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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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걸고 몸을 내던진 진짜 사랑은 그 자체로 훈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인생의 훈장 같은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인가 궁금하였다. 달리는 사랑이라니! 화끈하고 찐하고 머리가 띵할 정도의 연애담을 기대했다. 약간 삼류스럽고 사랑과 전쟁을 연상케 하는 막장스러움이 섞여있다 할지라도 용서하겠다는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서. 하지만 책이 종반부를 향해 치닫도록 별다른 연애담은 나오지 않았다. 서른아홉 먹은 유부녀가 연줄로 취직한 산부인과의 기러기 의사랑 이러고 저러다가 불륜관계에 빠져든다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 그럼에도 나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였고 가끔은 육성으로 낄낄거리기 까지 하였는데, 그건 이 책이 달리고 있어서였다. 사랑이 아니라, 이 책이 달리고 있어서.


책의 주인공 혜나는 불혹을 목전에 앞둔 성인이지만 아직까지도 아빠 신용카드를 요술 방망이처럼 휘두르는 철없음을 간직하고 있다. 한 살 위의 오빠인 학원은 한 레벨 더 철이 없어서, 사십억의 빚을 안고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1억짜리 스포츠카를 사들이고 밤이면 광란의 드라이브를 하자며 여동생을 꼬드긴다. 그 외에도 몰락한 경제적 지위를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부잣집 사모님인양 행세하는 엄마나, 2살 어린 새어머니에게 머리를 조아려 어떻게든 유산 한 푼 더 받아보려 알랑방귀 뀌는 큰오빠나 만만찮게 철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철없음의 자웅을 겨루려는 듯 비범한 캐릭터들 사이에서 연년생 남매 혜나와 학원은 문 크리스탈 파워 업 합체라도 한 듯 투닥투닥 쌍으로 철없음 시너지 오라를 내뿜으며 스토리를 이끌어 나간다. 혜나는 유효기간 만료가 다가오는 아빠 카드 앞에서 금단현상처럼 덜덜 떨고 학원은 아직도 마지막 한탕을 외치며 여기저기 돈 뜯을 곳만 찾아다닌다. 급기야 둘은 고리대금업자 박회장에게 소녀처럼 나이든 69세의 모친 임현명 여사를 진상하기로 작정하는데...대형사건이 여기 저기 폭죽처럼 터지는 둘의 인생에서 생각할 겨를은 없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기는커녕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으로 막 흘러가는 혜나와 학원의 삶은 이시빌세기(21c) 강남스타일 막장라이프이다. 하지만 당사자들 입장에선 그들의 인생이 그저 달리고 있을 뿐, 마하39의 속도로!


주인공 혜나는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철없지만 띨띨하지 않고 한때 부잣집 막내딸로월 신용카드 사용액 2000의 기록을 찍어보기도 한 여자지만 천박하지 않다. 자신과 자기가족의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 정도의 분별력과 자기인식은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기연민에 빠지지는 않는다. 자신을 보호하려 위악을 떨지도 않는다. 내면에 자존감이 자리 잡고 있지만 철은 없는, 아주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학원보다는 100그램 정도 철이 든 혜나는 수습은 하면서 살자고 가족들과 지지고 볶고 화끈하게 치고 박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앞에선 저런 가족과 내 처지가 부끄러워 눈물을 터트린다. 엉엉 원장님 우리 같은 인간쓰레기들은 그냥 단호하게 잘라 버리세요, 우리 아빠처럼요. 아빠도 내버린 자식들을 원장님이 왜 챙겨줘요? 죽든 살든 나 몰라라 하세요. 그래야 우리도 정신을 차리지 않겠어요? 운이 좋으면 여든 살쯤엔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도 있겠죠.” 혜나는 이쁘고 똑똑한 여자들이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랑스럽고 귀여운(+유머감각까지 갖춘)여자였던 것이다. 혜나와 산부인과 의사 정욱연의 사랑은 기대보다 밍숭맹숭하고 둘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스토리로서 가지는 설득력은 떨어지지만 혜나의 캐릭터 하나만 보자면 납득할 수 있다. 저런 여자니까 잘나가는 의사가 픽 웃으며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면...


소설의 제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느껴지는 그 속도감이 대단했다. 숨 가쁘게 읽다 보니 작가도 이렇게 신들린 듯 썼을 줄 알았는데, ‘사랑이 달리다의 단초라고 볼 수 있는이현의 연애에 수록된 라 캄파넬라를 읽어보니 미묘하게 그 속도감이 다르다. 전체로 읽을 땐 잘 보이지도 않게 흐릿하게 다른 문장과 단어들, 그것들을 다듬어 이 소설이 달리도록 만들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마하39의 소설을 위해 느림보 거북처럼 한쪽 한쪽을 써나갔을 작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는 언제나 옳다.


달린다. 혜나의 인생도, 사랑도. 하지만 사랑은 혼자서 달리지 못한다. 달리는 인생을 살 줄 아는 사람의 사랑만이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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