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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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좋다길래 독서모임에서 읽을까 하고 여쭈었더니 다들 찬성하셔서 읽어봤다. 독서력이 좋으신 분들께는 심심풀이 책이 될지 몰라도 나한테는 꽤 걸리는 책일거 같아 개학 전에 읽으려고 서둘러 구입했다. 예상대로 속도가 쭉쭉 나는 책은 아니었다.(내게는) 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건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당연히 그런줄만 알고 있던 것들을 대부분 부정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호 그렇구나 끄덕끄덕' 하면서 동시에 한쪽 마음은 '그런데 이건 맞는 해석이야?' 라는 의심이 계속 드는 것은... 저자가 말한 본능 중에서 부정 본능인가?ㅠ 그래도 일단 오호 끄덕끄덕 쪽에 집중하자 마음먹고 읽어나갔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려고 이 책을 썼다. 팩트풀니스(사실충실성)라는 저자의 신조어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것을 가로막는 인간의 극적인 본능 10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1. 간극 본능
인간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를 추구하는 강력하고도 극적인 본능이 있는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세상을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누고 그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통계에 따르면 양 극단 사이에 중간층이 존재하며 우리의 고정관념보다 그 층은 실제로 훨씬 두텁다는 것이다.
세상을 두 집단으로 나누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는 4단계 구분법을 사용했다. 저자가 설정한 소득수준 4단계에 따르면 나는 4단계(가장 높은 층)에 해당되었다. 일일소득 32달러 이상을 4단계로 분류했는데 32달러면 4만원 정도일텐데 내 직종의 최고 호봉에 거의 다다른 나는 이보다 훨씬 많이 번다. 우리나라 최저임금도 8시간 일한다고 쳤을 때 1.5배가 넘는다. 그렇다면 극심한 사각지대에 처한 빈곤층 말고는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4단계라는 뜻 아닌가? 저자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4단계 삶을 살 게 거의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으며 "독자가 사는 나라에서 가난이라고 하면 '극도의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라고 말한다. 저자의 4단계 구분법에 따르면 1:3:2:1 정도로 중간층인 2,3단계가 많은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 구분과 기준값이 합당한가? 약간은 갸웃한다.

저자는 인류의 삶의 질이 하락보다는 향상되었으며 격차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극단적이지 않음을 말하는데 여기에 온마음으로 동의되지 않는 것은 역시 상대적 박탈감을 염두에 둔 탓이겠지? 지인이 어떤 책을 읽고 "옛날에 안 태어나고 지금 태어나서 너무 다행이다' 라고 말하던 게 생각났다. 지금의 세상이 지옥이라고 한다면 예전의 세상은 그보다 더한 지옥이었던 거지.... 인류는 진보해가고 있다. 그건 사실이다. 4단계 소득수준이 대다수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가용을 소유하는 것, 원하는 가전제품을 대부분 사용하는 것,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때로는 외식에 비싼 돈을 지불하는 것 등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 못한 형편을 끔찍하게 여길 뿐.... 그런데 과거를 조금만 기억해보면 어릴때 아버지 월급날이나 되어야 엄마는 고기를 사다가 맛있는 반찬을 해주었고, 끔찍하게 덥던 어느 해 여름 나는 만삭이었는데 에어컨을 살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누리고 있지만.... 그러니 우리가 체감하는 빈곤이란 저자의 말처럼 상대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적인 것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몸부림치다보니 우리의 삶이 피곤하고 만족이 없고 불행감에 젖어 사는 것이 아니겠나. 안써도 되는 사교육비에 생활비를 쏟아붓고 비정상적인 집값을 지불하면서도 대도시에만 모여 살고... 하지만 어떻게 과거보단 낫다는 이유로 현재에 감사하며 사는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좀더 여유있게 주변을 둘러보며 살고, 다양한 직업과 삶의 방식에 자족하며 살 수 있을까. 그것을 모르겠다. 이것이 문제로다.

