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사 기차역에서 호숫가의 호텔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였다. 오래된 돌 바닥에 캐리어를 끌자 드르륵 캐리어 핸들을 잡은 손 끝으로 돌 바닥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 했다. 스위스에도 돌 바닥은 많았지만 이렇게 거친 곳은 잘 없었다. 휴양지라 호수를 바라보는 큰 호텔이 몇 개 서 있었고 다행히 우리 호텔은 기차역에서 걸어갈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식 인테리어가 깨끗하게 잘 관리된 그 호텔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짙은 밤색의 목재를 사용하고 샹들리에와 조명은 화려하게, 빛은 주홍빛에 가깝도록 어두운 듯 하며 무겁게. 바닥에는 색이 있는 대리석으로 이런저런 패턴을 만들어 화려하게 연출하고 베란다나 온실쪽은 천장에 작은 스테인드글라스도 만들어 놓았다. 모든 곳에 공을 들인 옛날식 호텔이다. 엘리베이터 마저도 문에 두터운 원목판을 덧댄 옛날식이었다. 동양인 셋이 위풍당당 아이고 힘들다며 캐리어를 끌고 들어서자 분홍피부에 은발의 노인들이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빛의 천으로 싼 로비의 의자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백인들이 휴양지로 좋아하는 곳이고 코로나 때문에 동양인 관광객이 거의 없다보니 우리는 마치 장르가 다른 회화속으로 뛰어든 기분이었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도 눈이 있으니 예쁜 것 돈 낸만큼 즐기고 가겠습니다...!


체크인을 하며 리셉셔니스트의 외모에서부터 이탈리아에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색은 금발이 아니라 짙은 갈색이고 손에는 화려한 매니큐어와 여러개의 반지, 팔찌 또한 여러개이다. 말투도 더 경쾌하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방은 가장 높은 층(그래봐야 5층이지만)의 호수를 바로 바라보는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오래되었지만 그만큼 귀한, 요즘은 만들라고 해야 만들수도 없는 곡선의 가구들이 들어가 있었고 욕실은 당연히 대리석으로 마감하였고 그리고 욕조도 들어가 있었다. 욕실 바로 옆의 벽에는 색색의 대리석을 손톱만하게 잘라 장미다발 모양을 모자이크 해놓았는데 그런 정성이 너무 좋았다. 단 한가지 조금 아쉬웠던 건 호텔의 침대와 침구인데 아무래도 요즘 유행하는 푹신푹신 침대가 아니라 다소 딱딱한 침대였고 기본 베딩이 딱 봐도 90년대식 무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그 베딩 아래로는 아주 깨끗하고 빳빳한 흰색시트를 깔아 두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입실할 땐 파랗고 그림같던 호수였지만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니 호수와 하늘의 경계가 안개속으로 숨어버렸다. 비가 더욱 거세지고 하늘에서 우루룽 소리도 들려왔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고 호텔의 바에서 고풍스러운 황동색 버켓에 받아 올려준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먹은 뒤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근 뒤 한국에서 가져온, 최근에 새롭게 출간된 싼마오의 에세이를 읽었다. 뜨거운 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싼마오의 남편인 호세가 얼마나 속 터지는 인간인지를 에세이로 읽자니 열이 올라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제는 흔한 말이지만서도 남자를 만나지 않아 인생 망친 여자는 없어도 남자를 잘못만나 인생망친 여자는 차고 넘친다. 간단한 셈만 할 줄 알아도 남자는 만나지 않고 사는게 똑똑한 여자들의 현명한 인생살이 방법이련만... 이렇게 하나마나한 생각을 하며 마른세수를 하고 욕실 쪽을 바라보니 어머, 보통의 욕실들과 달리 이 호텔의 욕실에는 세개의 다리를 가진 아주 귀여운 플라스틱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형태도 귀여웠지만 무엇보다 버터색의 색상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나는 욕조에 들어가 있는 그대로 상체를 길게 내밀어 그 의자를 쭈우욱 당겨보았다. 그리고, 뒤집어서 브랜드를 확인했다. 


GEDY made in Italy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브랜드라면 내가 여기서 하나 사서 가면 되잖아? 너무 멋진 기념품이 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마트폰으로 브랜드 이름을 검색하고 이런저런 검색어를 붙어 보았다. gedy stool, gedy trio, gedy chair... 그리 어렵지 않게 내가 본 그 의자가 나타났다. 구매할 수 있는 링크도 몇 개 찾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일반 상점 링크가 아니라 빈티지샵 링크이고 이미 그 의자들은 수백유로에 모두 판매완료된 상태라는 점이었다...! 조금 더 검색을 해보니 GEDY라는 브랜드는 이탈리아 욕실용품 브랜드인데 70-80년대에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협업하여 일부 제품들은 뉴욕의 MOMA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빈티지 콜렉터들 사이에서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의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이탈리아인가? 일부러 빈티지를 구해서 놓았을리는 없을테고 옛날에 호텔을 오픈하며 들였던 기본 플라스틱 의자가 세월이 지나 빈티지가 되어버리는 그런 곳? 


