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주의보 - 제8회 윤석중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금이 고학년동화
이금이 지음, 양양 그림 / 밤티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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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이 작가님의 단편집이 도서실 신간코너에 꽂혀있길래 집어왔다. 역시 재미있고 잘 읽히네 생각하면서 읽다보니 전에 읽어봤던 이야기다. 어디서 읽었더라 생각하면서 읽다가 마지막 작품에서야 책 제목이 생각났다. 사료를 드립니다! 10년도 더 전에 읽었던 책이다. 그때 참 좋아서 추천 목록에도 넣었던 기억이 난다.

개정판인 이 책은 시대에 어색하지 않게 세부 내용들을 다듬었다고 하는데 오래 전에 읽은 거라 달라진 부분이 딱 보이진 않는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다듬었다는 뜻이겠다) 그리고 표제작이 달라졌다. 초판에선 [사료를 드립니다]였고 이번 책에선 [건조주의보]이다. 이번 표제작이 책 제목으로는 더 나은 것 같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좋은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사료를 드립니다]!

처음 읽었을 때도 참 좋았지만 적어놓지 않았으니 이번 기회에 적어보려고 한다. 첫작품 [건조주의보]는 가족 안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건우가 ‘건조증’이라는 공통점을 찾고서 기뻐하는 이야기다. 공부를 아주 잘해서 부모님의 기대와 시중을 한몸에 받는 고등학생 누나는 안구건조증, 엄마는 구강건조증, 아빠는 피부건조증. 건우는 어떤 건조증을 발견했을까? 건우가 느끼는 소외감은 심각한 것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따라서 이야기도 귀여운 느낌으로 읽었다. 하지만 귀여운 수준이 심각한 수준으로 바뀌는 것도 한순간이니. 같은 상황에 있는 아이들에게 큰 공감을 줄 만한 이야기다.

[닮은꼴 모녀]의 민지네 엄마는 학습지 선생님이다. 교실에서 글쓰기 발표를 하던 날 알게 된 충격적 사실. 몰래 좋아하던 영민이가 엄마의 방문 학생이고, 영민이는 그 선생님(민지 엄마)를 매우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사실. 그런데 영민이가 보는 선생님과 민지가 보는 엄마는 과연 동인일이 맞나?ㅎㅎ 남의 자식 앞에서 멋진 척하기는 쉽다. 이상적인 말을 하기도 쉽다. 하지만 내 자식 앞에서는 본능과 욕심이 앞서는 법....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이 작품을 읽어보면 그중 한쪽만 그사람의 모습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요술 주머니]는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봤을 행운을 그렸다. 누군가를 도와주었는데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요술이 들어간 보답을 받는.... 이 작품에선 그게 요술 주머니. 화수분처럼 그 안에 넣은 것을 불려주는 주머니였다. 그런데 효과는 단 한 번. 지유는 그걸 모르고 섣불리 넣은 것을 후회하지만.....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세 가지 소원’ 이야기와도 공통점이 있다. 행운과 행복의 관계는? 이렇게 우리는 우리 안의 요술주머니 판타지를 정돈해본다.

[이상한 숙제] 이 작품은 전에 읽은 것보다 더 강하게 느낌이 왔다. 아마도 그동안에 내 경험과 생각이 조금 더 쌓인 것이겠지. 해빈이네 선생님은 ‘아름다운 사람’을 찾으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이리저리 찾아도 어려웠던 그 숙제는 어느날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사람을 만나면서 해결되었다. 장애인을 돕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일 수도 있고 장애인이 아름다운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동안 전자에 더 초점을 맞춰온 것은 아닐까. 장애인의 마음은 서툴고 일반상식과 다른 행동 때문에 묻히기가 쉽고. 그런 점을 해빈이의 눈으로 보여준 이 작품이 왠지 고맙게 느껴진다.

