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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의 정체 ㅣ 창비아동문고 343
전수경 지음, 김규아 그림 / 창비 / 2025년 5월
평점 :
『우주로 가는 계단』을 읽은 이후로 작가님의 동화를 거의 다 읽었다. 단편집은 처음 내신 것 같다. SF적 요소가 들어가 있던 대부분의 장편들과 아주 느낌이 다른, 아이들의 현실 생활과 작은 이야기들이 담겼다. 150쪽 정도의 두께에 여덟 편이나 담겼으니 각 편의 길이도 아주 짧다. 하지만 읽어보면 왠지 그다지 짧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앞에서 ‘작은 이야기’ 라고 했는데 그건 남의 입장에서 ‘작은’ 이야기지 당사자 입장에서는 우주보다 큰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 여덟 편이 담긴 단편집이다.
첫 번째 이야기 「무회전 킥」에서는 축구를 잘하는 세호와, 세호에게 무회전킥을 배우려 하는 수미와 유진이가 나온다. 수미는 어쩌다 성공하지만 배우는 데 별 관심이 없고, 유진이는 잘 안되지만 해내려는 집념이 끈질기다. 그 집념이 친구들을 불편하게 할까 봐 바로 마음을 접는 유진이와 어이없어 하면서도 더 해볼 수 있도록 함께 해주는 두 친구의 모습이 무심한 듯 펼쳐지는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 「허수의 정체」가 표제작이다. 허수가 뭐지? 수학 용어인가? 했는데 사람 이름이었다. 전학생. 여긴 세 개 회사의 공장이 모인 신도시여서 아이들의 출신이 뻔했기에 어느 아파트 사냐? 부모님 어느 회사 다니냐?가 당연한 질문처럼 되어버렸는데 허수는 그것을 몹시 불편해 했다. ‘허수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아이들에게 말로 한 방 먹인 허수는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는 듯하더니 돌연 다시 전학 가 버렸다. 아이들은 술렁였고 약간 배신감도 느낀 것 같았지만 총명하게도 자신들의 문제가 뭐였는지 깨달은 것 같다. 다른 전학생이 왔을 때 다른 질문을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솔직히 처음의 질문도 아이들의 문제라곤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변한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이 책의 아이들, 참 착하다니까.
「하나, 둘, 셋」에는 드디어 고백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연애가 시작되기 전, 고백까지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근데 이게 살짝 반전이면서 웃기네. 어릴 때부터 친했던 윤채와 성우가 서로의 연애를 돕기 위해 다리를 놔주는 과정인데, 별 관심이 없는 윤채에게 성우가 이런 말을 한다.
“연애는 말이야, 습관이고 버릇이야. 한 번 해야 또 할 수 있다고.”
풋, 하고 웃어버렸다. 늙어가는 내가 초딩한테 한 수 배우는겨? 하긴 빈익빈부익부라는 생각은 해본 적 있어. 모태솔로는 그대로 늙어가고, 잘하는 애들은 아주 공백기가 거의 없더라고. 하지만 결정적인 건 그에 비례하지 않더라.ㅎㅎ
「현악 사중주」에는 엄마끼리 친해 유치원 때부터 몇 년간 붙어다니다가 고학년이 되어 멀어진 나래와 현아가 나온다. 둘의 엄마는 관계 개선을 위해 작당을 하고 음악회 표를 끊었다. 하지만 넷이 탄 차 안에서는 답답한 긴장감만 가득하다. (고학년 씩이나 되었는데 엄마들이 그런 헛짓을 왜 해....) 중간에 내린 화장실 안에서 나래는 또 답답하고 영혼 없는 “미안해.” 소리를 하고 폭발한 나래는 참았던 말을 쏟아내 버린다. 그걸 나래 엄마가 듣고 화를 참지 못하는데, 속상한 건 이해하지만 이때 나래 엄마의 처신이 아주 중요하다. 엄마의 처신은 무조건 혼내는 것도, 무조건 공감하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보니 나래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친구가 옆에 아무도 없게 생겼다. 고립을 자초하는 애들이 분명 있긴 있다니까. 그럴 때 부모는 속상한 마음을 참고 차분히 조언해 주어야 한다. 부모가 그걸 못하면 답이 없다. 친구 탓 선생님 탓 이런 식으로 남 탓만 하다가는 자식 영원히 바보 만드는 것이다. 내가 당하는 것보다 자식이 당하는 게 백 배 더 눈뒤집히는 심정, 부모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떡해. 자식의 인간관계 내가 대신 해줄 것도 아닌걸.
