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3월
구판절판


미국을 안에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면, 그저 이기고 또 이기고 승리에 휩싸이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통감하게 된다. 베트남에서는 좌절했다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 나라는 냉전에서도 이겼고 걸프전에서도 이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사람들이 행복해졌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곳 사람들은 10년 전에 비해서 훨씬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 때문에 어느정도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시점에서는 국가나 개인이나 때로는 좌절이나 패배라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든다.-27쪽

"미국에서 지내기 힘들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정말 곤란해진다. 일본에서든 미국에서든 생활의 기본적인 질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하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연령이나 입장에 따라서 사정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특히 젊었을 때 외국에서 생활하면, 여러 가지 외적 영향을 받기 쉬울 뿐더러, 마음도 쉽게 흔들리는 법이다.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젊다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에. -39쪽

..맥주를 마시는 데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앞에서는 교수들이 뉴욕타임즈만 구독하고 지방지를 구독하는 하루키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내가 본 바로는 프린스턴 대학 관계자들은 대개 수입 맥주를 즐겨 마시는 것 같다. 하이네켄이나 기네스, 벡스 등을 마셔야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미국 맥주라고 해도 보스턴의 '샤무엘 아담스'라든가 샌프란시스코의 '엔커 스팀'정도는 일반적인 브랜드가 아니라 괜찮다. 보스턴이나 샌프란시스코라는 세련된 지명도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학생들은 값싸고 탁 트이는 듯한 느낌이 나는 롤링 록을 자주 마신다. 들은 얘기에 의하면 얼마 전만 해도 동부에서는 쿠어스가 비교적 손에 넣기 어려워 그걸 마시는 게 좋아 보였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구하기가 쉬워져 상당히 평가가 떨어진 것 같다. 일본 맥주도 그다지 많지가 않아서 괜찮지만, 실제로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어쨌든, 그 정도 수준의 맥주를 마시면 문제는 없다.

-47쪽

그러나 버드와이져, 미캘롭, 밀러, 슈리츠 따위를 마시면 역시 의아해 하는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많은 모양이다. 나도 달착지근한 미국 맥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유럽 쪽 맥주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예외적으로 버드와이져는 즐겨 마신다. 좀더 드라이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기분도 들지만 객관적으로 꽤 괜찮은 맥주고 초밥에도 잘 어울린다. 계속 마셔도 질리지 않고 뭐니뭐니해도 가격이 싸다. 500엔 정도면 여섯 병들이 팩을 살 수 있다. 나쁘지 않다.

그런데 어떤 교수를 만났을 때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가 "저는 미국 맥주 중에서는 버드와이저를 비교적 자주 마시는 편입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머리를 흔들며 상당히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저도 밀워키 출신이라 미국 맥주를 칭찬해 주시니 기쁘기는 한데, 그러나 좀..."하고 말끝을 흐렸다.

말하자면 버드나 밀러처럼 텔레비전에서 열심히 광고하는 맥주는 주로 노동자 계급용이고, 대학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학구적인 사람은 좀더 고급적이고 지적인 맥주를 마셔야 한다는것이다. -47쪽

이곳에서는 이처럼 신문에서 맥주에 이르기까지 어떤 브랜드는 적절하고 어떤 브랜드는 부적절한지가 명백하게 구분 지어져 있다.
...이곳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적어도 동부의 유명한 대학에서는) 버드와이져를 좋아하고, 레이건의 팬이고, 스티븐 킹의 책은 모조리 다 읽었고, 손님이 오면 케니 로저스의 판을 트는 선생이 있다면 아마 주위 사람들이 상대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스탠퍼드 교수들은) 영화는 유럽 영화나 실험 영화를 좋아하고,음악은 클래식이나 지적인 재즈를 선호한다. 차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걸 타는 게 분위기에 맞는 느낌이 든다. 교내의 주차장에서는 번쩍거리는 새 차를 거의 볼 수 없다. 양복도 거의 새것처럼 보이지 않는 걸 선호한다. 새 옷은 한 달 정도 집 안에서 입다가 어느 정도 새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 학교에 입고 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 나는 이 대학에 오기 전까지는 그런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집에서든 밖에서든 버드 드라이 마시길 즐겼다. 요즘엔 버드와이저는 조용히 집에서 마시고 밖에 나가면 기네스나 하이네켄을 마시려고 주의하고 있다.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해 냉장고 안에는 항상 미국 -48쪽

맥주가 아닌 다른 맥주를 넣어 둔다. 인텔리가 되기도 꽤나 힘든 것 같다. 이것은 비꼬는 말이 아니다-48쪽

외국에서 지내는 것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좀 의문스럽지만-중의 하나는 자기가 단순히 한 사람의 무능력한 외국인,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첫번째로 언어 문제가 있다. 내 경우에는 외국어로 나를 제대로 표현하는 게 실제적으로 불가능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의 20-30퍼센트 밖에 상대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제대로 된 전달은커녕 전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다. 외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처음부터 차별받는 경우도 있다. 안 좋은 일도 상당히 많이 겪었다. 속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험을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차별을 받거나 이방인으로서 말도 안 되는 배척을 받기도 하는 나는 모든 걸 빼앗긴 제로 상태인, 알몸의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마조히스트는 아니지만, 약자나 무능력한 사람이나 그런 식으로 허식이나 과장이 없는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혹은 될 수밖에 없는)상황에 부닥쳐 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소중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본다. -268쪽

그 당시에는 물론 화도나고, 마음도 상하고,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속 편하게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만, 나중에 냉정하게 돌이켜 새각해 보면,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내가 일본에 있을 때 항상 느꼈던 갖가지 종류의 복잡한 고민보다는, 이렇게 개인이라는 자격에 바짝바짝 다가오는 직접적인 '어려움'쪽이 내게는 더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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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31 2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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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31 2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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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1 13: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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