2. 부정 본능
우리는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안의 부정본능(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주목하는 본능) 때문이다. 그 원인은 과거에 대한 호의적인 기억(과거는 아름다워~), 자극적이거나 선별적인 보도들(하긴 괜찮은 건 뉴스거리가 되지 않으니까), 이런 세상을 좋다고 말하면 감수성 없는 사람인거 같아서? 등이 있겠다. 솔직히 세번째가 젤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저자는 강하게 말한다. "나는 순진한 소리나 떠벌리는 낙천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아주 진지한 가능성 옹호론자'다." 라고. 즉 세상에 있는 문제를 외면하자고 말하는게 아니라는 것, 발전을 인정하는 것과 더 큰 발전을 위해 싸우는 것은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직선 본능
도표의 선이 직선으로 계속 뻗어나갈 것으로 직관하는 본능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현상은 도표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S자 곡선, 미끄럼틀 곡선, 낙타혹 곡선 등등... 그러므로 세상은 현재까지의 추세대로만 반드시 직진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장은 이해하긴 쉬웠다. 그리고 수학시간에 그래프를 가르칠 때 "이 그래프의 다음 값을 예상해보세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같은 문제들이 기억났는데 매우 조심스럽게 설명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저자의 이 주장은 저자의 전체 주장을 함정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세상은 어쨌든간 통계적으로 좋아지고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지금 이 시점 혹은 아주 가까운 미래가 그래프 상 급락이 시작되는 정점이라면 어쩔 것인가? 아이고, 난 아무래도 저자가 말하는 부정본능과 공포본능에 휩싸인 사람인건가. 일단 다음 장으로 넘어감.

4. 공포 본능
공포는 생존을 위한 본능이지만 위험을 과대평가해서 세상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자극적인 언론이나 선동가들은 침소봉대를 전략으로 삼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 음모론, 괴담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나도 살면서 괴담이나 침소봉대에 부화뇌동하고 흥분한 적이 없지 않았기에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저자가 괜찮다고 하는 것들이 진짜로 괜찮은건가에 대해선 의심이.... 예를들면 방사능에 대한 내용 같은 것...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통계를 보는 방식이고, 때로는 그 안에 잡히지는 않으면서 도사리고 있는 어떤 실체가 있을 때도 있지 않을까.

5. 크기 본능
우리는 제시된 어떤 수치를 보면서 흥분하기 쉽다. 하지만 비교 없이 한 수치만 보면 비율을 왜곡하고 중요성을 오판하기 쉽다. 대중을 호도하기 위한 수치를 던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걸 판별하는 눈을 가져야겠다.

6. 일반화 본능
사람들은 범주를 정하고 그 안의 특징이 동일할 거라는 일반화를 하곤 한다. 저자도 젊은 의사 시절 엉터리 일반화를 믿고 널리 퍼뜨린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했다. 특별한(예외적) 사례를 전체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 '다수'라는 말 속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음을 간과하는 것 등을 조심해야겠다.

7. 운명 본능
터고난 특성이 사람, 국가, 종교, 문화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그 집단이 현재 어떠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읽고 보니 나도 이런 경향이 꽤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곧 우월감이나 편견을 가져오는 것 아닐까. 아주 더딘 변화도 무시해선 안된다는 것, 어떤 지식은 유통기한이 빠르니 항상 업데이트 해야 된다는 것을 이 장에서 배웠다.

8. 단일 관점 본능
이 장에서 가장 많이 나를 돌아보았다. 주의를 사로잡는 한 가지 관점에 혹해서 그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려는 경향이 내게도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매우 많아 보인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시간이 많이 절약된다. 어떤 문제를 밑바닥부터 배우지 않고도 의견과 답을 낼 수 있고, 따라서 다른 문제에 신경 쓸 여유도 생긴다. 하지만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올바른 방법이 못 된다. 특정 생각에 늘 찬성하거나 늘 반대한다면 그 관점에 맞지 않는 정보를 볼 수 없다.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런 식의 접근법은 대개 좋지 않다." (267쪽)
이 점을 인식한다면 불필요하면서도 사나운 논쟁을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소극적이고 귀찮아서 논쟁 같은 건 웬만해선 하지 않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단선적이라는 점은 깊이 인정한다. 망치와 못의 비유가 매우 적절하다. "내가 좋아하는 생각이 망치라면 드라이버나 스패너 또는 줄자를 가진 동료를 찾아보라." (288쪽)

9. 비난 본능
이 내용은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향을 아주 잘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뭣 때문인지 우리는 울분에 차 있고 '팰 놈'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 일단 찾으면 작신작신 밟아서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는다. 힘들게 진실을 밝혀내도 아님말고 하면 끝이다. 양심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사회 기반을 구성하며, 그 사회 기반에 많은 덕을 보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감사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315쪽)
악당이나 영웅보다 원인과 시스템에 집중하자는 저자의 의견에 크게 동의한다.

10. 다급함 본능
지금 당장 결정하라며 몰아치는 일 중에 실제로 다급한 것은 많지 않다. 오히려 차근히 따져보지 않아 우를 범하는 경우가 더 많다. 현실적인 것은 극적이지 않은 것이 더 많다. 말하자면 우리는 더 침착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부화뇌동하지 말고.

