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카포티 지음, 공경희 옮김 / 아침나라(둥지) / 2003년 11월
품절


그녀는 낡아빠진 붉은 벨벳 의자에 주저앉더니, 양반 다리를 하고 방을 둘러봤다. 눈을 더 가늘게 뜨고서.
"이런 방을 어떻게 견디죠? 공포의 방인데."
"아, 뭐든 적응되기 마련이죠."
나는 대꾸하면서도 좀 짜증스러웠다. 내 아파트를 자랑으로 여기던 참이었으니까.
"난 안 그래요. 아무 것에나 적응하지 않을 거에요. 그런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죠."-31쪽

사람의 성격은 자주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 몸도 몇 년에 한 번씩은 변한다. 바람직하든 아니든, 변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 여기 변하지 않을 두 사람이 있었다. 마일드레드 그로스먼과 할리 골라이틀리. 둘의 공통점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변하지 않을 터였다. 너무 일찌감치 개성을 얻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벼락부자처럼 균형 감각이 없어진다. 한 사람은 머리가 큰 현실주의자로 몰입했고, 다른 사람은 균형 감각이 없는 낭만주의자로 빠졌다. ... 그들은 왼쪽에 있는 낭떠러지도 쳐다보지 않는 단호한 걸음으로 인생을 시작해, 똑같은 걸음으로 인생의 끝에 다다르리라. -92쪽

야성적인 것은 사랑하지 마세요, 벨 씨. 그게 그이의 실수였어요. 그는 늘 집에 야생 동물을 데려왔어요. 날개에 상처 입은 매 같은 거요. 한 번은 다리가 부러진 살쾡이를 데려왔어요. 하지만 야생 동물한테는 마음을 줄 수 없는 법이죠. 마음을 쏟을수록 그것들은 더욱 강인해져요. 강해져서 숲으로 달아나죠. 나무 위로 날아가거나. 그 다음에는 더 높은 나무로 가고. 결국 하늘로 날아가죠. 마침내 그렇게 끝나고 만다니까요, 벨 씨. 야성적인 것을 사랑하면 결국 하늘을 쳐다보는 것으로 끝나고 말아요.-116쪽

따분한 말이지만, 결론은 착한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착하다는 거요? 정직함이라고 해야겠지요. 법을 잘 지키는 의미의 정직함은 아니고- 난 그날의 즐거움에 도움이 된다면 보석이라도 훔치겠어요. 25센트짜리 동전이라도 훔칠 거에요. 내 자신에게 정직한 걸 말하는 거예요. 겁쟁이, 허풍쟁이, 감정 이상자, 창녀만 아니면 뭐든 되겠어요. 정직하지 않은 심장을 갖느니 암에 걸리겠어요.-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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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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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과 놀이공원, 의회 복도와 병원 대기실에서 '선착순'이라는 줄서기 윤리가 '돈을 낸 만큼 획득한다'는 시장 윤리로 대체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한때 비시장 규범이 지배했더 삶의 영역에 돈과 시장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1쪽

(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 최고 가격을 자발적으로 지불하는 사람에게 입장권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셰익스피어 공연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을 결정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설득려깅 없다....어떤 재화에 기꺼이 가격을 지불하려는 것이 꼭 해당 재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 가격에는 자발적으로 지불하려는 마음만큼이나 지불할 수 있는 능려도 반영된다. 셰익스피어 연극이나 레드삭스 경기를 가장 간절하게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도 입장권을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최고 가격을 내고 입장권을 손에 넣은 사람이라고 그 경험의 가치를 전혀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55쪽

줄서기를 비롯해 재화를 분배하는 기타 비시장적 방식이 시장논리로 대체되는 경향은 현대 생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현상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장에서 살펴본 공항, 놀이공원, 셰익스피어 축제, 의회 공청회, 콜센터, 의사 진료실, 고속도로, 국립공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치기 권리 구매 현상은 30년 전만 해도 거의 상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대부분 최근에 발달했다는 사실이 이목을 끈다. -67쪽