엄마는 모든것이 깨끗하게 정돈된 스위스에서 어수선한 이탈리아로 넘어오자 심란한듯도 했지만 나는 주입시키듯 계속 말했다. "엄마 여기가 더 좋지 않아? 주차도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한국이랑 더 비슷하다니까." 스위스에서는 노란선으로 된 주차라인은 개인에게 지정된 주차장을 뜻하는데 거기에 주차를 하면 강제 견인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자유롭게 주차를 할 곳은 거의 전무하고 호텔에 돈을 내고 주차를 하더라도 주차할 장소가 협소해서 많이 고생을 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한국처럼 2차선 도로 갓길에 그냥 흰색 선을 주욱 그어두고 아무나 편하게 대고 싶으면 대고 가고 싶으면 가면 된다. 극도의 P형 인간인 나는 이런 이탈리아에서 무한의 편안함을 느꼈다. 


동네에서 맛있다는 젤라또 집에 가서 젤라또를 한 컵씩 사서 먹고, 저녁은 조금 동네 외곽으로 걸어나가 구글 맵에서 평점이 좋은 피자 가게를 찾았다. 야외 테이블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앉아 술과 피자를 먹고 있었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들이 많은 걸 보자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우리도 야외 테이블에 앉자 주인 아주머니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아저씨에게 우리에게서 떨어져 저 멀리 다른 테이블의 아저씨들에게 합석하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아저씨는 조금의 반항도 없이 순순히 자리를 옮겼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동네 주민들이라 해도 애초에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유가 있을진데 합석을 하란다고 순순히 하고 또 합석을 받는 입장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그 풍경이 너무....좋았다!!!! 이탈리아어만 적힌 메뉴판과 구글맵 후기에 남겨진 사진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 동안 가게 앞 담벼락에는 공사를 마치고 퇴근하는 듯한 작업자들이 두 차 사이의 빈틈에 1톤 트럭을 신묘하게 주차하고는 야외자리의 아저씨들에게 다가가 손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고 또 합석을 했다. 우리는 피자를 먹기도 전에 그 뜨수운 분위기에 이미 감화되어 버렸다. 아 이탈리아...! 각박한 스위스에서 치인 마음이 둥글어지는 이탈리아...!


셋이서 배가 부르게 넉넉한 음식에 술까지 먹은 뒤에 나온 빌지에 찍힌 가격은 스위스에서 먹던 파스타 한그릇 값도 되지 않았다. 배를 두드리며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외쳤다. "우리 젤라또 또 먹자."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다짐했었다. 이탈리아에 닿기만 하면 1일 3젤라또를 하겠다고. 오늘 오후에 도착했으니 1일 3 젤라또는 무리더라도 식전 식후로 나누어 젤라또를 먹는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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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03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이탈리아....
맛있는게 너무 많고 1일 1 젤라토 할 수 있는 곳요. 저도 다시 가고싶은....
라일라님의 고풍스러운 호텔묘사가 너무 실감나서 저도 지금 거기에 가있는듯한 느낌이예요.

LAYLA 2022-07-04 17:3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바람돌이님 1일 1젤라또가 아니라 1일 3 젤라또 입니다...!!!ㅎㅎㅎ 젤라또 가게들 자정까지 문 열어줘서 너무 좋았어요 ^.^

transient-guest 2022-07-05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이탈리아네요! 자리가 나는 방식도 모습도 음식과 가격도. 대도시는 몰라도 외곽의 좋은 곳을 다녀오고 싶습니다

LAYLA 2022-07-10 23:49   좋아요 1 | URL
제가 뒤늦게 쓰다 보니 까먹은게 있는데 이탈리아에서부터는 조식에서 케이크가 나오더라구요. 하다못해 살구 타르트 같은거라도...! 아침부터 케이크를 많이 먹을 일은 없지만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광경이랄까요? ㅎㅎㅎ
 
포근한 밤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지나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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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돕는 마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가질 때 나의 나약함과 어려움도 잊을 수 있는 법이니까. - P18

"세상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일은 풀어 헤친 머리로 조각배나 띄워 보리."

