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의 세계
위수정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원은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잔디는 이미 오래전에 얼어죽은 것처럼 보였고 나무들은 앙상하게 가지만 남겨둔 채 떨고 있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계속 걸었다. 저래도 봄이 되면 또 난리 나겠지. 나는 앙상한 나무들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또 난리 나겠지. 우르르 살아나서...... 또 아름답겠지.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과 우연들 (리커버 에디션)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나머지, 별들이 주인공인 것이 분명한 밤하늘을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하고, 개성 넘치는 생물로 가득한 심해를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한다. - P1

지금도 나는 내가 밑천 없는 작가라고 느끼지만 예전만큼 그것이 두렵지는 않다.이제는 글쓰기가 작가 안에 있는 것을 소진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바깥의 재료를 가져와 배합하고 쌓아 올리는 요리나 건축에 가깝게 느껴진다. 배우고 탐험하는 일, 무언가를 넓게 또는 깊이 알아가는 일, 세계를 확장하는 일.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쓰기의 여정에 포함된다. - P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는 그런 건 제대로 된 희망이 아니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누가 알맞은 정도의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 희망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때때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체념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일상에 푸른 잎을 내보이는 희망이다. 나는 그런 희망이 나쁘거나 틀린 것,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P1

병원에서 맞이하는 계절이 거듭될수록, 절망의 이유가 더 구체적으로 길어질수록 환자의 가족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무력감과 미움은 서글프게도 그들이 깊은 사랑으로 묶여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증거는 증거일 뿐, 증거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무력감과 자신을 향한 미움을 전부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 P2

경험, 그건 양성종양 같은 거예요. - P3

우리 심신에 닥쳐오는 고통은 대부분 불운이지요. 보살핌을 받고 더 나은 상태가 되어야 함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마냥 응석을 부려도 되는 건 아니지요. ...고통은 고통일 뿐이에요. 신화가 아니지요. ..고통이란 녀석은 사소하게 취급해서도 안 되고 너무 떠받들어서도 안 돼요. 여간 까다로운 녀석이 아니지요. 당시에 나는 나지라 당신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랄지, 균형감각이랄지 그런 걸 애초에 가지고 태어난 사람 같다고 생각했어요. - P4

자연과학대학의 낡고 스산한 복도를 걸으면서 나는 내 청춘의 맨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음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로부터 한참 비끼어 이쓴 현재에도. 나는 청춘을 살고도 내 청춘의 얼굴을 모른다. 청춘의 얼굴만이 아니다. 사람은 일평생 거울이나 사진을 통해서만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영영 제 얼굴을 제대로 한번 바라보지 못한 채로 세상을 등지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기는 한 걸까. - P5

하지만 확실한 건,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우리 곁에 머물게 되지. 보이지는 않지만.

좀 무서운 얘긴데요?

너한테도 이 얘기가 무섭지 않게 될 때가 올 거야. - P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
장강명 지음 / 유유히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모펀드 CEO가 과로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혀를 끌끌 찬다. 뭣이 중한지 모른다며. 큰돈을 벌게 해주는 직업인지는 모르지만 몸을 해치면서까지 추구할 일은 아니라고 예리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지만 소방관의 희생을 우습게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화재 현장이 아니라 훈련 중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는 슬퍼하면서도, 소방관이라는 직업에는 그럴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 가치는 높은 연봉과는 다른 무엇이다. 종사자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것.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 퇴근 뒤에도, 심지어 퇴직 뒤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 P10

내가 우리 우주에 대해 이해하는 한 가지는, 인간이 그곳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 P62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리 시대의 문호다.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노벨문학상을 받건 못 받건 간에. 그리고 그런 대작가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의 경로와 성취를 지켜본 것은 성장하려는 소설가로서 커다란 행운이다. - P142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깨달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덜 흔들린다. - P148

어떤 제목이 좋은 제목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는 설명이 있다. 첫눈에 눈길을 끌되 소설 내용을 다 알듯한 느낌은 피해야 하고, 다 읽은 뒤에는 ‘아하, 이런 뜻이구나‘하고 무릎을 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부르기 좋고 검색하기 쉬워야 한다는 것 등등. 내가 하나 더 보탠다면 본문과의 어울림을 들겠다. 소설 내용이 강건하고 씩씩하다면 문체도 제목도 그런 느낌인 게 좋다. - P209

작가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아마 작품이 곧 자기소개가 되는 경우이리라. 무슨무슨 소설을 쓴 사람으로 소개되는 것.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성공이 있을까.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작가와 작품이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난 요즘 하루키를 읽고 있어."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다. - P218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했죠. 한국 소설 독자들은 어떤 책을 읽을까. 재미있는 작품을 쓰면 되나.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까 사람들이 재미있는 작품을 읽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나라 독자들은 유명한 작가가 쓴 작품을 읽어요. 일단 유명해져야 합니다. 상을 여러 개 받아서 유명해지자 싶더라고요. - P257

