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알프스 구경을 위해 차를 몰았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자 금방 높은 산이 나타났다. 산을 오르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산악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었고 할리 데이비슨 같은 큰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의 럭셔리한 폭스바겐 투아렉 앞이나 뒤로 더 럭셔리한 오픈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국 사람들이 샤넬백과 서울 아파트를 정상적인 삶에서 성취해야 할 이상적인 물적 목표로 바라본다면 스위스 사람들에겐 그런 대상이 오픈카인 듯 했다여름에만 탈 수 있는 그 차를 보관할 주차장을 확보할 여유까지 감안한다면 분명 쉽지 않은 목표이고, 그래서 그런지 오픈카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중년 이상이었다.

 

촘촘하게 솟은 나무들과 뾰족한 봉우리의 암석 사이사이로 만년설이 보였다. 여름이니까 그 만년설이 녹아서 만든 수백갈래 혹은 수천갈래의 폭포가 여기서도 저기서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실 정상에서 본 만년설은 초라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는데, 그게 여름이기 때문인지 기후위기로 만년설 자체의 규모가 줄어들었기 때문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혹은 내가 남미에서 너무나 멋진 빙하와 만년설을 이미 보았기 때문인지도


산길을 돌고 돌고 또 돌다보면 사람들이 사는 집이 보였다. 땔감을 비슷한 사이즈로 정확히 잘라서 마당 한 켠에 야무지게 쌓아둔 집들이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살까, 엄마는 궁금해했다. “소도 키워 봐야 세 마리, 다섯 마리 저래 키워서 뭐 돈이 되노?” 정말 타당한 의문이었다. 동시에 나는 그것이 한국적인 의문이며 우리 가정다운 의문이라고 생각했다. 뭘 먹고 사노? 타인의 식성이 궁금한 게 아니라 생존의 기반을 궁금해하는 것. 실용적이지 않은 건 쓸데없고 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나는 시뻘건 얼굴로 허리를 한껏 숙이고 기를 쓰며 페달을 밟아 오르막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갔다. 저들은 왜 저런 고통을 택했을까? 저들에겐 저 고통이 오히려 즐거움이고 성취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어떤 기쁨을 선택하느냐보다 어떤 고통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고 그 선택이 그 사람을 더 잘 보여준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한 고통들을 무엇이 있었나. 계속 스쳐가는 그림같은 풍경 속에서 이제는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부터도 한참 동떨어져 그냥 태초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은 고통의 덩어리들을 떠올리자니 약간 서글퍼졌다. 하나의 위로가 있긴 했는데, 선택하지 않을 수 없어 선택한 대부분의 고통들 속에 내가 순전한 자의로 선택한 나만의 고통이 있기는 하다는 점이다. 내 고통이 검은 밤하늘이라면 내가 선택한 고통 한두가지가 그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그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몇시간을 달린 다음 체크인한 호텔은 마치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살 것 같은, 달력에 나올 것 같은 초록색 구릉과 삼각지붕의 목재 건물과 풀을 뜯는 당나귀가 오밀조밀 모여있는 동네의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생각보다 한산한 그 호텔에 우선 짐을 풀고 별채의 사우나로 가 인도인 직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 늘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지금은 하이시즌이 아니거든.” 6월 중순, 후반이면 유럽에선 그래도 바캉스 시즌 시작이 아닌가 싶어 어리둥절해진 내가 되물었다. “그럼 성수기가 언제인데? 7? 8?” 이제는 그 직원이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여기는 겨울이 성수기야. 눈이 내려야 해.” ...정말로 여름형 인간다운 착각이었다. 추운 날에는 나가는 것조차 힘들다 보니 겨울에 굳이 눈을 찾아 휴가를 떠난다는 개념 자체가 나에겐 없었던 것이다. 인도인 직원은 여름철에는 이 곳이 아니라 옆 도시의 보트타기나 자전거타기 같은 액티비티가 더 인기라는 것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 직원이 지키고 있던 사우나는 남녀 구분없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반드시 모든 옷을 다 벗고 들어가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진짜? 수영복도?” 직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이키드나는 고민에 빠졌다. 굳이 배가 나온 아저씨들의 나체를 봐야 할까? 하지만 사우나는 하고 싶다. 그렇다면 남동생을 데리고 같이 갈까? 그 어떤 옵션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 갈등하는데 인도인 직원이 그 복잡한 얼굴이 딱했는지 알려주었다. “근데, 지금은 아무도 없어.” 아니 같은 아시아권 출신이면 유교걸 마인드 뻔히 아실건데 미리 알려주셨음 좋았잖아요...!