혹여나 이 책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혁이나 혁신 의지를 꺾는다거나 좋은게 좋은거지 뭐~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갖게 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약간은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진실을 보는 정확한 눈이다. 그것을 토대로 하지 않은 외침이나 주장이 힘을 가질 리 없다. 저자는 말한다.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은 삶을 항해하는데 더욱 유용하다. 그리고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볼 때 마음이 더 편안하다는 것이다." (365쪽)
마음 편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그게 중요한거야? 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는데.... 중요한 것 같기도 하다. 조급하고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관점에서는 시야가 좁아지니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노력도 반드시 해야하지만 좀더 많은 사람이 좀더 적절하게 더 넓은 안목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잘 읽었다고 생각한다. 참말로 사람은 평생 배워도 부족하구나. 내 분야에 전문성을 쌓고 겸손하며 신중할 것. 이 긴 리뷰에서 내게 적용할 요약은 딱 이 한 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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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열두 달 이야기 - 교사와 학부모를 위한 교실 생태계 안내
한희정 지음 / 이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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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력이 몇년이나 되었더라.... 이젠 까먹는다. 25년 넘었다. 30년은 안됐고.... 이정도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겠지? 미안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내 경험은 한정되어 있다. 그 무엇보다도, 이날 이때껏 1학년을 안해봤다는 거! 5,6년 전까지만 해도 이게 커다란 핸디캡은 아니었다. 내가 굳이 지원하지 않아도 1학년 지원자들이 부족하진 않았다. 그보다 더 옛날엔 1학년을 주로 하시는 샘들도 많으셨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 우리 학교에선 1학년이 기피학년이다. 6학년에는 희망자가 있어도 1학년엔 없다. 몸도 마음도 축나는게 1학년이어서다. 절대 2년 연속 못한다고 정평이 나 있는게 1학년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좌불안석일 수밖에.... 피하자니 양심불량이고, 하자니 이 나이에 경험이 전무하다는 걸 누가 믿어주겠어? 걱정이다, 걱정.

그러던 차에 이 책이 나왔다. 내가 알고 있는 초등교사 중 가장 똑똑하고 추진력 있으며 상황파악 깊고 넓고 정확한 한희정 선생님이 쓰신 책이다. 이분의 깊이 있는 공부는 대학생들도 충분히 지도할 만한데 현장에선 1학년 전문가로 통한다. 어린 연령일수록 배움이 깊은 교사가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듯이. 그의 지도는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아주 세세하고 숨쉬듯 자연스러워 교육보다도 생활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 깊은 배움과 이론적 배경이 깔려 있다는 것이 들여다보이니 나도 까막눈은 아니라 하겠다.^^;;;

이 책은 교사와 학부모 모두를 대상으로 한 책이다. 1장은 교사, 2장은 학부모 대상의 내용인데, 서로의 내용을 살펴보는 게 피차 더 도움이 된다. 3장은 어린이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교과학습 내용을 살펴보는 장이다. 비고츠키를 깊이 연구하고 교육과정에 통달한 저자의 내공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특히 저자의 교실 속 학습 활동들을 소개하고 있어 1학년이 막막한 교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3장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다.

국어에서 가장 감탄했던 내용은 아이들의 말과 글을 수업 텍스트로 되돌리는 과정이었다.
"입문기 문자교육에서 '삶을 가꾼다'는 명제는 교과서에 가두어 두었던 말공부와 글공부를 해방시켜 아이들의 삶과 경험, 배운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말과 글을 부려 쓰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공부에는 교과서도 따로 없고 학습지도 따로 없습니다. 아이들의 생활에서 경험한 것을 나누는 과정이 교과서고, 그 교과서에 나온 말과 글을 익힐 수 있도록 역동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학습지가 됩니다." (212쪽)
이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나도 고학년 수업에서 아이들의 글을 소식지 형태의 얇은 문집으로 만들어 그걸 수업시간 텍스트로 활용한 적은 있었다. 물론 글의 완성도는 교과서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몰입의 깊이는 훨씬 더하다. 그런데 1학년의 말과 글로도 그런 수업이 된다고? 저자는 '주말 이야기 나누기'를 그렇게 활용했다. 화자(발표자) - 청자(나머지 친구들) - 조언자 및 기록자(교사)의 구도로 진행하니 이게 가능하구나. 교사가 정선하여 즉석에서 타이핑한 문장들을 아이들의 희망대로 출력하여 여러가지 활동의 자료로 활용한다. 마지막에는 묶어서 책으로 만든다. 이 과정에 아이들에게는 표현과 공유, 숙달, 교사에게는 진단활동 등이 모두 포함된다. 학문적 바탕이 제대로 깔려있고 깊은 고려가 들어간 수업에선 이렇게 동시다발적 효과가 나타난다. 교사의 공부는 그래서 필요하구나.