서울 길거리는 포털 사이트 첫 화면과 비슷하다. ‘여기 좀 봐주세요!;라고 호소하는 수많은 미남 미녀의 사진들이 걸려 있고 ‘이건 도저히 못 지나치겠지? 궁금하지?‘라고 외치는 간판도 있다. 단 몇 미터를 걸어도 그 사이에 무언의 메시지를 수십 가지는 받는다. 어떤 상품이 폭탄 세일 중이고 어떤 가게가 문을 닫았고 무엇이 유행이고 지금 시대정신은 이것이고...작품에 당대를 담으려는 소설가라면 그런 변화들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유의미한 정보와 무의미한 소음을 구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방법은 나만 모르는게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분명한 사실은 간단하다. 그런 자극들이 이릉키는 일회적, 단속적 흥분 상태가 소설 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긴 글을 쓰려면 긴 호흡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 - P282

나는 좋은 문학이란 고통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희미한 추정을 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행복보다는 고통에 더 마음 깊이 묶이게 되는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글자로 그 고통을 전하는 기술이 문학이 아닐까. 위대한 문학 작푸은 모두 행복이 아니라 고통을 다루었다. 문학이 위안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위안이라는 게 문학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체험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 P304

2000년 이후 어느 나라에서나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습니다. 이 세계화는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이뤄진 단일화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정치와 경제는 각각 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로, 생산과 소비는 기업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맥도날드 방식‘으로, 문화는 ‘젊은, 풍요로움, 섹스‘를 중시하는 미국 대중문화를 닮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했어요. 그러다 보니 적어도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점점 비슷해져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점점 더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음악을 들으며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진정으로 개인이 남들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게 가능할까? 우리는 다들 비슷비슷하게 규격화된 경로를 거쳐, 비슷비슷한 허무와 불행에 이르게 되구야 마는 것 아닐까? - P3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와 아빠가 죽고 며칠 지나고부터 주변 사람들이 엄마와 아빠를 꿈에서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하얀 차를 타고 집 앞으로 왔다느니, 사업장 걱정을 하며 도움을 부탁했다느니. 나는 왜 내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 내 부모가 남의 꿈에 나타날까 의아해하며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들었다가 시간이 지나고 알아차렸다. 망인에 대한 꿈을 꿀 정도로 애틋한 마음도 없는 이들이 상심한 척, 자신과 망인이 특별한 사이인 척 하려 그런 거짓말도 한다는 것을. 실제의 인간은 소설에서 보던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음흉했다.


신은 믿지 않지만 귀신이라고 할까, 그런 건 어느 정도 믿는 나는 정말로 왜 나는 부모에 대한 꿈을 꾸지 않을까 궁금했다. 갑자기 사고로 죽어 한도 많고 남기고 간 뒷일을 자식들이 감당할 걸 생각하면 가슴이 찠어질텐데 왜 나에게는 나타나지 않을까. 그리고 2달이 지나서야 어젯밤에 처음으로 부모에 대한 꿈을 꿨다. 그런데 이 꿈은 신기한 것이 부모가 나오지 않는 부모에 대한 꿈이란 점이다. 


꿈속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처럼 깨끗하고 밝고 선명했고 비가 내려 물이 넘치는 여름이었다. 여동생과 나는 물이 넘실거리는 강 위의 나무 다리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엄마 안돌아왔으면 어쩔뻔 했노." 우리는 엄마가 아빠가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안도하고 있었고 그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꿈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엄마는 놀다가 돌아갈 우리를 위해 국수를 삶고 있고 아빠는 트럭을 몰고 산으로 일하러 갔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꿈이라 할 지라도 엄마와 아빠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의 사고 소식을 듣고 외국에 살고 있는 동생에게 연락하던 순간에도 나는 돌아가셨다거나 사고가 났다거나 잘못되었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정확하게 '죽었다'고 말했고 지금도 그렇다. 죽은 건 죽은 것이니까.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까. 나는 아직도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버겁지만 적어도 죽은 건 죽은 거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나이는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젯밤의 꿈에서만큼은 억지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순수하게 나는 내 부모가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 언제나 돌아갈 수 있고 나를 해치지 않고 큰일은 책임져줄 부모가 있다는 그 마음이 어찌나 편안하던지. 


그래서 꿈에서 나는 내 부모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존재는 느낄 수 있었고 잠에서 깨고 나서도 한동안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강렬한 꿈이었다. 그리고 그건 부모의 얼굴을 잠시 보는 꿈보다 더 좋은 꿈이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blanca 2023-02-15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물이 흐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꼬마요정 2023-02-15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바람돌이 2023-02-16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꿈이라도 꾸실 수 있어 다행이다 싶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프네요. 그냥 많이 슬퍼하고 많이 그리워하세요. 우리 마음이 그저 슬프고 그립다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맞을거같아요.

2023-02-16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3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5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