한 경제학자가 주로 저소득층 학생으로 구성된 텍사스 소재 학교에서 실행하는 AP인센티브 프로그램을 밀착 조사했을 때, 이 프로그램은 돈을 많이 지급할수록 학생들의 점수가 높아진다는 일반적인 '가격 효과'가 아니라 다른 방식을 통해 학생들의 학력을 향상시킨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 "단지 수입을 극대화하려는 목적으로만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돈은 결과를 외부로 드러내는 효과를 내서 학업 성취를 '멋진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인센티브 액수가 학업 성취의 결정적 요인이 아닌 이유다. 해당 프로그램이 성공한 이유는 학업 성취를 이루도로고 돈으로 학생들을 매수해서가 아니라 학업 성취와 학교 문화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86쪽

이 시나리오에서 시장은 도구로서 작용하지만 순수한 도구는 아니다. 시장 메커니즘으로 시작한 방법이 시장 규범이 되고 있다. 분명히 우려되는 점은,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돈을 주면 아이들이 독서를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며, 결국 독서의 내재적 장점을 퇴색시키고 밀어내거나 서서히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94쪽

경제학자들은 흔히 시장은 무기력해서 스스로 통제하는 재화에 관여하거나 이를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시장은 사회 규범에 흔적을 남긴다. 종종 시장 인센티브는 비시장 인센티브를 잠식하거나 밀어낸다. -98쪽

산아제한 담당 관리는 부유한 위반자들ㄹ에게 부과하는 벌금을 인상하고, 정책을 위반한 유명 인사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들이 텔레비전에 출연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벌금은 부자들에게는 푼돈이다. 정부는 부자들이 실제로 타격을 받을 만한 영역, 즉 사회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 평판, 명예 등을 더욱 세게 겨냥했어야 한다."

정부 당국자들은 국민들이 정책을 위반했을 때 내는 벌금을 처벌로 생각하고, 여기에 따라다니는 불명예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벌금이 요금으로 귀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문제는 정책의 이면에 놓인 규범이다. 벌금이 단순히 요금 개념으로 바뀐다면, 능력있고 돈을 지불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자녀를 더 출산할 수 있는 권리를 판매하는 이상한 산업에 정부가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105쪽

인센티브는 경제학적 사고에서 최근에 등장한 용어로 애덤 스미스나 기타 고전 경제학자의 글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20세기까지도 경제학적 담론에는 출현하지 않않고, 1980년대와 1990년대까지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20세기 후반 시장과 시장 중심적 사고가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인센티브라는 단어의 사용량은 급격히 증가했다. 구글 도서 검색에 따르면 194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센티브라는 용어의 사용이 400퍼센트 넘게 증가했다. -125쪽

어째서 경제적 효율성을 신경 써야 할까? 아마도 선택의 합계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맨큐가 설명하듯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면 사회 구성원 전체의 경제적 행복이 극대화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해야 할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이 질문을 무시하거나 공리주의 도덕적 철학의 견해에서 대답을 찾는다. 하지만 공리주의에는 몇 가지 친숙한 반박이 따른다.. 시장논리에 가장 적절한 반박은 어째서 도덕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선택의 만족을 극대화햐야 하는가다.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개싸움이나 진흙 레슬링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느 우리는 개인적 판단을 내리지 말고 공리주의적 계산법에 따라 각 선호를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야 할까? 시장 논리가 자동차.토스터.평면 텔레비전 등 물적 재화와 관련이 있다면 이러한 반박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재화의 가치가 단순히 소비자 선호에 따라 달라진다고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128쪽