그 외에 낱말불리기 공책, 수업활동 후 돌아가며 소감 말하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교사가 문장으로 기록하기, 급수표에 의한 받아쓰기가 아닌 학급 이야기 받아쓰기 등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있다. 모두 하나의 활동에 두 가지 이상의 의도와 효과가 있다. 심지어 기록과 평가까지 동시에 진행된다. 저자처럼 대외적으로 바쁜 교사가 학급살이를 어떻게 그렇게 알차게 꾸려갈까 늘 궁금했었는데, 중요한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수업준비 따로, 수업 따로, 기록 따로, 평가 따로 하다보면 하루종일 동동대도 시간이 부족하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 너그러워지기도 힘들다. 저자의 이런 노하우를 나도 많이 만들고 싶다.

수학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아이들의 발달에 대한 이해가 지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 이해가 있으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지도할 수가 있다. 일상의 경험에서 시작해 구체와 추상으로 유연하게 넘어가는 길은 수업을 '예술'로 비유했던 책의 내용을 떠오르게 한다.

국어, 수학에 이어 통합교과에서도 성취기준과 교과내용을 정리한 표가 나오는데 솔직히 지도서를 숙독하지도 않고 수업내용만 확인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어서 이렇게 정리된 표는 참 유용해 보인다. 특히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해놓은 단원별 유의점들은 매우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주겠다. 대주제별로 소개된 몇몇 활동들에도 의미가 충실했다. 나눔장터(알뜰장터)는 나도 거의 매년 하는 활동인데 기부로 이어가지는 못했다. (소심하고, 먼지만큼이라도 치사한 소리 듣는 걸 못 참아서 그렇다...ㅠ) 여기에서 좋은 팁 하나를 얻었다.

거꾸로 올라가서, 2장에는 학부모가 궁금해하는, 알아두면 이해에 도움이 되는, 알고 있어야 오해하지 않을, 몰랐을땐 겁났지만 알고 보면 별게 아닌.... 등등의 알짜 정보들이 가득하다. 학부모의 이해를 돕는 것은 저자 뿐 아니라 모든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인 바, 어떤 게 필요한 정보인지,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킬지 참고하려면 교사들도 꼭 읽어두는 게 좋겠다.

1장은 '교사를 위한 월령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월별 교실살이에 대한 내용이다. 월별로 꼭 처리해야 할 일이나 시기에 따른 수업 내용 등이 나와 도움이 많이 된다. 그러나 이것들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이들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와 마음가짐이다. 아직 모든 면에 낯설고 미숙한 아이들을 충분히 감안하여 대비하는 마음, 성장을 지켜보며 놀랍고 흐뭇한 마음, 정들어 헤어지기 싫은 마음까지. 1년의 사랑의 기록이라고 하겠다. 저자가 아무리 지적으로 월등한 교사라 해도 이런 면이 없었다면 쭉정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보다 백배 우수한 교사인 저자도 교실 속 혼돈에서 때로는 아찔한 순간도 만나고 아차 싶은 순간도 있고 이게 맞나 고민하기도 한다. 모든 영역을 커버해야 하는 초등교사는 신이 아니므로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없고 천리안이 아니므로 모든 상황을 다 꿰뚫고 있을수도 없다. 다만 자신의 배움과 경험의 토대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부모-교사, 학생-교사 간에 서로에 대한 신뢰와 호의가 일단 전제되었으면 한다. 이게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ㅠㅠ

아까 3장에서도 기록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1장을 읽으면서도 내가 적용 포인트로 붙잡은 낱말은 '기록'이다. 나는 쓰는데 거부감이 없는 편인데도 매년 마음먹어도 이 '기록'이 쉽지 않다. 저자는 그것을 그때그때 바로바로 현장에서 하는 노하우를 터득하신 것 같다. 기록에 의한 학교생활 통지와 그에 따른 학부모의 회신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이 기록은 또 상담으로 이어진다. 가슴이 뛰었던 구절을 그대로 옮겨본다.
"아주 작은 진보지만 그 작은 진보를 서로 확인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나는 이런 진보의 기록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합니다. 그 다음은 기록을 통해 기억을 갱신하고 오늘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93쪽)

또 아이들의 학습결과물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잘 갈무리하며 가정에 확인시켜 주는 것도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책으로 엮어주는 방식을 선호하시는 것 같다. 아이들의 학습 결과물을 소중히 여겨주고 공유하며 소통의 자료로 삼는 것은 나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인데 저자처럼 체계적이지는 못했다. 큰 그림을 그리고 실행을 해봐야겠다. 그리고 1년이 다 지난 후 가정에 보내주는 방식보다는 중간중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면 다음 활동에 탄력을 받을 수 있겠다. 저자는 부모님의 소감을 회신서로 받으시던데 이건 아이의 성장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연대하는 두 주체의 소통인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난 이걸 잘 시도하지 못한다. "아우 성가시게 뭐 어쩌라고~" 이런 말이 환청으로 들려서리....;;;;; 이 부분 고민이 좀 더 필요하겠다. 어쨌든 일관적인 계획에 의한 아이의 결과물은 아이의 '역사'다. 이 소중함을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한다.
"발달은 곧 역사입니다." (110쪽)