「할아버지와 바다」 이 작품은 어린이들이 어떻게 읽을지 모르겠고, 내 또래 이상이 읽는다면 마음이 너무 무거울 작품이다. 노년의 문제를 동화 속에 이토록 정신이 번쩍 들도록 담다니.ㅠㅠ 해수의 할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몸도 말도 기억도 온전치 못한 상태로 요양원에 입원하셨다. 아프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못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신체가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너무 오래 살아야 하는 삶이 두렵다. 할아버지가 울고 계신 장면을, 해수가 놓고간 휴대폰을 다시 가지러 왔다가 보게 되었는데 내 심장이 다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갈수록 외롭고 고통스러운 노년기를 오래 보낼 가능성이 커진다. 이것에 대한 방책이란 없는 것일까. 해수는 동생 지수보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훨씬 많다. 그런데도 애교있게 달려드는 지수에 비해 할아버지 곁에 가길 꺼린다. 안타까운 엄마가 할아버지께 좀더 친절하면 좋겠다고 부탁하자 해수가 이렇게 말한다.
“나라면 변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을 것 같아. 나는 할아버지를 보는 게..... 미안해.”
이 말에 엄마는 오열하고, 나도 무슨 말인지 너무나 알겠어서 마음이 쓰리다. 부디 조금이라도 더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노년이 되길.
「체험학습」에 나오는 주호는 조금 어려움을 가진 아이인 것 같다. 특히 타인과의 협의와 타협, 그리고 감정 조절에. 이런 아이들의 주변 사람들은 매우 피곤하고 힘들다. 주호는 오늘도 엄마가 김밥까지 다 싸놓았는데 아침에 갑자기 체험학습을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는지 아빠와 동생은 조용히 집을 나섰고 엄마도 말없이 컴퓨터를 켜고 자기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엄마의 속이 어떨지.... 안쓰럽다. 하지만 엄마는 일을 접고 주호를 데리고 둘만의 체험학습을 떠났다. 거기서도 주호의 돌발행동을 볼 수 있는데, 엄마는 끝까지 화내지 않고 조용조용 설득한다. 나름 좋은 하루였다. 엄마가 많이 힘들겠다. 이러면서 주호는 조금씩 나아지겠지? 다음 체험학습은 주호가 꼭 참여하길 바란다.
「월간낚시」 나는 이 작품이 특히 맘에 들었다. 범준이는 한달에 한번 아빠를 만나러 정선에 온다. 부모님이 갈라선 것 같지만 정확하게 꼭 집어 나오진 않는다. 아빠를 만나면 낚시를 하러 간다. 낚시꾼들은 서로를 ‘조사님’이라고 부른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우리집 남편은 내가 노는 취미가 하나도 없는 걸 걱정한다. 퇴직하면 어떻게 지낼거냐며.... 그러는 남편은 나보다도 더 일만 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남편에게 어느날 딸이 배낚시를 가자고 제안하자 두말도 않고 따라나섰다. 원래 낚시를 좋아했다나? 둘이 신나게 놀고 온 다음날부터 쿠팡에서 아주 부피가 큰 택배가 오기 시작했는데 뭔진 모르지만 낚시 관련이래. 어이구 두야.... 나는 진짜 딸도 남편도 이해가 안 갔는데 이 동화를 보니 조금 이해가 갈까말까 하네.... 낚시도 꽤 매력이 있긴 한거 같아.... (그래도 난 안할거지만) 여기에 아주 멋진 말이 있었다.
“낚시는 보내는 거야. 잡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보내주기 위해선 낚시바늘을 제대로 빼주고 보내야 한다. 잘못 보냈다가는 평생 낚시바늘 끼운 채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보내는 일도 정성껏 해야 하는 것이다. 이걸 깨달은 범준이. 점점 어른이 되어 가겠네.
마지막 여덟 번째 이야기 「우리 반 아침」에는 지금까지 나온 아이들이 총집합해서 나온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이 학급 아이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 교실 구석구석을 카메라가 쭉 훑고 지나간다. 어느 장면에는 조금 더 머무르고 어느 장면은 금방 지나가지만 어느 곳 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비춘다. 마지막엔 지하철 출근길에 내릴 곳을 놓쳐서 지각하신 담임 선생님이 등장하는데, 나 이 선생님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 날 뻔했잖아. 무려 이 교실은 6학년. 그런데 선생님이 안 계셔도 교실은 평화롭고 구석구석 저마다의 모습으로 할 일을 하거나 사이좋게 놀고 있다. 이 책의 화자가 사람이 아니어서 마지막에 깜짝 놀랐다. 깜비나무 화분이었다. 이 화분에 꽃이 핀 것을 다정하게 반기며 차분히 수업을 시작하는 학급 아이들.... 이런 천상의 평화가 있나. 보통 우리는 전쟁터라고 부르는데...^^;;;; 음 하지만 매 순간이 전쟁터는 아니니까, 이런 모습을 로망으로 삼고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지 뭐.
작가의 말 중에 “교실에서는 주연과 조연, 엑스트라가 따로 없어요. 하나라도 빠지면 우리 반이 아니죠.” 라는 말씀에 매우 공감한다. 감기가 돌거나 유난히 가족체험학습을 많이 쓰는 시즌에는 일주일 내내 전원 출석이 하루도 없는 때가 있다. 그러다 전원 출석하는 날에는 비타민사탕 한 개씩이라도 주면서 자축(?)을 한다. 그렇게 너희들 모두가 중요하다는 모종의 액션을 취하고 싶다. 그게 진심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동화를 읽을 자격이 아직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