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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코, 연애하다 ㅣ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다나베 세이코의 '노리코 3부작'이란 걸 국내에 출간된 순서대로 읽다 보니 거꾸로 읽게 되었다. 처녀시절-이혼과정-이혼 후 이야기가 3부작으로 연결되는데 거꾸로 읽으니 마치 한 여자의 삶의 역추적 하는 기분이다. 주인공 노리코는 돈 많고 자신을 사랑해 주지만 천박한 남편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하는 여자였는데, 이혼하고 나서도 힘들 땐 그 남편에게 기댈 정도의 뻔뻔함을 가진 여자였는데, 처녀시절 이야기를 읽으니 그런 그녀의 캐릭터가 딱! 소리를 내며 완성된다. 그리고 그녀의 나머지 삶이 모두 납득가능해지며 3부작의 긴 이야기가 완결되는 것이다. 3부작을 순서대로 읽는 선택과 거꾸로 읽는 선택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단연히 후자를 추천하고 싶다. 여자가 나이 들어가는 순서 그대로 읽는다면 아무리 잘 읽는다 해도 조금은 쓸쓸해질 것 같다. 거꾸로 읽으면 소설적 재미라도 있지만...
처녀시절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연애.의 이야기인데 내 나이와 가장 밀접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3부작 중 가장 재미있었고 한권의 책으로서 던지는 메시지도 와닿았다. 그 메시지란 건, 얼마전에 읽은 김연수의 문장을 빌리자면 '진짜 인생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게 진짜 인생이다.'라는 것. '인생'을 '연애'로 고치면 딱 맞는 문장이 된다. 다만, 김연수가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진짜 생이라고 약간은 낭만적인 톤으로 이야기했다면 나는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는 체념의 태도라는 것이 차이일까? 인생 그리고 연애란 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이십대 초반에는 그 불확실성이 롤러코스터처럼 짜릿했고 롤러코스터가 멈추면 당연히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커녕 멀미만 실컷 하고 이래 저래 비맞은 원숭이처럼 지쳐가는 차에 서른의 노리코가 보여주는 연애 이야기는 처참하게 현실적이어서 설득력이 있다. 이십대 초반이었다면 절대로 끌리지 않았을 이야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 종내 저리 흘러가겠군, 보여주는 예언서의 느낌. 책 한권 읽었을 뿐인데 진짜 연애 한 번 한 듯 기빨린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날 좋아하는 남자는 가볍기 그지 없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같이 밤을 보내자는 말에 '마지막 전철을 놓치면 안된다'며 떠나가는 철벽남이고, 근데 그 철벽남이 고른 여자는 아무리 봐도 나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도무지 승복하기 어려운 상대이고, 이리 저리 휘둘리다 정신 차려보면..(그 이후의 이야기는 스포일러라 생략^^)
마지막에 대한 평가는 독자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뉠 수 있을 듯 하다. 개인적으론 무척 만족스러웠고, 그 자학의 냄새가 이 책을 완벽하게 만들어 준다 생각한다. 엔딩에 크게 상심할 건 없다. 노리코는 그래도 계속 잘 살아가니. 우리의 인생도 그런것이니 힘내라고, 지금 죽을것 같다고 울지 말라고 작가가 3부작을 썼나 싶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동시대의 여성작가가 여성독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위로가 아닐까.
연애 이야기라고 해서 달달한 걸 기대한다면 권하지 않겠다. 안될거야, 이번에도 안될거야, 스스로 방어막을 치며 어쩔수 없이 또 새로운 남자에게 빠져드는 여자에게 주고 싶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