사실 난 올해도 1학년을 희망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희망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어찌될진 모르지만), 평소 한희정쌤의 글을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읽으면서 몇번이나 읽기를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생각했다. 1학년 교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는 필독서이고, 다른 학년 교사들에게도 여러가지 시사점들이 있다. 한희정쌤을 보면서 지적인 힘을 공공을 위해 사용했을 때의 선한 영향력을 본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시치프스의 돌 같은 공교육을 떠받치고 희망을 이야기하려 애쓴다. 그 희망에 작은 돌 하나라도 괴고 싶은 맘 간절하나 체력도 지력도 부족함이 한이로다....;;;; 한쌤은 계속 배움과 실천을 글로 쓰셔야 한다. 나는 계속 충실한 독자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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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수업 매뉴얼 - 학생들이 주도하는 수업 만들기
양은석 지음 / 비유와상징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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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업을 자조적으로 말할 때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수업'이라고 말하곤 했다. 1년의 교육과정을 종으로 횡으로 조망하여 재구성하고 미리 계획을 세워 실행하지 못하고 다음날 수업을 전날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간학습안내를 배부하니까 전주에 미리 내용을 훑긴 해도 뭔가 큰 덩어리로 계획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시간의 제약 뿐 아니라 그날그날 차시단위의 수업을 준비하기도 급급해하다보면 프로젝트 수업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동안 '어떤 주제에 대한 비교적 장기적 수업'을 혼자서 프로젝트 수업이라 부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된 프로젝트 수업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을 보며 개념을 잘 세우고 방법을 익혀서 도전해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그동안 제대로된 프로젝트 수업을 못해왔던 이유를 짚어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건 '나의 한계'였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고무되기보다는 어렵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어려움 중 첫번째는 '스케일'이다. 나는 짜잘한 거에 강한 사람이다. (이것도 나름 강점이 없진 않다.^^;;;) 큰 계획 자체를 부담스러워한다. 성공이든 실패든 작은 단위로 끝맺는게 마음이 편하다. 너무 벌여 놓으면 불안하다. 특히 자원인사 초청, 공공기관 방문 등이 들어가면 부담은 배가되고, 지역의 문제해결 등의 주제로 활동하거나 인터뷰 같은 걸 하게되면 민폐끼칠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둘째는 아이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힘이다. 프로젝트 수업에서 학생들의 자발성은 필수조건이다. 어떤 해에는 이게 잘 된다. 조그만 동기유발에도 막 호응해주고... 원래 그런 아이들인거고 난 그해 운이 좋은 거지. 그런데 이게 안되는 아이들일 때, 끌어내기가 너무 힘들다. 안하고 싶다면 말자~ 치사하게~ 이거 아니면 수업이 안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심정이 되어버린다.

셋째는 학생주도의 작업에서 교사의 적절한 개입이다. 이렇게 치부를 드러내도 되나 모르겠지만 에라 모르겠고 말이 나온 김에.... 아이들마다 모둠마다 천차만별이라 이해도도 다르고 속도도 다르다. 그걸 적절히 맞춰주면서 가야 마무리를 함께 할 수 있다. 그럼 매의 눈으로 순간 포착을 잘 하여 적절한 방향제시, 갈등해결, 막힌 지점 풀어주기 등을 해야 하는데 이게 너무 어렵다.

이러한 개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도해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 프로젝트 수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과 같은 수준으로 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내 수준의(?) 프로젝트 학습을 시도해 보자. 그런 생각에서 이 책은 프로젝트 수업에 대한 개념과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중 몇가지만 적어본다.

1. 수업 계획 단계에서 '탐구 질문'을 정한다. 이때 질문 만들기에 학생들을 참여시킨다. 목표를 질문으로 만들어 실행하는 것은 미처 생각 못했던 방식이다. 탐구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인 것 같다. 역시 좋은 질문은 여기서도 중요하다.

2. 동기유발을 위한 첫 수업이 중요하고 성패를 좌우한다. 준비를 잘하고 시작해야겠구나.... 동기유발의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꼭 놀이나 동영상이 효과적인 건 아니다.