마지막 [사료를 드립니다] 이 작품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난다. 장우네는 유학을 떠나며 장군이를 보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더구나 장군이는 대형견(시베리안 허스키)이었다. 임시보호자를 구하는 광고에 두 아이의 아빠라는 사람이 지원을 했고, 여러 가지 주의사항과 신신당부와 함께 장군이를 보냈다. 사료도 택배로 보내주기로 했고, 아저씨는 언제든 보러 와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급한 사정 때문에 돌아온 장군이가 찾아간 곳에 장군이는 보이지 않았고 열악한 상황만 펼쳐져 있었다. 특히 꼬박꼬박 보내준 사료를 동네 수퍼에서 다른 생필품으로 바꿨다는 대목은 모든 견주들이 부르르 할 만하다. 우리 딸만 해도 개 먹이는 거 엄청 따지거든.... 하지만 장우는 또다른 사실을 발견하고, 눈물을 삼키며 돌아선다. 이 대목이 슬프면서도 대견하고 뭔가 희망차기도 하고 그랬다. 그래서 난 이 작품이 가장 좋았나보다.
『장군이가 아이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도 장우네 있을 때보다 여위고 털이 거칠어진 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썰매를 끌며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던 자기 조상들처럼 늠름해 보였다. 아이들을 지키는 든든한 호위무사 같기도 했다.』
반려견을 다룬 작품들이 무수히 많지만 단연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10여년 만에 다시 읽은 책이지만 새롭게 좋았다. 이제보니 새롭게 나온 역사소설이 있네.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를 잇는 작품인 것 같다. 동화와 소설을 넘나드는 이금이 작가님의 필력을 믿고 그 책도 읽으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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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마그다 가르굴라코바 지음, 야쿠브 바초릭 그림, 윤신영 옮김 / 북멘토(도서출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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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게시판에 올라온 책들 중에 요즘 핫한 동화책도 있어서 평소 같으면 그걸 덥썩 골랐을 텐데 왠지 이 책이 궁금했다. 다리? 평소에 관심있는 주제가 아닌데.... 1학기 끝무렵에 세계의 자랑거리(랜드마크)라는 주제로 수업을 해서인가.... 어쨌든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있을 것 같아서 신청했다. 큰 판형에 각장마다 흥미로운 내용이 구석구석 담겨있다. 건축 쪽에 흥미있는 아이들이라면 여러 번 반복해서 볼 것 같다. 나처럼 평소 관심사가 아니었어도 눈길을 끌 만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다리. 좁은 주제의 책이겠다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다리는 아주 넓은 주제다. 다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도 볼 수 있고 건축의 핵심 분야이고, 문화 예술과도 관련이 있다. 문명을 앞당긴 인류의 중요한 발명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리가 없다면’ 이라는 상상을 잠시만 해봐도 바로 알 것이다. 인류에게 다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다리가 인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 단어가 상징과 비유로 얼마나 많이 사용되는지를 봐도 알 수 있다. 다리는 연결, 소통 등을 상징하고 다리가 되다, 다리를 놓다 등의 비유로도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나 배경이 되기도 한다. 다리를 가지고 할 이야기는 정말 많구나 새롭게 깨달았다. 이 책은 그것들 모두를 자세하게까지는 다루지 못했어도 모두 포괄해서 넣기는 했다. 어린이들 수준에서는 가히 ‘다리 백과’라고 해도 될 만하다.

이 책을 읽으며 다리의 발전 과정을 보기도 했고, 세계의 멋지고 신기한 다리들을 보며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리의 종류가 참 많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 가장 긴 다리나 가장 높은 다리 등을 보면 아찔하면서도 인간의 기술에 감탄하게 된다. 생각해보니 집에만 있는 생활이 아니라면 다리를 건너지 않는 하루는 드물 것 같다. 차를 타고 조금 멀리 가면서 지나가는 다리를 다 세어 본다면 어느 정도 가다가 포기할 것 같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 다리는 많고, 그만큼 필수적인 것이다. 이 책을 보고 여행을 한다면 다리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겠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줄곧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머리속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젊은 날의 가장 충격적인 사고 중 하나였기 때문일까. 다리의 종류를 보면 성수대교는 무슨 종류의 다리였을까, 다리의 구성요소를 보면 성수대교는 이 중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런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읽다보니 후반부에 [실수가 알려준 귀중한 교훈]이라는 챕터도 있었는데, 설계 결함, 과적, 유지보수 소홀 등 다양한 이유로 무너진 다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여기에 성수대교가 소개되었다면 더 속상했을 것 같은데 다행히(?) 나오진 않음...ㅠ 인간의 건축물이 영구적일 수는 없는 바, 이 엄청난 대자연 속에 다리를 건설한 것도 대단하고 그걸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도 엄청 대단한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멋지게 소개한 대로 인류의 역사 속에 다리는 계속 발전해 왔다. 앞으로도 다리가 아름답고 안전하게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 주면 좋겠다.

새로운 지식에 호기심을 갖는 어린이들에게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주 멋진 책이다. 도서관에도 한권씩 꼭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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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그린이에게
유순희 지음, 오승민 그림 / 반달서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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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희 작가님의 책을 좋아하는데, 오늘 도서관에서 비교적 신간(작년에 나옴)을 발견했다. 표지가(책등이) 어둡고 책이 얇아서 눈에 안띌 뻔했다. 펼쳐보니 <우주호텔>과 비슷한 판형과 두께이고, 그림도 같은 작가님(유승민)이 그리셔서 상당히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또야?라는 느낌이 아니고 '아 나 이거 그리웠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내용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느낌과 비슷한 느낌이 동시에 들어있다.