-이백의 시의 한 구절 - P81

호세는 물속에, 깜깜한 물속에 있겠지. 지금 몇 시일까? 얼마나 오랫동안 물속에 있는 걸까? 도대체 언제 돌아올까? 뱃사람의 아내와 어머니는 한평생 어떻게 견뎠을까? 호세를 떠나자! 사랑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사랑이 없으면 내줄 것도 없다.

...호세의 아내가 되는 것이 내 인생의 최종 목표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지? 도대체 어떤 사람?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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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8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위스에서 지낸지 일주일이 지나가자 어서 다음 목적지인 이탈리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탈리아로 가서 하루에 3번 젤라또를 먹고 싶었다. 저녁으로는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푸짐하게 먹고 후식으로는 티라미수를 챙겨 먹고 싶었다. 크레마가 풍부한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싶었다. 스위스는 호텔의 간단한 조식 오믈렛마저도 간이 맞지 않았고 구글맵으로 평점이 좋은 음식점을 찾아보면 모두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케밥집이라거나 인도 음식점이라거나 이탈리아 음식점이라거나... 비싼 스위스 물가는 그에 맞는 경험을 한다면 충분히 치를 수 있다. 스위스에서만 먹을 수 있는 괜찮은 음식이라던지. 하지만 스위스에 그런 건 없다. 스위스로 이주한 외국인이 만든 자신의 나라 음식이 그나마 이 나라에선 먹을 만한 음식이란 사실이... 여행이 길어지자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마지막 스위스 목적지는 체르마트란 산골 동네였다. 정책적으로 동네에선 전기차만 탈 수 있기 때문에 외부인들은 기차가 정차하는 인근도시에 차를 주차하고 기차로 갈아탄 다음 체르마트로 들어가야 했다. 검색해보니 친환경 도시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탈 수 있는 전기차라는 건 테슬라 같은 전기차라 아니라 자기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전기차로 사이즈가 경차보다 더 작다. 사실 실제로 가 보니 워낙에 작은 골목길로 이루어진 동네라서 친환경이고 뭐고를 떠나서 일반 차량은 원래부터 다닐 수가 없는 곳이었다. 1세계 국가들이 자기들은 할 거 다해놓고 이제와서 사다리 걷어차기 하듯 친환경 어쩌구 하는 것에 반감이 있다보니 어차피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으면서 친환경 도시라고 자랑을 해야 했나?’ 싶었다. 그 와중에 동네 중심가에는 윤기나는 털의 말들이 끄는 마차가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21세기 식으로 친환경을 외치면서 동시에 동물권에 대해서는 19세기와 별 다를 바 없는 둔감한 모습에 한층 더 어쩌라구상태가 되었다.

 

이 동네도 만년설이 올라가 있는 뾰족한 산이 유명하고 겨울이 되면 스키 휴양지가 된다는데 또 날씨가 흐려 그 봉우리는 제대로 보지 못했고 간단히 동네 구경만 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호텔 정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느낌으로 파스텔 톤으로 인테리어를 해놨는데 아침을 먹으러 가서 깜짝 놀랐다. 식당이 온통 핑크빛이었다. 겨울이 되어 바깥이 모두 하얘지면 더 멋질 것 같았다. 그 호텔의 리셉션을 지키고 있던 직원은 매우 유쾌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탈리아 출신이라 했다. “내가 여기 일한지 2주 밖에 안되어서 산으로 올라가는 기차 시간표는 모르지만 동네에서 맛있는 이탈리아 음식점이 어딘지는 알아.” 알고 보니 이탈리아 국경과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이 동네에는 이탈리아에서 돈 벌러 온 노동자들이 꽤 많았다. 골목이 좁고 경사가 심한 곳이라 공사를 하기에 꽤 까다로운 곳이지만 매년 보수를 해서 새로운 관광객을 맞이해야 하니 여름인 지금 공사를 하고 있는 곳이 많았는데, 그 곳에 있는 근로자 중 많은 수가 짙은 갈색 머리칼에 긴 속눈썹을 가진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다. 산책을 하다 막다른 곳에 다다랐는데 그곳에서 시멘트 반죽을 하고 있던 한 이탈리아 청년이 다가와 손짓발짓으로 여긴 길이 없다고 알려 주었다. 국경이 맞닿아 있다고 해도 스위스 사람은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이탈리아 사람은 전혀 하지 못한다. 나중에 식당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하다가 트럭 뒷자리에 올라타 퇴근하는 현장 노동자들을 보여 시계를 확인했더니 정확히 64분이었다. 6시에 칼퇴근을 하고 페이도 좋을테니 1시간 거리의 외국으로 외노자가 되어 온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그 식당은 이탈리아인 사장이 운영하는 이탈리아 음식점이었는데 파스타 한 접시가 39프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는다고 해도 여권을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기차에서 국경을 넘는다고 알려주는 것도 아니지만 엄마는 창밖의 풍경으로 우리가 이제는 다른 나라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 나라는 좀 못사나?” 나무 토막 하나도 줄지워 세워놓는 스위스와 달리 이탈리아는 철로 옆으로 잘라둔 나무 토막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수습하지 않고 벌려 놓은 공사 자재도 보였다. 뭐라고 집어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나는 이탈리아에 온 것이 그냥 좋았다. “지금은 못 살지만 옛날에는 스위스보다 잘 살았을 걸?” 우리는 대도시로 가지 않고 중간에 있는 작은 휴양도시 stresa에 내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설산에서 겨우 한 시간 떨어졌을 뿐안데 이 곳의 산에는 만년설이 없고 멋진 암석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산이 되어 버렸다. 대신 푸르고 넓은, 작은 파도까지 치는 마치 바다 같은 호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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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6-2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맛난 음식과 와인을 즐기시면 됩니다 스위스는 원래 척박하고 가난했던 곳이라서 그런지 음식문화를 별게 없다는 말은 여러 번 들어왔습니다 ㅎㅎ 이탈리안 남자들의 신사적이만 매우 느끼한 예절은 덤으로 ㅎㅎ

