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그리고 또 다른 <재즈 시대 이야기들>, 펭귄 클래식 ㅣ 펭귄클래식 11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며칠 전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다가 발견한 피츠제럴드.
...진짜 대단한 소설이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문학으로서의 깊은 자양분이 넘친다. 읽을 때마다 무엇인가 새롭게 발견할 수 있고, 새롭게 강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특성이 있다. 29세의 약관의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예리하고 공정하며 마음 따뜻하게 세상의 실상을 읽어낼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불가사의할 뿐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땐 개츠비의 순정에 가슴이 아파 재즈시대의 부와 화려함의 허구를 꿰뚫는 예리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끔씩 그의 날카로운 시각이 빛날때, 나는 그것이 개츠비의 사랑을 더욱 반짝이게 만드는 하나의 장치라고만 생각했었다.
이틀 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어쩐지 배반당한 것 같은, 그래서 숨이 가빴던 쪽은 개츠비였다. 그녀의 집 현관은 돈을 주고 산 별빛 같은 사치품들로 눈부셨다. 그녀가 그에게로 몸을 돌리고 그가 그녀의 진기하고 아름다운 입술에 키스를 하는 동안 고리버들로 만든 긴 의자가 멋지게 삐걱거렸다. 감기에 걸린 그녀는 전보다도 더 허스키한 목소리를 냈고 더욱 매력이 넘쳤다. 개츠비는 부가 가두어 보호하는 젊음과 신비, 그 많은 옷이 주는 신선함 속에서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그녀가 은처럼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빛을 발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중
하지만 다시보니 현실을 보는 예리함과 그 예리함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냉소, 거기에 더해진 따뜻한 가슴이 바로 그 자체로서 피츠제럴드임을 알겠다. 깊어지는 사랑, 깊어지는 절망, 깊어지는 한숨에 아릿한 가슴. 사랑이야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어린독자였던 나는 그 감상을 뭐라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었다. 그걸 하루키의 한 문장이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예리하고 공정하며 마음 따뜻하게 세상을 읽어내는 글'. 돈의 힘으로 젊음과 아름다움을 발하는 여인을 사랑하지만 그것도 사랑이지 않은가. 경박한 데이지에 대한 조소와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개츠비를 바라보는 온화한 시선이 얽혀든다.
단편은 어린독자를 힘들게 했던 장편에 비해 훨씬 쉽게 다가온다. 냉소면 냉소, 긍정이면 긍정, 짧은 글에 걸맞게 그냥 스트레이트로 이야기한다. 이 단편들이 모여 냉소와 따스함 쓸쓸함으로 가득차 있는 한 권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선 이러나 저러나 피츠제럴드의 책인 것이다. 이 책은 나의 마지막 자유분방한 그녀들, 판타지, 분류되지 않은 걸작 이렇게 3가지 카테고리로 단편을 분류하고 있는데 판타지에 속하는 리츠칼튼 호텔만큼 커다란 다이아몬드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이 책의 베스트로 꼽고 싶다. 리츠칼튼 호텔만큼 커다란 다이아몬드의 그녀는 자신의 노예가 폭격으로 죽어가는 걸 보며 미국사람은 개인의 자산에 대해 존중을 할 줄 모른다며 짜증을 내고 벤자민버튼의 아버지는 자신의 늙은 아들을 포대기에 싸들고 분주한 노예시장을 지나치며 차라리 자신의 아들이 흑인이길 간절히 바란다. 낭만적 재즈시대의 표피를 걷어내고서 속물적인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모든 단편이 고루 훌륭한 건 아니었다. 너무 난해한 작품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다이아몬드와 벤자민버튼만으로도 별 다섯개를 주고 싶다. 그의 작품이 전세계 독자의 가슴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20년대의 미국을 존재케 하고 있다니 그저 감탄할 뿐.
+ 뒷이야기로, 제목을 정할 때 출판사에서 Jazz Age Stories와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결국 영화개봉에 맞춰 후자를 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 재즈 시대 이야기를 타이틀로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멋졌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