샛별빌라 3층에 엄마와 그린이 단둘이 이사왔다. 1층 세차장 소음 때문에 월세가 싸서 들어온 거라 하니 그럴 사정이 있을거다. 돈도 없고 딱히 능력도 없고 주변에 든든한 사람도 없는 연약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따뜻하고 아름답게 쓰시는 작가님이 바라는 세상을 나도 같이 바란다.

그날따라 늦는 엄마를 기다리다 그린이는 혼자 울고 있는 엄마를 발견한다. 엄마는 오늘 처음 나간 식당 청소 일에서 잘렸다. 게으르거나 꾀를 부리는 사람도 아닌데 엄마는 늘 이런 식이다. 딸을 지켜야 하는 사람인데 작고 허약하다. 하지만 작가님은 이 상황을 절망으로 끌고가지 않았다.

엄마는 막막하다고 했다. 그게 뭐냐고 묻는 그린이애게 '아주 크다는 거'라고 대답했다.
"어떤 게 엄마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너무너무 커서 넘어갈 자신이 없어."
하지만 그린이는 숲에게 "네가 숲보다 크지." 라는 말을 듣는다. 그린이의 가까이에 숲이 있는 건 너무나 다행이다. 그린이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숲이 있었기에 다시 채워지고 회복되었다. 그린이 또한 조용하고 작은 아이다. 하지만 엄마를 세울 수 있었다. 두 존재는 서로 기댄다. 그래도 된다. (한쪽만 너무 오래 그러는 건 좋지 않지만)

엄마를 가로막은 '큰 것'이 그린이라고 없었을까. 유독 그린이를 괴롭히는 아름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하지만 '크기'는 어느새 달라보이기도 한다. 엄마도 그럴 수 있을 거다.

새로운 희망은 숲을 그린 그린이의 그림에서 솟아나온다. 겁보 청설모를 그린 처음 그림부터, 교실 어항의 사라진 물고기들이 솟구치는 그림, 그리고....

엄마는 결국 취업에 성공했다. 그 직업을 보는 순간 이게 실제도 아니고 내 일도 아닌데도 와락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구청 소속의 거리 정원사. 출퇴근길에 잘 조성된 공영 화단을을 보면 누가 이렇게 잘 가꾸시는 걸까 생각하곤 했는데, 그린이 엄마가 그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다. 작은 이들이 힘을 내는 이야기가 내 마음을 채워주는 건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빛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은 극히 소수다. 빛나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 것 뿐이다. 세상에 작은 이들이(나포함) 자책하지 말고 막막한 길을 한걸음씩 잘 걸어갔으면 한다.

숲과 아이, 그리고 그림
세 개의 키워드가 엮어낸 이야기다. 제목을 다시 읽어본다. 여러가지 의미가 담겼다.
숲을 그린이에게.

이 책 또한 그림이 큰 역할을 한다. 유승민 작가님의 그림은 삽화 이상이다. 다른 그림으로는 대체할 수 없을 것 같은 큰 역할이다. 짧지만 큰 이야기와 거칠고도 따뜻한 그림이 결합, 우주호텔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밝음과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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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여름방학 보름달문고 97
이퐁 지음, 오삼이 그림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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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누구나 환상적인 생각의 조각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르겠다. 우리 때는 그랬던 것 같다. 문제는 그것이 있다가 스스르 녹아 없어졌느냐, 용케 남아서 조각들이 튼튼하게 연결되어 구성되었느냐의 차이 아닐까. 작가님들은 후자이겠다. 나는 당연히 전자고. 그래서 나같은 독자들은 이런 책을 읽으면 아련한 추억같은... (마치 전생의 기억 같기도 한) 느낌을 갖게된다. 생각이 날듯말듯한 오래된 꿈 같기도 한.

