤 면에서는 생존전략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웠다. 나도 힘들었던 시기를 돌아보면 지금 같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몰입하곤 했었다. 그게 본능이라 해도 그렇게만 치부할 수 있을까? 더구나 자칫 절망만 남을 뻔한 이 어린이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의미와 기쁨을 찾는 이런 과정에서.
둘의 대면도 이루어진다. 병원 정원에서. 하지만 위기도 온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둘 다 아픈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가로는 근육병으로 걸을 가망이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고, 세로는 아마도 암병동에 있는 것 같다. 세로가 많이 아파 편지를 쓸 수 없을 때, 대필해준 세로 엄마의 편지에 가슴이 뭉클했다.
가로의 병이 낫진 않았지만(낫는 병이 아니니ㅠ) 생활적응을 위해 일단 집으로 오면서 둘은 기약없이 헤어지게 된다. 하지만 뚱뚱해진 <클로디아의 비밀> 책에서 떼어낸 포스트잇이 방의 벽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면서 모든 것을 넘어설 것 같은 그들의 우정을 다시 느낀다. 이런 우정 요즘 학교에서 쉽게 볼 수 없었다. 어린이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우정에 대해 무엇을 느낄까.
그들의 노란 포스트잇은 편지이기도 했고 제목인 4×4의 빙고판이기도 했다. 빙고판에 쓰여진 그들의 취향, 그리고 소망, 그리고 마음..... 내가 이 책을 꼽은 첫번째 이유다. 나는 어린이책을 읽고 나서 독후자료를 만드는 취미가 조금 있는데, 이 책은 그럴 생각이 바로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독자들 옆에 앉아 그들 마음의 파문을 지켜보는 걸로 충분할 것 같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