하지만 시장 논리를 섹스.출산.육아.교육.건강.범죄처벌.이민정책.환경보호 같은 문제에 적용하면 모든 사람의 선호가 똑같이 가치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처럼 도덕척 책임이 따르는 영역에서는 재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어떤 방식이 다른 방식보다 더 수준 높고 더 적절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도덕적 가치를 묻지 않고 사람들의 선호를 무차별적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자녀가 독서를 하도록 가르치고 싶은 부모의 욕구는 바다코끼리를 코앞에서 쏘고 싶은 사냥꾼의 욕구와 정말 똑같이 중요할까?-129쪽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재정적 인센티브를 쓸 계획이라면 충분히 많이 지급하든지 아니면 전혀 지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인센티브(보상금)를 주는 것이 그 행동의 특징을 바꾸기 때문이다. 재정적 인센티브가 공공정신에서 우러난 활동을 보상받기 위한 노동으로 바꾼 것이다.
(행의의 의미가 인센티브 지급으로 이미 달라진 시점에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충분한 인센티브를 지급해야 함. 적은 인센티브 지급은 안 주느니만 못한 결과)-165쪽

미덕에 대한 경제주의의 견해(미덕은 사용하면 고갈된다)는 시장에 대한 신념을 불타게 하고 원래는 속하지 않았던 영역으로 시장을 확대시킨다. -고갈되는 미덕에 불완전하게 의지하느니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 낫다-하지만 비유가 잘못되었다. 이타주의.관용.결속.시민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 시장 지향 사회의 결함 중 하나는 이러한 미덕이 쇠약해지게 방치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공 삶을 회복하려면 좀 더 부지런하게 미덕을 행사해야 한다. -180쪽

역사적으로 생명에 대해 보험을 드는 행위와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는 행위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생명보험을 도덕적으로 불미스러운 제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생명보험은 살인을 저지르는 동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생명에 시장 가격을 붙이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수 세기 동안 생명보험을 금지했다. 18세기 프랑스의 한 법학자는 이렇게 썼다. "인간의 생명은 상업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죽음이 이윤을 노리는 투기의 근원이 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많은 유럽 국가에서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생명보험 회사가 없었다. 일본에 생명보험 회사가 처음 등장한 것도 1881년이었다. 생명보험은 도덕적 타당성이 부족해서 19세기 중반이나 후반까지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발달하지 않았다. -200쪽

시장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일 자체는 미덕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이런저런 시장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경기의 선을 향상시키는지 훼손시키는지 여부다.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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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구판절판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그.
나는 그를 진심으로 특별히 사랑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쩌면 내 생애에 단 하나의 '타인을 위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반해 있다. 그가 내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요구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분연히 버리고 그와 함께 남도로 떠나는 밤기차의 창가에 청승맞으나 희망찬 포즈로 앉아서 그를 위해 삶은 달걀 껍질을 벗길 것이다, 얼마든지!

하지만 돌이켜보면 불과 몇 달 전에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른 남자와 마주앉아 있었다.

나의 분방한 남성편력은 물론 사랑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 -11쪽

아줌마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삶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양복점 뒷방에서 강제로 순결을 잃은 순간 이미 자기의 삶은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아저씨가 자기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달라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런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줌마들은 자기의 삶을 너무 빨리 결론짓는다.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발길을 돌려 나갈 줄을 모른다.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한번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빠지게 그 밭만을 개간한다.-68쪽

금지된 것만 하고 싶고, 강요된 것만 하기 싫고.-105쪽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224쪽

주위의 것이 다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유일하게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자기 자신. 어둠 속에서는 그렇게 자기 자신만 남기 때문에 이기적이 될 용기가 생기는 건 아닐까.-225쪽

아줌마처럼 강인한 사람은 아무리 힘든 삶이라도 자기가 익히 아는 일은 어떻게든 이겨나갈 자신이 있다. 그러나 새롭게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불안하고 자신이 없다. 그것이 아줌마처럼 자기 생에 대한 의지는 강하되 자기 생을 분석할 줄 모르는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241쪽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245쪽