다섯 편의 단편 중 두 번째 [왼쪽 세상에 가본 적 있어]가 특히 그랬다. 이 이야기는 ‘크라메싫어’ 라는 닉네임의 작성자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이야기와 그 댓글들로 구성된다. 게시판 분류를 보니 [살다보면>이것좀봐줘]로 되어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이것좀봐줘’ 라는 게시판의 익명 독자들에게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왼쪽 세상과 오른쪽 세상 모두를 볼 수 있었다. 남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금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게 부모님을 매우 걱정시켰다는 것도. 아이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고(그곳이 왼쪽 세상에는 크라메라는 식인물고기가 우글우글한 강이었다) 그래서 유치원도 다니지 못하며 혼자 컸지만, 왼쪽 세상 덕에 혼자가 아니었다. 특히 거기서 만난 특별한 친구 덕분에. 하지만 지금 아이는 왼쪽 세상을 보지 못한다고 썼다. 왼쪽 눈에 사시 같은 증상 때문에 부모님 걱정이 컸는데, 그걸 교정하는 안경을 쓰자 왼쪽 세상도 사라졌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련하다. 그래서 더욱 여운이 남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다일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첫 번째 작품 [인터스텔라 여름방학]이 표제작이다. 우주여행을 하는 진짜 SF이면서 예상 외의 황당한 줄거리인 점이 마음에 든다. 명왕성 여행이 가능해진 미래인데, 자식을 최고 클라스로 만들려고 최고급 과외를 시키는 것은 여전하다고? 그것도 명왕성 행 우주선에서? 하지만 엄마는 속았다. 그 우주선은 명왕성으로 향하지 않았고, 루하에겐 지구를 변호해야 할 책임이 난데없이 주어진다. 과연 루하는 그걸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세 번째 [돔돔세 견문록]은 내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화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부터. ‘쳇2153’이라는 이 지적존재는 고유의 신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대신 어떤 로봇에든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는 OP404라는, 오퍼튜니티의 후손 격인 구식 로봇의 몸에 들어가 임무수행을 하다가 어느 외딴돔에 도착하게 되는데... 여기 사는 로봇들의 이름에서 유머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빙고, 옥산나, 유남생, 옥토팔 등. (이들은 번호로 부르지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망각의 전자기폭풍이 휩쓸어 방대한 데이터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고, 넝마같이 남아있는 데이터로 이런저런 유추를 하며 살아가는 시대였던 것이다. 하긴 그렇네. 우린 왜 데이터는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나. 이런 시대에 결정적인 진실의 조각은 낡은 공책에 남겨진 손편지 한 장.... 이 미래의 미래는 행복할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을 보면 작가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따뜻하다고? 어쨌든 다정하니 좋다.

[그날, 사비가 물었어]는 잘 뜯어보면 정말 슬픈 이야긴데.... 세상 막다른 곳에 몰린 아이가 초공간 차원 이동 파견 여행자에게 발견되어 함께 떠나는 이야기다. 지구 기준으로 말한다면 참혹한 결말이지만 ‘초공간 차원 이동 수기 공모전’에 낼 이 글을 쓰고 있는 아이는 전혀 불행하지 않다. 그 수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다만 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어휴. 그래,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근데 그래도 되나.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내가 뭘 알겠어. 다만 이렇게 막다른 곳에 몰리는 아이들을 지구인들도 발견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로맨스로 마무리? 제목은 [한여름의 랑데부]다. 여름이와 산이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다. 근데 뭐, 이런 말이 있잖아. 사랑이 별거냐.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여기서는 그게 몽에뚜와르들의 동족 상봉을 위한 작용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난 그렇게 해석해서 너무 웃겼는데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호르몬 어쩌구 하는 것보다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하고 문학적이냐. 그들의 랑데부를 그들은 개인사라고 생각했겠지만 몽에뚜와르들 입장에선 역사적 장면이었다니. 뭐 어떻게 생각하든 어떠랴. 인간의 눈에 안보이는 것은 얼마나 많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이야기들이 요즘 다 그게 그거 같다고 느끼는, 권태기(?)에 들어선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겠다. 색다른 느낌과 상상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익숙하고 편안한 게 좋을 때도 있지만 이렇게 색달라서 ‘??’와 ‘ㅋㅋ’의 느낌으로 보게 되는 작품들도 가끔 읽어주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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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는 모두 귀여워 작은 스푼
아시하라 가모 지음, 나카다 이쿠미 그림, 김윤수 옮김 / 스푼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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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소재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쓴 작품들을 보면서도 놀라지만 이렇게 사소한 일상을 가지고 쓴 작품들도 못지않게 놀랍다. 이런 걸 보면 ‘이런 일도 책이 돼? 그럼 나도 쓰겠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런 게 더 어려울 것 같다. 일상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순간을 특별하게 포착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으니까. 일상을 특별하게. 이게 진짜 대단한 능력인 것 같다.