LAYLA 2022-07-03 04:57   좋아요 1 | URL
이탈리아 역에 내리고 나서 남자 역무원에게 화장실이 어디냐 물었더니 ˝굿 모rrrr닝?˝ 그러고 그냥 쳐다보기만 하더군요. ㅋㅋㅋㅋㅋㅋ 아 여기는 이탈리아다. 바로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스위스를 찾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알프스 정상 투어. 스위스에 가 본 적도 없고 갈 계획도 없는 한국인 조차도 스위스의 융프라우 정상에서는 신라면을 엄청나게 비싸게 팔며, 그런데 그 비싼 신라면이 인생에 한 번은 먹어봐야 할 꿀맛이라는 과장 섞인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한 번 쯤은 들어본 적이 있다. 너무 오래전에 듣고 여러 번에 걸쳐 들어 도대체 언제 처음으로 알게 된 정보인지도 가물가물한 그 후기는 여행지에 대한 후기라기보다는 전래동화나 구전설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융프라우 정상으로 가는 곤돌라와 기차 티켓은 동생이 한국에서 예약했는데 바우처를 보니 아예 예약하는 티켓에서부터 정상에서 먹을 신라면 값이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하기 전날 미리 표를 수령하러 터미널을 찾았더니 미니컵의 신라면 이미지가 인쇄된 예약 바우처를 보고 스위스인 직원이 표를 내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이 흐렸다. 빗방울도 좀 떨어졌다. 다시 이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테니 실망할 법도 했지만 엄마는 흐린 날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며 개의치 않았다. 나 역시 장마를 일년 내내 기다리는 사람인지라 물안개가 낀 알프스 마을의 풍경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도 나름의 사치 아니겠는가? 남들이 화창한 날씨에 만년설이 낀 뽀족한 정상의 풍경을 선명히 보기 위해 찾을 때 우리는 흐리고 구름에 잠긴 융프라우를 즐긴다는 것. 애초에 산의 정상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가치관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산이 있으니 오른다는 식의 마인드를 일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이런 관광도 부모님이 원하니 하는 거지 혼자하는 여행이었다면 밑에서 바라보는 걸로 백분 만족하고 일부러 산의 정상에 올라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삶을 잘 살고 산은 산의 삶을 잘 살도록 서로 터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융프라우 정상을 올라가는 루트는 출발하는 동네에 따라 몇 가지 경로가 있는 듯 했는데 우리는 그린덴발트란 동네에서 사방이 투명한 고속 곤돌라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간 다음 산 정상까지는 급한 경사를 오르는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경로를 택했다. 비수기인데다가 이 곳을 많이 찾았을 동양인 여행자들은 급감한 상태이고(중국이 코로나로 인해 봉쇄 정책을 펴기 때문에 중국인이 거의 없음) 날씨가지 우중충하니 곤돌라를 타는 플랫폼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무한히 회전하며 들어오고 떠나는 곤돌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평생 이런 관광객을 봐 왔을 터미널 직원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영혼 없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풍경이 좋고 복지가 좋아도 인생의 지루함, 무료함, 지긋지긋함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공통이겠지. 사실 나는 이미 스위스에선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체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지긋지긋한 인생 이 작은 곳에서 도망갈 곳도 없이 맛없는 음식을 먹으며 살 수는 없었다. 