사람의 감정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며 특히 젊은이를 변심하게 만드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상대의 사랑을 잃을 때 내가 불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깨닫고 그 사랑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한편 그것이 사라질 때의 상실감에 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304쪽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선한 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지만 악에 대해서는 실수라거나 충동이라거나 하는, 자신의 통제로부터 이탈되었다는 뜻의 이름을 달아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런 사람들은 삶을 위대하고 진지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만 보려는 서정적 인간임에 틀림없다.-311쪽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그 기회를 받아들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의 전 단계에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느냐는 순전히 삶이 하는 일이다.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325쪽

내게는 허석을 사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삶이 그 기회를 나 아닌 이모에게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어제 이후 어느 모로 보나 명백해졌다.-332쪽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 그러나 우연은 많다. 아니 세상의 중요한 일은 공교롭게도 모두 우연이 해결한다. 다행인 것은 우연 중에는 나쁜 우연이 더 많지만 간혹 좋은 우연도 있다는 것이다. -372쪽

자기가 눈물을 훔칠 생각조차 못하고 검은 산처럼 사라져준 뒤 이모가 허석과 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이를 갖고 그리고 그 중절수술을 하느라 얻은 고통이란 것을 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그것을 알았다면 이모를 다시 저 눈밭으로 내쫓아버릴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알았다 할지라도 이모의 고통이 그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꽤 희귀한 것을 갖고 있는데, 바로 순정이었다.-376쪽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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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코, 연애하다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다나베 세이코의 '노리코 3부작'이란 걸 국내에 출간된 순서대로 읽다 보니 거꾸로 읽게 되었다. 처녀시절-이혼과정-이혼 후 이야기가 3부작으로 연결되는데 거꾸로 읽으니 마치 한 여자의 삶의 역추적 하는 기분이다. 주인공 노리코는 돈 많고 자신을 사랑해 주지만 천박한 남편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하는 여자였는데, 이혼하고 나서도 힘들 땐 그 남편에게 기댈 정도의 뻔뻔함을 가진 여자였는데, 처녀시절 이야기를 읽으니 그런 그녀의 캐릭터가 딱! 소리를 내며 완성된다. 그리고 그녀의 나머지 삶이 모두 납득가능해지며 3부작의 긴 이야기가 완결되는 것이다. 3부작을 순서대로 읽는 선택과 거꾸로 읽는 선택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단연히 후자를 추천하고 싶다. 여자가 나이 들어가는 순서 그대로 읽는다면 아무리 잘 읽는다 해도 조금은 쓸쓸해질 것 같다. 거꾸로 읽으면 소설적 재미라도 있지만... 


처녀시절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연애.의 이야기인데 내 나이와 가장 밀접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3부작 중 가장 재미있었고 한권의 책으로서 던지는 메시지도 와닿았다. 그 메시지란 건, 얼마전에 읽은 김연수의 문장을 빌리자면 '진짜 인생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게 진짜 인생이다.'라는 것. '인생'을 '연애'로 고치면 딱 맞는 문장이 된다. 다만, 김연수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진짜 생이라고 약간은 낭만적인 톤으로 이야기했다면 나는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는 체념의 태도라는 것이 차이일까?  인생 그리고 연애란 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이십대 초반에는 그 불확실성이 롤러코스터처럼 짜릿했고 롤러코스터가 멈추면 당연히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커녕 멀미만 실컷 하고 이래 저래 비맞은 원숭이처럼 지쳐가는 차에 서른의 노리코가 보여주는 연애 이야기는 처참하게 현실적이어서 설득력이 있다. 이십대 초반이었다면 절대로 끌리지 않았을 이야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 종내 저리 흘러가겠군, 보여주는 예언서의 느낌. 책 한권 읽었을 뿐인데 진짜 연애 한 번 한 듯 기빨린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날 좋아하는 남자는 가볍기 그지 없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같이 밤을 보내자는 말에 '마지막 전철을 놓치면 안된다'며 떠나가는 철벽남이고, 근데 그 철벽남이 고른 여자는 아무리 봐도 나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도무지 승복하기 어려운 상대이고, 이리 저리 휘둘리다 정신 차려보면..(그 이후의 이야기는 스포일러라 생략^^) 