3. 핵심 단계인 탐구 과정에서 탐구방법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이 방법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4. 조사 방법 중에는 도서를 활용한 조사도 있다. 이 내용은 반가웠다.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라서. 이경우 책을 교사가 미리 선정하고 안내해주는게 좋다고 되어 있는데, 이거야말로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다. 교사가 자신있는 분야를 적극 활용하는게 초보일 때는 좋겠지.^^

5. 마무리 단계(발표 및 성찰하기)도 매우 중요하다. 시간에 쫓겨 이 단계를 생략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러면 안된다. 발표는 반드시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 나도 수업에서 '표현'과 '공유'를 늘 기억하려 애쓰는데 같은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아이들의 발표지도에도 심혈을 기울이시던데 그걸 보니 부담감이 더해졌다.ㅎㅎ

6. 동료평가는 서로 도와 성장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 최종결과물이 나오기 전, 중간점검 과정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 마지막에 하게 된다면 격려 위주로. 전에 상호평가를 그저 평가의 목적으로만 활용했던 것이 생각나 뜨끔했다.

내 학급 안에서 실패하지 않고 알차게 진행하기도 어려운데 그것을 남이 보고 이해하고 참고하고 따라할 수 있도록 체계화하고 내용을 채운 점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처럼 교사들 중에는 열성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저자는 물론이고 책을 쓰지 않은 분들 중에도 고수가 많으시다. 치열하게 나누고 고민한다. 이 책을 읽으며 그 현장까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안엔 내가 아는 샘들도 많다.^^ 나도 놓아버리지 말고 끝까지 노력해야겠다. 마지막 날까지 부끄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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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룩후루룩 열린어린이 창작동화 30
윤해연 지음, 김영미 그림 / 열린어린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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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착 감겨드는 동화책을 또 만났다. 다섯 편의 단편이 들어있는 동화집이다. 다섯 편의 제목이 모두 의성어, 의태어로 되어 있는 것은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이리라. 신선하고 감각적이다. 읽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표제작 [후루룩후루룩]은 무슨 소리일까? 아이는 매일 편의점에 간다. '꿈나눔 카드'를 들고서. 한번에 5천원까지만 쓸 수 있는 꿈나눔 카드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아이. 그동안에 받은 수모와 눈치는 아이를 딱딱하게 만들었다. 다른 곳도 갈 수 있건만 이 편의점을 고집하는 이유는 적당히 불친절한 '안경' 알바생 때문이다. 안경은 불쌍해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치도 주지 않는다. 가끔 원 플러스 원이라며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을 툭 하고 챙겨주긴 하지만.... 어느날 아이는 안경이 사장님과 다투는 걸 봤다. 알바비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도 안경은 원 플러스 원을 챙겨준다. 나오는 길에 안경은 아이를 '후루룩!'이라고 불러세우고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다.
"네가 거지라서 주는 게 아니야. 가난하니까 주는 거지."
"뭐라고요?" (째려보며)
"가난은 창피한 게 아니야."
"후루룩, 우린 어차피 가난해. 네 탓이 아니야. 내 탓도 아니고. 하지만 넌 근사한 녀석이야.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것 같더라. 난 너만할 때 가난한게 내 탓 같았거든. 그래서 창피했어. 근데 이젠 알아. 창피한 게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가끔 남이 페푸는 호의를 받아도 돼. 나중에 갚으면 되니까 상관없어. 알겠냐?"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이 부러워서 침을 질질 흘렸고 지금도 남들의 집값에 턱이 떨어질듯 놀라는 나지만 끼니를 걱정하는 빈곤을 겪어본 적은 평생 없다. 생각해보니 이런 카드로 밥을 먹는 아이들이 '무려 돈까스'를 사먹는다고 화를 냈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이런 카드를 쓰는 아이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돌아보게 되네. 이런데서 이야기의 힘을 또 느껴본다.

빈곤층 아이들의 일탈이 더 심한 것은, 통계를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을 위해 노력해 본 적도 없는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자존감을 세우는 데 실패한 탓도 있지 않을까. 안경 알바생이 자존감을 세우고 자기 알바비를 챙겨가며 살아가는 건강한 모습은 참 보기 좋다. 후루룩도 그럴 것 같다. 아직은 자존감보다는 자존심이 앞서고 있지만.... 이 아이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하려면 어른들이 무엇을 해야 할까? 짧은 이야기가 큰 고민을 안긴다.

두번째 [콩닥콩닥]은 처절하다. 아이는 이걸 '가슴속 알갱이들이 뛰는 소리'라고 표현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울음소리>라는 특이한 형태의 그림책이 떠올랐다. 그 그림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가정폭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우리 교실에 있었던 아이들 중에서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보내버린 아이들은 얼마나 될까? 나는 가늠하지도 못한다...