역시 나는 오징어게임을 만드는 나라 출신이며 이미 삼십년 넘게 그 곳에 길들여진 인간이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 여행 다닐 땐 몸도 마음도 정신도 부드러워서 세상의 어느 곳에든 뜻만 있다면 자리 잡고 그 곳의 모양에 맞게 본을 뜨듯 내 모습을 맞춰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곤돌라에 올라타고 나서 보니 비오는 날 융프라우의 특전이 여기에 있었다. 날씨가 화창한 날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탔을 곤돌라를 회색빛 날인 오늘만큼은 전세 낸 것처럼 우리 일행 단 3명이서 탈 수 있었다. 아주 큰 대형 곤돌라였는데 엄마의 감상은 이랬다. “이 나라 사람들은 우째 이래 튼튼하게 만들어 놨노. 이 케이블 봐라. 한국에 있는거보다 훨씬 굵다. 내가 잘 모르지만 이것만 봐도 우리나라에 있는 거랑은 비교가 안된다. @@@에 새로 생긴 케이블카 처음에 만들고 고장나서 6개월 운행 안하다가 나중에 시작했잖아. 거기 가면 이것보다 더 비실한데 사람 50명씩 탄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탄 대형 곤돌라 사이즈라면 정말로 한국인 5060명쯤은 서로 밀치고 탈 수 있을거 같았고 마치 단풍같이 화려할 고어텍스 잠바들의 풍경도 눈 앞에 있는 듯 그려졌다. 곤돌라값이 비싸지만 높은 산으로 빠르게 쑥쑥 올라가는 곤돌라 안에서 그것이 안전의 값이라면 충분히 지불할만 하단 생각을 했다. 곤돌라 아래로는 끝없는 초록이 펼쳐졌고 소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곤돌라에서 내리자 공기가 싸늘했고 나는 미리 챙겨온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산악기차에 올라탔다. 급한 경사를 올라가기 때문에 역방향으로 앉으면 몸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 대단한 융프라우 정상은 미리 예상했듯이 보이는 것이 전혀 없었다. 전면 창으로 끝없이 하얀 빛만 눈이 부시게 쏟아졌다. 밖으로 나가 보니 그 하얀 안개인지 구름인지의 세상 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정상이 보이지 않으니 그 곳이 융프라우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건 눈밭에 꽂혀 있는 스위스 국기가 전부였다. 우리도 눈을 밟고 나가 남들과 똑같이 깃발의 끝을 잡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셋이서 함께 셀카도 찍고,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하는 다른 관광객의 요청에 따라 스마트폰을 가로와 세로로 현란하게 돌려가며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리고 실내로 돌아와 신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스위스 브랜드인 린트 초콜릿 샵도 있어서 나는 핫초콜렛을 먹을 수 있길 기대했지만 린트 초콜렛은 그램단위로 일반 초콜렛을 팔 뿐 핫초콜렛은 팔지 않았다. 도대체 왜 때문에 이 좋은 장사를 안하고 저에게 실망을 안겨주시나요? 여튼 신라면 맛은 좋았고 린트 초콜렛은 한국에서 더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스위스에서 살 필요는 없었다. 직장 동료들에게 돌릴 선물이 필요하다면 그냥 한국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인터넷으로 주문해놓으면 집 앞에 고이 잘 도착해있을거에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인상적이었던 건 산 정상에 명품시계를 판매하고 있었다. 몇몇 브랜드들 중 내가 아는 건 오메가 정도였는데, 인테리어가 너무 소박해서 오메가가 아니라 오메가 짝퉁 같았고 그건 세일즈 직원이 너무나 네이티브 중국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방팔방 어느 각도로 보아도 교포가 아니라 본토 중국인인 그 직원이 얼마 되지 않는 중국인 관광객에게 현란한 중국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제가 잘 모르지만 시계도 스위스가 세계에서 제일 비싼 곳이라고 하니 시계도 굳이 여기서 사는 것보다는 현대백화점에서 사는 게 더 나은거 같습니다...!