마지막에 대한 평가는 독자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뉠 수 있을 듯 하다. 개인적으론 무척 만족스러웠고, 그 자학의 냄새가 이 책을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 생각한다. 엔딩에 크게 상심할 건 없다. 노리코는 그래도 계속 잘 살아가니. 우리의 인생도 그런것이니 힘내라고, 지금 죽을것 같다고 울지 말라고 작가가 3부작을 썼나 싶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동시대의 여성작가가 여성독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위로가 아닐까. 


연애 이야기라고 해서 달달한 걸 기대한다면 권하지 않겠다. 안될거야, 이번에도 안될거야, 스스로 방어막을 치며 어쩔수 없이 또 새로운 남자에게 빠져드는 여자에게 주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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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8-04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AYLA님 리뷰 덕분에 이 책 읽고 싶어졌어요. 저도 거꾸로 읽어야겠군요! ㅎㅎ 안 될 거야, 안 될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눙무리. ㅠㅠ

LAYLA 2012-08-05 23:51   좋아요 0 | URL
안 될 거야..라 외치지만 그래도 인생에 마지막 남은 즐거움은 연애뿐이라서요 ㅎㅎㅎ 네꼬님은 훈남편님과 훈아주버님도 계시니 눙물 흘리지 마세요..동..동정하지 마세요...!!! ㅎㅎㅎ

blanca 2012-08-0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군요.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거꾸로 읽는 게 더 좋을 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연애 하면 꼭 <달콤한 나의 도시>가 떠올라요. 은수가 갈등했던 그 상황이요.

LAYLA 2012-08-05 23:56   좋아요 0 | URL
blanca님이 보시기엔 좀 가벼울 거 같기도 해요. 주인공의 마음은 좋아하는 남자에게, 몸은 하룻밤 즐거울 수 있는 남자에게 가 있는데 이게 정이현보다 훨씬 노골적이긴 하죠? ㅎㅎ

반딧불,, 2012-08-05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달달한 연애가 좋을 나이가 지났다는 슬픈 자각이 갑자기 드누만요. 근데 진짜 안사고는 못배기게 하는 글이구만요. 월급 타면 오랜만에 나에게 선물해야겠습니다.
-근데 블랑카님이 그리 떠오른다는 달콤시는 왜 제겐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지..쓰다보니 잠깐 떠오르네요. 근데 다른 것들은 안떠오르고 그냥 오토바이랑 시래기국밥만 떠오르는건지 참.

LAYLA 2012-08-06 00:44   좋아요 0 | URL
나이 들어 좋은 점은, 연애가 달달하기만 한 게 아니란 걸 알기에 즐거울 수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즐기자는 결기(?) 같은 것이 생긴달까요?? ㅎㅎ

다락방 2012-08-08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도대체 어떻다는거죠? 왜요왜요!! 이 작가가 [아주 사적인 시간] 쓴 그 작가인가요? 오래전에 그 책을 읽었었는데..
저도 이 책 읽어보겠어요!
'안될거야, 이번에도 안될거야, 스스로 방어막을 치며 어쩔수 없이 또 새로운 남자에게 빠져드는 여자'가 바로 저거든요. ㅋㅋㅋㅋㅋ

LAYLA 2012-08-08 21:10   좋아요 0 | URL
네 그게 바로 노리코 시리즈 마지막 권이에요!! 이 남자는 영 아니란걸 알면서도 빠져드는 그런 바보 같은 나.. 안될거야 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나..!!!
 
