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람들의 삶을 읽어보면 이렇게 별일없이 살아가는 내 인생이 좀 부끄럽기도 하고 솔직히 다행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독립운동만 해도 그렇다. 나는 그냥 적당히 안 죽을 쪽에 붙어서 살지 않았을까? 그 위험하고 자칫 처참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는 길을 갔을까? 생각할수록 고난의 길을 간 사람들이 대단하다. 그중에는 가진 것이 많아 편히 살 수 있었는데도 모든 것을 버리고 결국 고통스럽게 죽은 사람들이 있지 않나.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까페에 와서 음료를 마시며 한가롭게 책을 읽다가, 이 안락함을 버릴 수 있나 생각해보니 사소한 것 하나도 내놓으라면 버럭할 것 같은 내 마음을 발견한다. 광복절(올해가 80주년이네)에 맞추어 나왔나 짐작되는 이 역사동화는 1907년 헤이그 특사단의 활동을 다루고 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을 기본적 역사인물로 놓고 알렉세이라는 소년과 그의 어머니 소피아를 상상의 인물로 추가했다.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톡에 사는 카레이스키다. 서양의 외모가 섞여있고 러시아어와 조선말을 다 할 수 있는 그들은 특사단을 돕는 조력자로 등장하기에 딱 적당하다. '난 조선인도 러시아인도 아니야.' 라고 생각하며 조선이 당하는 고난에 큰 관심을 갖지 않던 알렉세이가 역사적 인물 여러 명을 만나며 거사에 동참하게 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일단 특사단 중에 알렉세이가 살던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인물은 이상설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최재형(페치카 최)이라는 인물도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실존인물이라는데 나는 잘 몰랐다가 이번에 알았다.헤이그에서 특사단 활동을 하며 만난 인물로는 미국인 헐버트가 있다.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라고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이 특사 활동에 함께 했는지는 몰랐다. 더구나 그가 한글 띄어쓰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니?! 왜 난 띄어쓰기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 못했을까? 왠지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도 들고....^^;;;; 하여간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검색해보니 그는 독립신문의 영문판 편집자로 함께했고 그래서 독립신문에 띄어쓰기를 적극 권고했다고 한다. 몰랐던 게 왤케 많지. 이 띄어쓰기 얘기는 이 책의 서사에 중요한 건 아니고 대화중에 지나가듯 한번 나온다.이준 특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대륙횡단 기차 안에서, 이위종 특사는 거기 도착해서 만난다. 이준 님은 헤이그 활동 중에 사망하셨는데, 이 책에선 건강이 안좋아 힘들어하는 모습만 나오고 사망은 다루지 않는다. 근데 문득 생각나는 어릴적 기억이 있다. 우리집에 위인전 한 질이 있었다. 읽을 것에 굶주렸지만 책이 별로 없었던 어린시절에 나는 재미도 없는 그 위인전을 열심히 읽었다. 거기 이준 전기도 있었다. 그런데 거기선 그의 최후를 외국 사절들 앞에서 격분하며 할복하는 것으로 나온다. 말도 안된다고? 너무 선명한 기억이라 확실하다. 그때는 위인전들에도 그렇게 뻥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아예 없진 않지만....가장 관심이 가는 인물은 이위종이다. 특사단 중 가장 어리지만 가장 유용한 활약을 했던 인물이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불어를 비롯한 외국어 능력을 고루 갖추고 일본의 방해 공작에도 말할 기회를 만들어내고 유창한 언어로 외국 기자들 앞에서 당당히 말하는 모습이라니! 드라마 몇 편 나오고도 남았을 인물 같은데 별로 주목받지 못한 점이 좀 의외다. 검색해본 내용 중에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이 근대 세계를 질주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너무 궁금해져서 이것저것 찾아보니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두 권쯤 있었다. 그런데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진 부분이 많다고 한다. 어쩐 일인지 그의 후반부 생애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망 일시나 원인, 장소도 잘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더 궁금해져서 그 소설을 읽어볼까 생각중이다.앞날이 어찌될지 전혀 예측 못하고 떠나온 여정. 알렉세이에게는 미국으로 가는 기회가 열리고, 특사단은 회의장으로, 엄마는 다시 고향으로 갈라지며 열린 결말로 끝맺는다. 사실 그 역사의 결말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역동적인 각각의 삶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동화의 역할은 박제된 역사를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은 그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