 

그렇게 누구나 다 하는 일을 따라 하는 것 같았던 일정에 한 줄기 빛같이 재미가 찾아들었다. 그건 바로. 이 터널을 처음 지을 때의 사진이라던지, 그때 당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라던지를 전시하는 코너가 실내에 있었는데 그 경로를 따라가다 보니 얼음으로 사방이 만들어진 공간이 나왔다. 겨울왕국에 나올법한 딱 그런 곳이었다. 아니, 왜 다들 융프라우에 신라면 있다는 소리는 하고 이런 멋진 얼음 궁전이 있다는 건 안 알려주신 거죠? 전혀 기대하지 않던 곳에 눈이 휘둥그래졌고 조금씩 미끄러지는 발걸음에 어릴 적 동심이 깨어나는 듯 했다. 신이 났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휴대폰을 꺼냈다. 인천 공항에서 출국할 때 로밍서비스를 처리해준 이동통신사 직원은이 이 정도면 카톡 보내고 지도 찾는 정도는 하실 수 있으세요.”라고 해서 그 뒤로 정말로 카카오톡과 구글맵만 사용하고 SNS 같은 건 하지 않고 데이터를 아껴가며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과감하게 유튜브 뮤직앱을 열어 겨울왕국 ost를 재생했다. 최대한의 볼륨으로.

 

우우우우~ 신비로운 얼음왕국의 메아리 같은 멜로디가 울려퍼지자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음악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인투디언노운을 거쳐 레리꼬에 다다르자 얼음궁전 속 관광객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내적흥분의 도가니 속에 하나가 되었다. 마음 속으론 모두 아이가 된 우리들은 허리를 숙이고 얼음 위에서 미끄러졌고 얼음상 옆에서 사진을 찍을 땐 부끄러운 포즈도 서슴치 않았다. 내가 꽃받침 포즈로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 깝치며 귀여운 척 사진을 찍었더니 그걸 보던 분홍피부 은발의 할아버지도 그대로 따라해서 귀욥기 그지 없었다 진짜...이 모든 것이 파워오브뮤직입니다...! 돌아다니다 보니 부모를 따라온 미국인 청소년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이즈 댓 유?” 나는 휴대폰이 들어 있는 소리나는 내 가방을 들어보였다. 한창 반항할 나이의 남자아이였지만 년도를 따져보면 겨울왕국과 함께 성장한 겨울왕국 키즈일테다. 그는 엄지를 척 세워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인생에서 융프라우를 본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일이고 굳이 의미를 두자면 가족과 함께봤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할테다. 하지만 레리꼬를 전세계 관광객들이 가장 듣고 싶어할 순간에 적시에 들려줬다는 점에서 나는 아주 큰 기쁨과 뿌듯함을 느꼈고 이건 인생의 추억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재미로 한 일을 넘어 거의 선행과 덕업 아닐까요? 죽어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면 나는 신에게 분명 이 일을 이야기할 것이다. 제가요, 2022년에 스위스 융프라우 갔을 때 데이터를 아끼지 않고 얼음왕국ost를 펑펑 재생해서요, 그래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고 좋은 추억을 남겨주었답니다. 생면부지 타인들에게 이렇게 귀여운 친절을 베푼 저를 천국으로 보내주지 않으시겠어요?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도 말씀드립니다. 융프라우 정상에서 인싸가 되려면 겨울왕국 ost를 재생하면 됩니다. 본인에게도 타인들에게도 너무나 기쁜 추억이 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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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5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왕국 ost를 틀고 즐거워하는 라일라님이 너무 상상돼서 막 즐겁네요. 제 상상속에서는 라일라님이 안나와 엘사처럼 막 춤추고 있어요. ㅎㅎ 저도 간다면 꼭 기억하겟습니다. 신라면만 먹지 말고 겨울왕국 ost!!!!

LAYLA 2022-06-27 17:3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제 나이가 좀 부끄럽지만 마음속으론 한 순간 엘사이고 안나였음을 부인할수가 없네요...!!! ㅎㅎㅎㅎ

transient-guest 2022-06-25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 지인으로부터 회사중역과 함께 스위스 출장가서 알프스 정상에 올라 중역의 고집으로 엄청 비싼 값의 소주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신라면이 아예 투어상품에 들어있다니 신기하네요 어쨌든 여행은 부럽습니다 젊을 땐 한국 드나들면서 다른 나라는 못 갔고 나이를 먹으니 여러 가지로 시간을 못 내니 천상 은퇴 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LAYLA 2022-06-27 17:40   좋아요 1 | URL
이웃님들 달아주신 댓글로 예전 이야기도 들으니 너무 재미있어요. 옛날엔 또 산 정상에서 쏘주도 있었군요?? 진상부릴 취객들 생각하면 엄두도 나지 않는데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긴 하겠지요. 스위스에서 한식집 한 번 갔었는데 부대찌개가 인당 5만원 정도이고 2인부터 주문 가능했던 걸로 기억해요. 소주값은 확인해보지 않은게 아쉽네요 ㅎㅎㅎ

잉크냄새 2022-06-2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라면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도 엄청 비싸게 팔더군요. 9박10일 동안 신라면에 밥 말아 먹고 트랙킹한 기억이 나네요.