노리코, 연애하다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7월
절판


"새로 고쳐 지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래된 것이 더 값어치가 있거든. 이래 봬도 독특한 건축이라꼬 대학 교수들도 조사하러 온 적이 있다 아니가."
고는 또박또박 귀에 박히게 말했다. 그것은 콘크리트나 새 건축자재로 지금이라도 당장 최신식 별장을 지을 재력은 충분하지만, 일부러 오래된 그대로 놔두었다, 이것이 훨신 부자다운 처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지간히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래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내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영리하다는 걸 굳이 알려줄 의리 따위는 없으니까. 그걸 아는 것은 남자의 책임이니까.-36쪽

창밖에 소나무 숲이 있는데, 거기 비석이 두 개 서 있었다. 뭘까 궁금한 생각에 수은등 불빛에 들여다보니, 하나에는 '@@궁 비전하가 손수 심으신 소나무' 또 하나에는 '@@궁 @@자 공주께서 손수 심으신 소나무'라고 적혀 있었다. 비석은 아직 새것이었다.
...
"손수 심으신 소나무라는 발상이 역시 다르네요, 윗분들과 아랫것들 차인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내가 세운 것도 아닌데."
"그럼 나는 손수 데려온 여자, 뭐 그런 건가?"
"그렇게 놀리지 마라니까!"-48쪽

나는 고로의 성품과 마음만이 아니라 육체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좋은 비누 냄새가 날 것 같은, 단단해 보이면서 매끈한 몸매. 나카야 고의 도발적이면서 조각처럼 훌륭한 나체-그마저도 부자의 교만과 에고이즘을 상징하고 있다. 돈 들이고 자만심 들이고 시간 들여서 만든 육체미-와 달라서, 고로의 그것은 솔직하고 어딘지 쓸쓸한 육체다.
그런 무심한 육체가 나는 좋다. -69쪽

남자란 대개 가족의 냄새가 나는 곳에 있으면, 그 냄새에 전염되어 단순한 '가족의 일원'이 될 뿐 한 '남자'가 되는 일은 별로 없는데...-117쪽

"아름다워. 젊기도 하고...몇 번을 봐도 '처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그렇게 '처음이에요'하는 사람이 많겠죠?"
"아니. 나 정도 나이가 되면 당신처럼 젊은 사람하고는 사귀지 않지. 간혹 사귀는 친구도 있지만... 노는 건 마흔서넛까지면 충분하다는 친구들이 많아.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정신적인 요소가 많아져서 젊은 사람은 안 돼. 처음이에요, 보다는 다녀왔어요, 하는 여자를 더 좋아하지."-159쪽

...단지 이렇게라도 해서 그에 대해 알고 싶어 안달하는 나의 지금 모습이 좋았다. 나는 아직 남자를 좋아하고 그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울 수 있다는, 그런 풍요로운 느낌이 좋았다.-174쪽

고로는 그래도 나와 둘이만 있게 된 것이 편했는지 그제야 웃옷을 벗었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한잔하까?"
얼마나 기쁘던지! 만일 내가 개라면 꼬리라도 흔들었을 것이다.-197쪽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유혹할 수 있는 사람과 유혹할 수 없는 사람. 나에게 고로는 '유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진짜 유혹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한한다. 실패해도 어차피 본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이일 때만 가능하다.
...
술을 먹여 떨어지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고로는 약한 것 같으면서도 술이 세다. 또 섹스어필을 해보려 해도 사정이 만만치 않다. 금방 시계를 들여다보고 '막차 시간이다!'라고 벌떡 일어서는 남자를 어떻게 요리해야 한단 말인가! 맨살을 힐끔힐끔 보여줘도 '감기 들라'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남자를 어디서부터 잡아먹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내가 고로를 넘어트릴 수 없는 가장 큰 원인은 내가 그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 정말 좋아하면 무엇보다 상대방 입장에 서서 생각하게 되니까. 고로는 나를 여자로서 사랑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 내가 유혹하면 더 싫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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