아이는 무슨 사연인지 엄마가 사라지고 아빠랑 둘이 산다. 아빠의 보살핌은 기대할 수 없고 알아서 먹고 치우며 학교에 다닌다. 아빠의 귀가시간은 아이가 잠자리에 든 시간이고 거실에 '사나운 발소리'가 들리면 아이의 가슴속 알갱이들은 뛰기 시작한다. 콩닥콩닥. 콩닥콩닥.

어느날 아빠는 모처럼 따뜻한 밥상을 차렸다. 그 밥상 앞에서 미친듯 뛰는 가슴 속 알갱이들을 누르고 용기를 낸 아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지만 이후의 상황이 반전되기를 바란다.

이야기에 선생님도 나오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이들에게 괴롭히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하고 "얼굴이 왜 그래? 누가 너 때렸니? 하고 묻기도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선생님이 좀 더 깊고 세심하게 살펴봤더라면 도울 방법이 있었을까?.... 적어도 아이가 그렇게 힘들게 용기를 내지는 않아도 됐었겠지. 좀더 세심하게 관찰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게 된다.

세번째 이야기 [드르렁 드르렁] 이건 누가 봐도 바로 알 수 있듯이, 코고는 소리다. 난 이 이야기가 가장 맘에 들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학교 수업이 끝나도 줄줄이 이어지는 스케줄을 헐레벌떡 따라다니는 윤재. 그냥 그렇게 살아와서인지 문제의식도 없다. 자주 하품을 할 뿐이다. 하품을 하면서도 백점을 맞는다. 어느날 1층에 새로 생긴 미술학원 앞에 걸린 할머니 그림을 보다가 윤재는 연거푸 하품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림속 주인공은 날마다 바뀌지만 한결같이 눈을 감거나 자고 있었다. 윤재가 그림 앞에 머무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어느날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림을 보던 윤재가 학원을 째고 집으로 직행한 것이다. 소파에 앉자마자 윤재는 잠이 들었고, 학원 연락을 받고 회사에서 뛰어온 엄마도, 뒤이어 들어온 아빠도....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오후의 거실에서 낮잠에 빠진 가족의 한 장면이 어찌나 편안한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밥보다 잠이 맛있다는 사람이라서....ㅎㅎ 그래서 이 작품에 더 꽂힌 것 같다. 하루 4시간만 자도 충분하다는 열혈인생들을 만나면 내 인생이 좀 열등해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이 편안한 장면을 포기 못하는 거 보면 어차피 성취에 목 맬 인생이 못되는 거겠지. 다른 이들도, 적어도 아이들만큼은 충분히 잘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네번째 이야기 [말랑말랑] 여기서 말랑말랑은 중의적 의미인데 그중에 하나는 할머니 젖이 말랑말랑... 아이들의 꺅~ 변태~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멀미가 나긴 하지만, 조손가정의 이야기 중 아주 특색있고 재밌는 이야기인 건 분명하다. 손주를 키우신 할머니들 중엔 내가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쳐 주변을 힘들게 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 할머니도 좀 그런 과다. 에구... 그치만 소담이가 잘 크고 있으니 희망적인 이야기.

마지막 [눈물이 찔끔] 이사 전 날의 이야기다. 지훈이와 엄마는 싸놓은 이삿짐을 다시 뒤져 버릴 것들을 찾아낸다. 그중에 다시 되돌린 것. 지훈이는 받아쓰기 공책. 엄마는 작아서 입지도 못할 떡볶이 코트. 두 사람의 그 물건엔 누구와의 추억이 담긴 걸까? 이사 전날 밤, 자려고 누운 지훈이의 눈에서 눈물이 콧등을 가로질러 베개에 떨어진다. 슬프게 끝나버린 이야기. 그렇게 슬퍼할 일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특히 지훈이 엄마, 그 떡볶이 코트 버려도 돼요. 그리고 힘내요. 괜찮아요.

작가는 "아이가 슬프다는 건 아이가 있는 그 세상이 힘든 거다.... 이 글은 그런 아이들에게 보내는 작은 응원이다." 라고 했다. 작가의 응원은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으니 힘이 있는 거겠다. 힘없는 나지만 작은 응원 하나를 보탠다. 환경이 힘든 아이들의 마음이 막다른 곳에 처박혀 핏발선 눈으로 되돌아서게 한다면 그건 그아이들의 책임이 아니다. 작가의 응원이 널리 퍼진 세상을 그려본다.

분량은 중학년용쯤 되고 4,5학년에 추천한다. (물론 6학년도 괜찮음) 5학년 교실에서 함께 읽기 적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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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 그림자 체포 작전 중학년을 위한 한뼘도서관 54
유승희 지음, 윤봉선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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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이어 보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따지지 않고 읽어본다. 유승희 작가님도 그런 경우라서 이 책이 나온 걸 보고 바로 도서관 구매 목록에 올렸다.