LAYLA 2022-06-27 17:41   좋아요 0 | URL
농심이 애국기업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ㅎㅎㅎ 영양학적으론 특출난게 없을테지만 한국인은 확실히 한번씩은 매운 라면을 먹어줘야 힘이 나는거 같아요^.^
 

취리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알프스 구경을 위해 차를 몰았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자 금방 높은 산이 나타났다. 산을 오르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산악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었고 할리 데이비슨 같은 큰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의 럭셔리한 폭스바겐 투아렉 앞이나 뒤로 더 럭셔리한 오픈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국 사람들이 샤넬백과 서울 아파트를 정상적인 삶에서 성취해야 할 이상적인 물적 목표로 바라본다면 스위스 사람들에겐 그런 대상이 오픈카인 듯 했다여름에만 탈 수 있는 그 차를 보관할 주차장을 확보할 여유까지 감안한다면 분명 쉽지 않은 목표이고, 그래서 그런지 오픈카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중년 이상이었다.

 

촘촘하게 솟은 나무들과 뾰족한 봉우리의 암석 사이사이로 만년설이 보였다. 여름이니까 그 만년설이 녹아서 만든 수백갈래 혹은 수천갈래의 폭포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실 정상에서 본 만년설은 초라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는데, 그게 여름이기 때문인지 기후위기로 만년설 자체의 규모가 줄어들었기 때문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혹은 내가 남미에서 너무나 멋진 빙하와 만년설을 이미 보았기 때문인지도


산길을 돌고 돌고 또 돌다보면 사람들이 사는 집이 보였다. 땔감을 비슷한 사이즈로 정확히 잘라서 마당 한 켠에 야무지게 쌓아둔 집들이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살까, 엄마는 궁금해했다. “소도 키워 봐야 세 마리, 다섯 마리 저래 키워서 뭐 돈이 되노?” 정말 타당한 의문이었다. 동시에 나는 그것이 한국적인 의문이며 우리 가정다운 의문이라고 생각했다. 뭘 먹고 사노? 타인의 식성이 궁금한 게 아니라 생존의 기반을 궁금해하는 것. 실용적이지 않은 건 쓸데없고 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나는 시뻘건 얼굴로 허리를 한껏 숙이고 기를 쓰며 페달을 밟아 오르막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갔다. 저들은 왜 저런 고통을 택했을까? 저들에겐 저 고통이 오히려 즐거움이고 성취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어떤 기쁨을 선택하느냐보다 어떤 고통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고 그 선택이 그 사람을 더 잘 보여준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한 고통들을 무엇이 있었나. 계속 스쳐가는 그림같은 풍경 속에서 이제는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부터도 한참 동떨어져 그냥 태초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은 고통의 덩어리들을 떠올리자니 약간 서글퍼졌다. 하나의 위로가 있긴 했는데, 선택하지 않을 수 없어 선택한 대부분의 고통들 속에 내가 순전한 자의로 선택한 나만의 고통이 있기는 하다는 점이다. 내 고통이 검은 밤하늘이라면 내가 선택한 고통 한두가지가 그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그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몇시간을 달린 다음 체크인한 호텔은 마치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살 것 같은, 달력에 나올 것 같은 초록색 구릉과 삼각지붕의 목재 건물과 풀을 뜯는 당나귀가 오밀조밀 모여있는 동네의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생각보다 한산한 그 호텔에 우선 짐을 풀고 별채의 사우나로 가 인도인 직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 늘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지금은 하이시즌이 아니거든.” 6월 중순, 후반이면 유럽에선 그래도 바캉스 시즌 시작이 아닌가 싶어 어리둥절해진 내가 되물었다. “그럼 성수기가 언제인데? 7? 8?” 이제는 그 직원이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여기는 겨울이 성수기야. 눈이 내려야 해.” ...정말로 여름형 인간다운 착각이었다. 추운 날에는 나가는 것조차 힘들다 보니 겨울에 굳이 눈을 찾아 휴가를 떠난다는 개념 자체가 나에겐 없었던 것이다. 인도인 직원은 여름철에는 이 곳이 아니라 옆 도시의 보트타기나 자전거타기 같은 액티비티가 더 인기라는 것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 직원이 지키고 있던 사우나는 남녀 구분없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반드시 모든 옷을 다 벗고 들어가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진짜? 수영복도?” 직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이키드나는 고민에 빠졌다. 굳이 배가 나온 아저씨들의 나체를 봐야 할까? 하지만 사우나는 하고 싶다. 그렇다면 남동생을 데리고 같이 갈까? 그 어떤 옵션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 갈등하는데 인도인 직원이 그 복잡한 얼굴이 딱했는지 알려주었다. “근데, 지금은 아무도 없어.” 아니 같은 아시아권 출신이면 유교걸 마인드 뻔히 아실건데 미리 알려주셨음 좋았잖아요...!