 

아마도 겨울철에 허벅지가 터지도록 스키를 타고 내려온 손님들을 위한 것일 사우나는 생각보다 꽤 규모도 크고 설비도 본격적이었다. 3개의 사우나가 있었다. 허브향이 풍기는 건식룸, 미친 듯이 뜨거운 건식룸, 그리고 촉촉한 수증기의 습식룸. 3가지 다 개성이 있어서 모두 들어가본 다음엔 야외로 연결된 온수풀로 나갔다. 약간 헛웃음이 나왔는데, 네이키드로 나가야 하는 그 온수풀은 주차장이나 호텔 앞의 농가나 호텔 2층 테리스 어디서나 다 보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이(?)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앞 농가의 당나귀가 오솔길 바로 건너편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풀로 나가보니 물은 기분 좋은 정도로 따뜻했고 높은 알프스 산맥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가 방금 사우나를 하고 뜨거운 뺨을 스치는 기분이 정말로 좋았다. 단 한가지, 누가 어디선가 나타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으로 마음이 불편한 것만 빼면...! 왜 이런 식으로 지은건가 살펴보았더니 외부시선을 차단하려고 벽을 세우자면 바로 저 멋진 알프스 산의 풍경이 가려지는 모양이었다. 보통의 건축물에서는 그런 경우에 사우나를 위층으로 올리든 다른 수를 찾아보겠지만 목재로 건물을 지어야 하고 여러 여건상 공사가 어려운 이 곳에선 그렇게 하지 못했던 듯 하다. 비수기의 여신이 가호를 내린 덕분일까 나는 알몸으로 따뜻한 물에서 기분좋게 떠다녔고 그동안 아무도 사우나에 들어오거나 밖에서 나를 구경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그 정도 작은 행운을 누릴 자격은 있어. 해가 넘어가고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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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6-24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에서도 오픈카 내지는 스포츠카는 종종 midage crisis의 상징인 듯 많이들 머리가 좀 벗어진 은발의 남자들이 타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혼성 full naked이라니 남자인 저 또한 꺼려집니다 ㅎㅎ

LAYLA 2022-06-24 04:32   좋아요 1 | URL
midage crisis 면 긍정적인 뜻보다는 부정적인 뜻에 가까운 건가요? 여기는 그래도 은발의 여성들도 꽤 타고 다니는 편이더라구요. 오늘 체크인한 호텔도 남녀가 사우나를 같이 사용하던데 이제는 나름 요령이 생겨 옷은 벗고 들어가고 대신 큰 타월로 적당히 가리고 사우나를 했어요. 그리고 오늘도 여자 손님 외에 남자는 보이지 않았는데 transient guest님 말씀을 듣고 보니 오히려 남자들이 혼탕에 대해 더 압박감이 커서 아예 안오는건가 싶기도 하네요 ㅋㅋㅋㅋ

transient-guest 2022-06-24 10:29   좋아요 1 | URL
중립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보통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뉘앙스가 있는 표현입니다 저 나이에 좋은 차가 무슨 소용이야 하는 정도의 젊은이의 가벼운 질투와 함께 ㅎㅎ
네 어쩌면 남자에게 더 부담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LAYLA 2022-06-25 19:21   좋아요 1 | URL
저도 어릴 적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애 낳기 전에 서른 정도 되면 오픈카 사야지~ 애 낳고 사면 무슨 소용~ 그래서 저는 결국 애도 안낳고 스포츠카도 못사고 서른을 훌쩍 넘겼군요? 껄껄 한국은 여름겨울 다 날씨가 극한이라 스포츠카 탈 수 있는 일수도 적고 공기도 미심쩍어서 오픈카에 어울리는 곳은 아닌거 같기는 해요. 지금까지 별 생각 없었는데 언젠가 오픈카가 어울리는 곳에서 한 번 타보고 싶네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탈리아에서 오픈카를 타고 남겼던 문장들이 몇 있었던거 같기도 하구요.

잉크냄새 2022-06-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고통이 검은 밤하늘이라면 내가 선택한 고통 한두가지가 그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그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알프스에서 건진 명문입니다. ㅎㅎ

LAYLA 2022-06-25 19:2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손발 오그라드네요. 힘들 땐 지지말자고 속으로 외치곤 하는데요. 별 같은 나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해서 지지 않을 힘을 키워야지, 하고 다짐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