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 내 취향대로 살며 사랑하고 배우는 법
김경 지음 / 달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대학 다닐 때 읽은 김경은 그럭저럭 괜찮다 기억하는데 이번의 이 실망은 그녀의 글이 구려진 것인지 내가 나이가 든 것인지 좀 아리까리하다. 한국이라면 예전 책 다시 찾아 확인차 읽어보기라도 하겠건만. 


책의 시작은 괜찮았는데 갈수록 이게 먼소리여 싶은건 짧은 호흡의 잡지용 칼럼을 책으로 묶어 읽으니 나타나는 현상인걸까? 


책에 대한 불호의 이유는 크게 두가지인데 한 가지는 너무나 잦은 인용문. 이런 식이다.


"저기 제일 빛나는 별처럼 보이는 게 목성이랬지? 어때? 보여?"
"응, 보고 있어. 앞으로는 날씨가 사나온 날에도 가끔 목성에게 말을 걸 것 같은 기분이야."
"오~ 낭만 쩌는데?"
철학자 러셀이 그랬다. 어쨋든 좋은 삶, 행복한 삶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기보다 큰 어떤 것에 유대감을 느끼며 자신이 우주의 작은 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다 라고.


남친이랑 닭살감성 대화를 하다가도 러셀을 떠올리는 교양. 근데 닭살감성대화보다 더 긴 인용문은 닭살감성대화보다 더한 오글거림을 낳는다는 부작용이 있다. 칼럼의 소재에 따라 인용문의 분량이 달라지는데 때때로 인용문의 홍수 속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까먹게 되는 다른 종류의 부작용 또한 발생한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그 이야기에 관해서 누구는 또 무슨 이야기를 했고.. 또 그 인용문 속의 뭐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용문의 행렬. 내가 한 밑줄긋기를 보면 거의 80-90퍼센트가 바로 그 인용문들이다. 그렇게 편집샵에서 쇼핑하듯 남이 한번 거른 잘 빠진 문장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은 분명 좋은 선택일듯. 하지만 나는 별로 그런 류의 글을 안좋아한다. 거칠고 투박해도 글쓴이가 느껴지는 담백한 문장 하나가 좋다. 


불호의 두번째 이유는 이 많은 칼럼에서 이야기하는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한 제안이 너무나 가식적이어서다. 예술을 사랑하고 채식을 하고 어쩌구 저쩌구 하이패션잡지에서 늘상 이야기하는, 남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기 위한 이런 저런 제안이 나오는데 그 한계가 너무 뻔해서 시비를 걸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달까? 이런식이다. 도심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의 쿨함에 대해 예찬하다가 튀어 나오는 이런 문장들.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자전거에 돈을 쓰는 일은 백화점에서 옷이나 화장품을 사는 것과는 좀 다른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더 좋은 자전거로 바꾸겠다고 무리해서 돈을 쓰는 순간 (하다못해 안장이나 흙받이를 바꿀 때도) 죄책감은 커녕 왠지 소비자 무리 중에서 가장 고상한 부류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이패션지의 허영과 그 독자들의 우매함에 대해 한껏 비틀어 조롱하려고 쓴 문장이라면 모르겠지만, 줘도 안 할거 같은 '소비자 무리 중 가장 고상한 부류' 타이틀이라니 자전거 타려던 마음도 다시 쑥 들어가는 아주 마법같은 문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 칼럼의 결론은 우아한 린넨소재 셔츠와 팬츠가 아닌 엉덩이 다 보이는 스판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한국 아저씨들에 대한 개탄) 촛불을 드느니 보도블럭을 깨어 던지라는 소리라면 모를까 이런 극온건한 삶의 자세에 대한 제안이 21세기 대한민국에 굳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새로 출시된 안티링클 제품에 대한 리뷰와 개봉예정작 주연배우의 인터뷰 등에 뒤섞여 바자 @@호 에 실린 칼럼이었다면 실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별 기대도 안했을테니. 한 권의 책으로 보니 이게 먼 소리래.. 싶은걸지도. 그래도 주렁주렁한 인용문과 트렌디한 그때그때의 이슈에 맞추어 급조작된듯한 이런저런 제안들은 영 아니다 싶다. 담백하게, 김경이란 사람이 하고 싶은 일상의 이야기 솔직한 이야기들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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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3-07-16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경은 원래 '구렸어요'. 차라리 딴 세상 가서 노니는 이충걸이 백번 낫다는.