 

아마도 겨울철에 허벅지가 터지도록 스키를 타고 내려온 손님들을 위한 것일 사우나는 생각보다 꽤 규모도 크고 설비도 본격적이었다. 3개의 사우나가 있었다. 허브향이 풍기는 건식룸, 미친 듯이 뜨거운 건식룸, 그리고 촉촉한 수증기의 습식룸. 3가지 다 개성이 있어서 모두 들어가본 다음엔 야외로 연결된 온수풀로 나갔다. 약간 헛웃음이 나왔는데, 네이키드로 나가야 하는 그 온수풀은 주차장이나 호텔 앞의 농가나 호텔 2층 테리스 어디서나 다 보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이(?)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앞 농가의 당나귀가 오솔길 바로 건너편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풀로 나가보니 물은 기분 좋은 정도로 따뜻했고 높은 알프스 산맥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가 방금 사우나를 하고 뜨거운 뺨을 스치는 기분이 정말로 좋았다. 단 한가지, 누가 어디선가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으로 마음이 불편한 것만 빼면...! 왜 이런 식으로 지은건가 살펴보았더니 외부시선을 차단하려고 벽을 세우자면 바로 저 멋진 알프스 산의 풍경이 가려지는 모양이었다. 보통의 건축물에서는 그런 경우에 사우나를 위층으로 올리든 다른 수를 찾아보겠지만 목재로 건물을 지어야 하고 여러 여건상 공사가 어려운 이 곳에선 그렇게 하지 못했던 듯 하다. 비수기의 여신이 가호를 내린 덕분일까 나는 알몸으로 따뜻한 물에서 기분좋게 떠다녔고 그동안 아무도 사우나에 들어오거나 밖에서 나를 구경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그 정도 작은 행운을 누릴 자격은 있어. 해가 넘어가고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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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6-24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에서도 오픈카 내지는 스포츠카는 종종 midage crisis의 상징인 듯 많이들 머리가 좀 벗어진 은발의 남자들이 타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혼성 full naked이라니 남자인 저 또한 꺼려집니다 ㅎㅎ

LAYLA 2022-06-24 04:32   좋아요 1 | URL
midage crisis 면 긍정적인 뜻보다는 부정적인 뜻에 가까운 건가요? 여기는 그래도 은발의 여성들도 꽤 타고 다니는 편이더라구요. 오늘 체크인한 호텔도 남녀가 사우나를 같이 사용하던데 이제는 나름 요령이 생겨 옷은 벗고 들어가고 대신 큰 타월로 적당히 가리고 사우나를 했어요. 그리고 오늘도 여자 손님 외에 남자는 보이지 않았는데 transient guest님 말씀을 듣고 보니 오히려 남자들이 혼탕에 대해 더 압박감이 커서 아예 안오는건가 싶기도 하네요 ㅋㅋㅋㅋ

transient-guest 2022-06-24 10:29   좋아요 1 | URL
중립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보통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뉘앙스가 있는 표현입니다 저 나이에 좋은 차가 무슨 소용이야 하는 정도의 젊은이의 가벼운 질투와 함께 ㅎㅎ
네 어쩌면 남자에게 더 부담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LAYLA 2022-06-25 19:21   좋아요 1 | URL
저도 어릴 적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애 낳기 전에 서른 정도 되면 오픈카 사야지~ 애 낳고 사면 무슨 소용~ 그래서 저는 결국 애도 안낳고 스포츠카도 못사고 서른을 훌쩍 넘겼군요? 껄껄 한국은 여름겨울 다 날씨가 극한이라 스포츠카 탈 수 있는 일수도 적고 공기도 미심쩍어서 오픈카에 어울리는 곳은 아닌거 같기는 해요. 지금까지 별 생각 없었는데 언젠가 오픈카가 어울리는 곳에서 한 번 타보고 싶네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탈리아에서 오픈카를 타고 남겼던 문장들이 몇 있었던거 같기도 하구요.

잉크냄새 2022-06-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고통이 검은 밤하늘이라면 내가 선택한 고통 한두가지가 그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그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알프스에서 건진 명문입니다. ㅎㅎ

LAYLA 2022-06-25 19:2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손발 오그라드네요. 힘들 땐 지지말자고 속으로 외치곤 하는데요. 별 같은 나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해서 지지 않을 힘을 키워야지, 하고 다짐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