이 책은 다시 동물 주인공으로 돌아갔다. 유승희 님의 동화엔 동물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데, 동물 자체의 이야기라기보단 마치 우화처럼 인간세상의 모습을 동물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콩팥풀 삼총사'에서는 학교폭력의 문제를, '불편한 이웃'에서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문제를, '별이 뜨는 모꼬'에서는 개발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 책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아이들이 파악하기에는 그간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어려울 것 같다.

갈대밭이 있는 호수가 배경이다. 아마도 작가가 근처에 사시거나 자주 접하는 환경인 듯, 자연의 묘사가 세밀하고 손에 잡힐 듯하다. 주인공은 이번에도 너구리가 나왔다.(너구리를 이뻐하시나봐^^) 또다른 주인공은 물닭이다. 물닭? 잘 모르는 동물이다. 작가의 말에 보니 작가님도 처음 보고 우아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이 외 많은 물새들과 수달, 족제비 등의 동물들이 등장한다.

동물 이야기로 인간사회를 풍자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의 방식이 이번 이야기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나는 크게 두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첫째는, 사회가 안정되게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약속들(법이라고 하겠다)과 그것을 지키는 시민의식이다. 이렇게 무겁고 딱딱한 주제를? 하지만 워낙 능청스러운 대사와 익살맞은 상황묘사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지라 무거운 느낌은 없다.

사람이 점점 큰 사회를 이루어가면서 필요에 의해 생겨난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법이라 할 것이다. 법이 없는 사회는 어떨까? 주먹이 앞서는 사회, 말하자면 약육강식의 사회일 것이다. 이 호수의 동물들은 '갈대법'을 만들어 약육강식에서 벗어난 평화로운 마을을 만들려고 애쓴다. 어떻게 보면 웃음 나오는 일이다. 동물 세계는 자연의 법이 존재한다. 인간이 끼어들지만 않으면 자연의 법칙 속에서 평화롭고 깨끗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걸 못하는 존재 오직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동물은 단지 동물이 아님을 기억하자. 그럼 다시 법으로 돌아간다.

갈대법은 털달린 동물들끼리 잡아먹지 않기, 질서 유지를 위해 보안관, 순찰대 등을 둘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의무 분배는 필요한데 그건 순조롭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호숫가에는 위기가 닥쳤다. 법이 없는 원초의 사회(약육강식)를 갈망하는 '그림자'의 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제목은 <갈대밭 그림자 체포 작전>

읽다보면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도 나오고, 구성원이 의무를 회피할 때 생기는 법의 무력화 등 여러가지 짚어야 할 점도 나온다. 자연스럽게.^^

두번째는 너구리의 속죄와 헌신이다. 난 이쪽의 이야기에 더 마음이 끌렸다. 물닭이 소중히 품던 알을 한개만 남기고 다 먹어버린 너구리. 물닭에게 혼쭐이 나고 물닭이 아파하는 걸 보며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깨닫는다. '이렇게 미안할 수가......' 이후 너구리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물닭을 돕고 지킨다. 하나 남은 알에서 찌삐가 태어나자 아빠라도 된 듯 기뻐하는 너구리. 아니 실제로 그는 찌삐의 아빠나 마찬가지였다. 원수였던 너구리를 향해 차츰 마음을 열어가는 물닭과의 대화가 재미나다. 너구리와 아기 찌삐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이 단순하지만 마음에 와 닿았다.

"아저씨는 가족도 아닌데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가족이 별거냐? 같이 있고 서로 좋아하면 그게 가족이지. 그렇지?"
이렇게 가족의 의미를,
"배고프지?"
"응"
"착하다."
"배고픈게 착한 거야?"
"그럼 당연하지. 아이들이 배고프고, 놀고 싶고, 자고 싶으면 그게 다 착한거야."
이렇게 착함의 새로운 의미를 생각하게 해주어서 좋았다.

갈대밭을 덮친 검은 그림자는 아주 강력했다. 그 악역을 맡은 동물은 누구였을까? 상습적 스포일러인 나. 요걸 비밀에 부치고 스포를 면하도록 하겠다.ㅎㅎ 뒤로 갈수록 그림도 검고 무서웠다. 함께 작업하시는 윤봉선 화백의 그림체가 이제 익숙하다. 마지막 그림의 호수는 맑고 잔잔하다. 우리 사회도 이런 평안을 찾으려면 무엇을 해야되는가? 이번 작품의 주제의식을 높이 산다면 민주시민교육으로도 활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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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2020-04-0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 재미있게 읽었어요. 처음에는 마당을 나온 암탉이 연상되었는데 좀 더 심오한 시민 의식 문제를 다루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