LAYLA 2013-07-17 12:28   좋아요 0 | URL
전 이충걸은 아예 읽지를 못해서..트윗 140자로 자아내는 오글거림을 보자면 어휴..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 내 취향대로 살며 사랑하고 배우는 법
김경 지음 / 달 / 2013년 4월
절판


원자 같은 가장 최소 단위에서 인가느이 육체를 분석하자면 우리는 사실 책상 다리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타인과 다르게 만드는가? 자아? 나는 자아라는 말이 버겁다. 영혼? 솔직히 그걸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내 몸뚱아리를 보고 나라는 인간 전부를 파악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영혼은 들을 수도 만질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맛을 볼 수도 없다. 증명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취향이다. 내 영혼의 풍향계가 그 많고 많은 티셔츠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고른다. 아무 계산도 없이 즉흥적으로. 그리고 한 인간의 인생이란 그런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톨스토이가 어딘가에 '취향이란 인간 그 자체다'라고 쓴 문장을 읽으면 우리는 그냥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다. -11쪽

사랑은 당신이 받고자 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당신이 주고자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캐서린 헵번-17쪽

새로운 것 없는 관계를 맺는 것은 타성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경험에 앞서 오는 두려움과 수줍음 때문이다. 모든 걸 감수할 준비가 된 자만이 살아 있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33쪽

가만히 생각해봤다. 가난 그 자체가 미덕일 수 없는데 왜 구태여 가난한 남자만 좋아하는 건지. 혹시 부자이거나 성공한 남자가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할 가능성이 완전 전무하다는 판단 아래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피곤한 기대와 희망에 놀아나고 싶지 않아서? 틀리지 않다. 게다가 부유한 남자는 가난한 남자만큼 개인적인 혹은 인간적인 매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돈이 있으니까, 구태여 매력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적다고 할까? -89쪽

사랑이 상대를 알아보는 것이라면, 결혼은 알아본 그 사람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더 알아가는 거다. -103쪽

"아니 검은색이 너한테 전혀 안 어울린다는 말은 아니야. 다만 검은색은 지친 사람을 더욱 지쳐 보이게 하는 것 같은데 니 일이 그렇잖아."

..그의 말에 따르면 검정은 매우 엄격한 색이라 생기 넘치는 사람이 가장 질 좋은 소재와 물 흐르듯 날렵하게 재단된 실루엣으로 입을 때만 그 어떤 색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답게 그 진가가 발휘되는 색이란다. -131쪽

"우는 여자만큼 예쁜 건 없어. 울지 않는 여자는 바보야. 현대 여자들이 그렇지. 남자 흉내를 내느라고 울지 않는 바보가 됐으니까."-151쪽

사랑하는 사람만이 창조한다.
사랑해본 사람은, 사랑을 경멸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 것을 경멸해보지 않으면, 사랑을 알지 못한다.
오직 사랑한 것을 경멸해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창조할 수 있다. -153쪽

루소는 세계의 역사가 야만에서 출발하여 유럽의 훌륭한 작업장과 도시로 진보해온 게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소박하게 살기는 했지만 우리의 요구가 매우 정확하고 단순했던 원시시대의 자연인 상태로부터 우리 영혼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이 시대의 풍요로운 생활방식들에 선망을 느끼는 상태로 퇴보해왔다고 말한다.-190쪽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복식이든 행동이든 삶의 패턴이든. 그 모든 게 멋대가리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랴.- 톰 포드 -215쪽

내 머리는 내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루소-317쪽

나는 패션지 에디터로 무려 15년 동안이나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곳을 누비며 온갖 종류의 유명인을 만나 인터뷰해온 마흔즈음의 닳고 닳은 여자였고, 그는 시골에서 6년째 은둔생활을 하며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무명의 화가로 동네에서 성범죄 사건이 나면 용의자로 지목될 수도 있을 만큼 남루하고 고독한 남자였다. 사는 곳이나 직업적 환경의 격차로 보자면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질 확률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조금 더 낮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내 취향이 그를 찾아냈다. -9쪽

당대 최고로 잘 팔리는 유명화가였지만 사교계를 좋아하지 않았고 화려한 자신의 그림과는 달리 희거나 검은 옷만 입는 이 아웃사이더(조지아 오키프)에게 어느 날 스물여섯 살의 청년 존 해밀턴이 찾아온다. 오키프가 여든다섯 살 되던 해에 와서 친구이자 연인이 되었다는 존이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자기 또래들과 제대로 된 우정도 나누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예순 살도 더 많은 사람과의 우정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344쪽

