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품절


국경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29쪽

내가 살던 동네는 그처럼 산책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는데, 높은 동네로 갔더니 그렇게 산책하기 좋을 수가 없었다. 빌리 조엘의 '업타운 걸'이라는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주택들이 늘어선 언덕길을 걸어가노라면 멀리 금문교와 샌프란시스코 만이 굽어보여 마치 구름 위를 걸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밤에는 그 경치가 더 대단했다. 오클랜드와 만 너머 샌프란시스코의 불빛들이 마치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런 길을 산책할 수 있다는 건 세계적으로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 멋진 동네에 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일레인 킴 선생을 존경할 태세를 이미 갖췄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노라면 해가 저무는 금문교가 보였다. 아아, 그 집에서는 설거지를 할 때마저도 사색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거기야말로 내가 꿈꾸던 '나와바리'였다. 그런 곳에서 매일 해가 저무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역시 나보다는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것 같았다.
-105쪽

실제로 이야기해보니 역시 그랬다. 일레인 킴 선생은 1960년대를 정면으로 관통한 사람이었다. 올해 65세인 일레인 킴 선생은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데(사실 나는 그 미모와 몸에 밴 자태에 더 반했다) 내가 느낀 그 젊음과 아름다움은 대부분 그 시절의 힘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105쪽

윌리엄 포크너를 말하는 해리 캔들의 모습에서 나는 마오 쩌뚱을 언급하던 그 교수의 모습을 봤다. 그렇게 두 사람을 겹쳐보니까 이 사람들의 젊은시절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교수는 마치 포크너를 만난 해리처럼 마우 쩌뚱을 향해 두 손을 흔들었고, 해리는 마치 마오 쩌둥을 만난 교수처럼 포크너를 깍듯이 모셨다. 이제는 포크너도 죽고 마오 쩌뚱도 죽었으니, 남는 건 그런 개인적 추억뿐이었다. 그리고 그 추억이 한 사람의 청춘에 관해서 말해준다. -123쪽

"그 시절에 우리는 참 가난했지. 미안해, 아스트라드. 우리는 어린 너를 그 먼 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어."
물론 이런 식의 감각이 내게는 없다. 다만 나와 비슷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어떤 여성이 결국 나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됏다는 깨달음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20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