처음 보는 일본 작가의 책이다. (국내에 이 책만 번역되어 있음) 초등학교 3학년 교실의 세 가지 사건을 엮어 한 권의 동화로 만들었다. 주인공은 아야라는 여학생이다. 수줍어하고 소극적인 면도 있지만 속으로는 잘해보고 싶어하는 의욕이 충만하기도 하다. 첫 번째 이야기, [평소와 다른 특별한 나]에서는 연극 발표회, 두 번째 [병아리가 되지는 못하지만]에서는 모둠별 춤 발표회를 한다. 아야가 잘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 망설일 때, 그 마음을 알아본 친구들이 추천하고 응원해주어 아야는 열심히 연습한다. 위에서 내가 사소한 일상이라고 했는데, 사실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야도, 아야네 반 아이들도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 않다. 평범하다기에는 너무 좋은 성품들을 갖고 있다. 일단 주어진 학급의 행사에 시큰둥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배역을 정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시기하거나 불만을 품지 않고 친구들을 격려하거나 축하해 준다.(이게 특별히 인상 깊었다. 교사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서) 그리고 맡은 일을 잘해내려고 스스로 찾아보며 기본 이상의 노력을 한다. 도서관에 가서 관련된 책을 찾아본다든가, 집에 가서 영상을 찾아본다든가 등등 시킨 일 이상으로 스스로의 정성을 더 들인다.

첫 이야기의 주요 소재는 율무열매인데, 아야는 실수로 그걸 귓구멍에 넣어버렸다. 걱정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특별한 일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표시로 생각한다.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귓구멍에 들어있는 율무열매 때문인가 생각하는 아야가 허당 같으면서 귀엽다. 아이들의 책임만은 아니겠지만 요즘은 해맑은 아이들보다 어둡거나 꼬였거나 예민하거나 거칠거나 퉁명스럽거나 부정적이거나 하는 아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이런 아이, 이런 교실이 오랜 추억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너무 완벽하면 아이들이 아닌 것, 세 번째 이야기 [어떤 딸기도 모두 귀여워]에서는 남학생 두 명과 아야가 빈 미술실 구멍난 천장 속에 기어들어가 한바탕 소동을 벌이기도 한다.ㅎㅎ 그리고 이 편에선 아야가 ‘딸기 경연 대회’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경연 대회가 뭔가 했더니 그냥 혼자서 딸기 한 팩을 놓고 어떤 딸기가 예쁜가 뽑는 일이었다.ㅎㅎ 나도 어렸을 때 딸기는 아니었지만 이런 비슷한 걸 혼자 하면서 놀기도 했었는데, 요즘 이러면서 노는 아이가 있으려나? 아야도 어릴 때 이후 아주 오랜만에 해보았다. 응? 그런데 어릴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챔피언을 뽑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딸기는 이래서 예쁘고, 저 딸기는 저래서 예쁘고. 결국 아야는 새로운 생각 하나를 갖게 되었다. 이럴 때 아야는 자기만의 공책을 꺼내서 적어놓는다.
딸기는 모두 모양이 달라.
그래서 모두 귀여워.
그래서 모두 맛있어.
-괴테
(괴테가 왜 나와? 이건 아야의 귀여운 무식과 허당력을 보여줌^^)

이렇게 사소한 일로 이런저런 궁리와 상상을 하고 그걸 글로든 뭐든 표현하는 게 내가 느끼는 이 아이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건 큰 장점이자 역량이기도 하지 않을까? 난 교실에서 이런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또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아야의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아야와 친구들을 마주치자 장난을 걸었다. 아야가 무반응이자 “에이, 아야는 상상력이 없구나.” 라고 하셨는데, 아야는 내심 이 말씀이 속상했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부모님이 웃으며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려 아이에게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듣고 오해를 풀며 선생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아야. 몬스터 부모는 일본이 원조이니 일본에도 “아이 마음에 상처를 주다니, 정서 학대 아닌가요?” 하면서 화를 내는 부모들이 있지 않을까? 고의적 잘못이나 치명적 실수가 아니라면 서로 이해할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말이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장면인데 나는 부러움을 느끼며 읽었다.

이 책은 빵으로 치면 그냥 식빵 뜯어먹는 맛이라고 할까. 누군가는 참 밋밋한 이야기네, 이게 재밌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오랜 기간 읽다보니 이제 나의 취향이 보여. 충격적 반전이나 스펙터클한 사건도 좋지만 평범하고도 살짝 별나고 기특한 이런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작은 이야기들이 좋아. 수없이 많은 작품 중에 이 작품을 출간하려고 번역하신 이유도 그래서일까? 덕분에 잔잔하고 평화로운 동화를 한 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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