중요한 문제는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 -산도르 마라이 '열정'-379쪽

스타일을 논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의 총체성을 논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소재나 주제가 외부 문제이고 스타일이 내부 문제인 것이다. 콕토가 지적한 바 있듯이 장식적인 스타일이라는 것은 없다. 스타일이 곧 영혼일진대,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영혼을 형식이라는 몸뚱이쯤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의 겉모양새가 사실상 우리의 존재방식이다. 가면이 곧 얼굴인 것이다. -수전 손택-399쪽

저마다의 일생에는 그 일생이 동터오는 여명기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 장 그르니에 '섬'-470쪽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자전거에 돈을 쓰는 일은 백화점에서 옷이나 화장품을 사는 것과는 좀 다른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더 좋은 자전거로 바꾸겠다고 무리해서 돈을 쓰는 순간 (하다못해 안장이나 흙받이를 바굴 때도) 죄책감은 커녕 왠지 소비자 무리 중에서 가장 고상한 부류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540쪽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감히 용감한 사람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며,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에 이른다는 것. 이것이 나의 순례이며 저 별을 따라가는 것이 나의 길이라오. 아무리 희망이 없을지라도, 또한 아무리 멀리 있을지라도. -돈키호테-560쪽

작가에게 양심만큼 중요한 건 없다. 하지만 절대로 위선을 떨면 안 된다. 글로 누군가를 동요시키고 싶다면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의 저 맡바닥까지 내려가 써야만 한다. -590쪽

"저기 제일 빛나는 별처럼 보이는 게 목성이랬지? 어때? 보여?"
"응, 보고 있어. 앞으로는 날씨가 사나온 날에도 가끔 목성에게 말을 걸 것 같은 기분이야."
"오~ 낭만 쩌는데?"
철학자 러셀이 그랬다. 어쨋든 좋은 삶, 행복한 삶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기보다 큰 어떤 것에 유대감을 느끼며 자신이 우주의 작은 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다 라고. -6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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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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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을 즐길 만한 장소에 좀처럼 발을 들일 수 없을 만큼 바쁜 그가 친구에게 우타이를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권유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는 완곡히 거절했지만 내심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그런 짬이 있을까 하고 놀랐다. 그는 시간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흡사 수전노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18쪽

누이는 또 수다 떨기를 아주 좋아하는 여자여다. 그 수다에는 조금도 품위가 없었다. 그녀와 마주할 때면 겐조는 언제나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누님이니까 어쩔 수 없지'-23쪽

"실은 요전에 시마다를 만났어요."
"뭐, 어디서?"

누이는 깜짝 놀란 듯 소리쳤다. 누이는 배우지 못한 도쿄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짓는 데 익숙한 여자였다. -38쪽

외롭기는 할 거야. 그렇긴 해도 사람이 그리워 외로운 게 아니라 욕심 때문에 외로운 거지-191쪽

부부는 겐조를 귀여워했다. 하지만 그 애정 속에는 이상한 보상심리가 있었다. 돈의 힘으로 아름다운 여자를 첩으로 둔 사람이 그 여자가 좋아하는 것은 뭐든지 사주는 것처럼 시마다 부부는 애정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그저 겐조의 환심을 얻기 위해 친절을 보였다. 그들은 그 불순함 때문에 벌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211쪽

집의 정면에는 새끼줄을 대문에 여러 가닥 드리운 쌀가게인가 된장가게인가가 있었다. 겐조는 이 큰 가게와 삶을 콩을 함께 기억했다. 그는 매일 삶은 콩을 먹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새로 이사한 집에 대해서는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세월'은 그를 위해 쓸쓸한 기억들을 깨끗이 지워주었다. -223쪽

어느날 겐조가 청년 중 한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행복하겠네. 졸업하면 무엇이 될까, 무엇을 할까,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청년이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선생님 시대의 일이겠지요.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될지, 무엇을 할지 생각하지 않는 건 물론 아닙니다만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과연 겐조가 졸업한 시대와 비교하면 세상은 열 배는 더 살아가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주와 관련된 물질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따라서 청년의 대답에는 겐조의 생각과 다소 엇갈리는 점이 있었다.
"아니, 자네들은 나처럼 과거 때문에 번민하지 않으니까 행복하다는 말이야"
-230쪽

아내의 병에는 숙면이 가장 좋은 약이었다. 긴시간을 아내 곁에 앉아 걱정스럽게 그 얼굴을 바라봐야 하는 겐조는 그녀의 눈꺼풀 위로 조용히 잠이 내려올 때면 하늘에서 내리는 감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261쪽

개인으로서 노기 씨는 의리가 있고 정이 두터운 정말 훌륭한 사람이네. 그러나 총독으로서 과연 적임자였는가 묻는다면 논쟁의 여지가 상당히 있어. 개인의 덕망은 친하게 지내는 주위 사람들까지는 힘을 미칠지 모르지만, 멀리 떨어진 국민에게 이익을 주기에는 불충분하다네. 그 문제로 따지자면 역시 능력이야. 능력이 없어서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그냥 자리만 지키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어.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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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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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27쪽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줫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50쪽

여자는 자기가 먼저 유인했다가도 내치고, 또 남이 있는 곳에서는 저를 경멸하고 함부로 대하다가도 아무도 없으면 꼭 끌어안고. 죽은 것처럼 깊이 잠들고. 여자란 잠자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등등 그 밖에도 여자에 대해 갖가지 관찰을 저는 일찌감치 어릴 때부터 해왔습니다만, 여자는 똑같은 인류 같으면서도 남자하고는 완전히 다른 생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또 이 불가해하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생물들은 기묘하게도 저를 돌보아주고 싶어하는 것이었습니다. -55쪽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으니까요.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 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41쪽

저는 다케이치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그림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66쪽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을 모두 팔아치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서글플 만큼, 정말이지 티끌만큼도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서 동류로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저는 언제나 창녀들로부터 거북살스럽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감을 샀습니다. 아무런 타산도 없는 호의, 강요하지 않는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의. 저는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그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78쪽

"여자한테서 온 연애 편지로 피운 불로 물을 데워서 목욕한 남자가 있었다는군요."
"어머나, 아이 싫어. 당신이죠?"
"우유를 끓여 먹은 적은 있지요."
"그런 분하고 있다니 영광이네요. 우유 많이 드세요."-96쪽

"쓸쓸해"
저는 여자들의 천 마디, 만 마디 신세 한타노다도 그 한 마디 중얼거림에 더 공감이 갈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 여자들한테서 끝내 한번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괴상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말로 "쓸쓸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무언의 지독한 쓸쓸함을 몸 바깥에 한 폭 정도 되는 기류처럼 두르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이쪽도 그 기류에 휩싸여 제가 지니고 있는 다소 가시 돋친 음산한 기류하고 적당히 섞여서 "물속 바위에 자리 잡은 낙엽"처럼 제 몸은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105쪽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107쪽

저는 하느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안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160쪽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업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165쪽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법이지."
호리키가 태연히 그렇게 대답하기에 저는 호리키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가까운 빌딩에서 명멸하는 네온사인의 붉은빛을 받아 호리키의 얼굴은 무서운 형사처럼 위엄 있어 보였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져서 소리쳤습니다.
"죄라는 건, 자네! 그런 게 아니야"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01쪽

"아니, 이젠 필요 없어."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애에서 그때 단 한 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한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36쪽

한번은 그분이 봄 해변을 슬슬 거닐면서 문득 제 이름을 부르시더니 "자네한테는 늘 신세를 지는군. 자네의 쓸쓸함은 알고 있어. 그러나 그렇게 항상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쓸쓸할 때 쓸쓸한 얼굴을 하는 것은 위선자가 하는 짓일세. 쓸쓸하다는 것을 남이 알아줬으면 하고 일부러 표정을 꾸미는 것일 뿐이야. 진실로 신을 믿는다면 자네는 쓸쓸할 때에도 내색하지 말고 얼굴을 깨끗이 씻고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미소 짓도록 하게. 이해 못하겠나. 쓸쓸한 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어딘가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계시는 자네의 진정한 아버지가 알아주신다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렇지 않은가. 쓸쓸함은 누구한테나 있는 거라네." 라고 말씀해주셔서 저는 왠지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습니다. -257쪽

<작품해설>
...
기독교가 지배 논리가 되기 전의 서구 사회뿐 아니라 인류사에서는 동서를 막론하고 숭고한 자살에 대한 용인 내지는 존경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어왔다. 세네카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한 카토의 '의지적 죽음' 즉, 자살은 "자기 목숨으로 자유의 가치를 조명해 낸" 정의로운 죽음으로 평가되었다. 자살이 기독교에 의해 비난의 대상으로 규정되기 200년 전의 얘기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책임하에 완결짓는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성숙한 인간의 자주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자살은 용인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죽음의 미학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일본 근대 문학사를 대략 더둠어 보아도 기타무라 도코쿠, 가와카미 비잔, 아리시마 다케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다나카 히데미쓰, 미시마 유키오, 카와바타 야스나리, 에토 준 등 자살한 문인들이 많다. 미시마의 경우는 예외로 하더라도, 이들의 자살에 대한 비난은 거의 보이지 않을 뿐더러 일본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자기 논리에 따라 살다 간 존재로 간주하는 시각이 팽배하다.-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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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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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자기 자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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