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남동생이 중고차를 하나 샀다. 본가에서 일 하는데 필요하다 하여 서울에서 혼자 중고차 매물을 찾고 값을 치르고 탁송까지 보냈다는데 어련히 알아서 하려니 싶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본가에 내려가 보니 차가 너무 반짝이고 그럴듯하여 감탄하였다. 서울에서 타고 다니는 내 차보다도 더 멋져보였다.
"저거 얼마 준거야?"
"400만원"
내가 중고차 시세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마티즈 같은 경차도 중고가가 500은 넘는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외제 중형 세단 가격이 400만원이 가능한것일까? 동생은 말했다.
"일제 브랜드가 철수하니까 이제 AS도 안되고..."
서울에서 타고 다니는 내 차도 일본 브랜드인데 일제불매운동이 일어난 뒤로 오피스를 확 줄이더니 서초에 있던 정식 AS센터도 문을 닫았다. 내 차 브랜드보다 더 적은 규모의 브랜드이니 이제 한국에서 정식 판매는 안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요즘 웬만한 명품백 하나 사려고 해도 400만원이 넉넉한 돈이 아닌 시절에 그 차가 400만원이란건 아무리 생각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정으로(라고 쓰고 부모가 또 사고를 쳤다고 읽는다) 본가에 반쯤 거주하며 사건수습을 하게 된 나는 그 차를 타게 되었다. 남동생은 또 남동생의 차를...
짙은 흑탄색의 그 차는 생긴것도 귀엽고 색도 고급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십만키로를 달렸는데 어쩌면 흠집하나 없는 것일까? 그런 감탄의 뒤에 운명처럼 초보운전 직원이 후방주차를 하다 뒷범퍼를 긁었다. 뭐 저 정도면 나중에 카센터에 볼일 있을때 닦아내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그러고 또 몇 주 뒤에는 주차해둔 사이에 누군가가 뒷 문짝 부분을 움푹 들어가고 칠도 거칠게 벗겨지게 찍어놓고 도망갔다. 그걸 발견하고 하루이틀은 마음이 처참했는데 금전적 손해의 측면에서 보다는 야무지게 예쁜 그 차가 다쳤다는 것에 대한 상심이 더 컸던 것 같다. 이 차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제 차이다 보니 승차감을 위해 차체가 낮게 디자인 되어 있었는데 거친 시골길을 달리다 보니 가끔은 부우우우욱 차체 바닥이 긁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내가 후방 주차하는데 왜인지 센서 경고등이 울리지 않아 시멘트 벽에 뒷범퍼가 쿵 닿기도,,,
그렇게 우리집에 올 땐 청소년 같이 밝고 예쁘던 차는 거친 시골에서 백분의 쓸모를 하면서 제 나름대로 모험의 흔적을 제 몸에 새겨 이젠 제법 십만키로 이상 달린 티가 난다.
서울에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하루에 몇 천보는 걷는데 지방에선 무조건 차를 타고 움직이니 하루에 걷는 걸음이 몇 백걸음도 안될 때가 많다. 차로 달리는 거리는 적게는 십키로 많게는 백오십키로. 처음엔 몸에 익지 않던 새 차였지만 이젠 너무도 익숙해져 달리는 것도 좌회전을 하는 것도 뒤로 주차를 하는 것도 쉽고 편안하다. 그리고 그런 편안함으로 거칠것 없이 지방의 도로를 질주하며 그런 생각을 한다. 운전을 좋아한다면 지방에서 살아봐야 한다고. 지방에서 달리는 기분은 서울에서 한남대교를 건너는 기분과는 다른 차원의 해방감을 선사해준다. 뭐랄까, 밤의 한강은 아름답고 그 위를 달리는 것도 충분히 빠르지만 지방의 너르게 펼쳐진 땅 위에서 달리는 기분은 마치 말을 타고 달리는 것 같은 야성에 가까운 감각을 일깨운다.
아니 어쩌면 말이 아니라 신발인지도 모르지. 차가 없으면 몇 백미터 가기도 여의치 않은 지방에서의 삶. 일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복귀해야 할텐데 지난 반년에 가까운 시간 이 곳에서 물질로 치자면 400만원짜리 저 차가 나에게 준 기쁨과 안도와 평화, 위로가 가장 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에 큰 도움이 되어서 적시에 너무 잘 구했다 늘 감탄하긴 했지만 헤어짐을 앞두고 생각하니 실용성을 떠나 마음에도 너무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것. 울고 싶을 때 부우웅 속도를 높이고 죽고 싶을 땐 케이블 연결하여 케이팝을 최고 볼륨으로 들으며.
만원의 행복도 아니고 백만원의 행복도 아닌 나만의 고유한 400만원의 행복을 선사해준 붕붕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넌 정말 최고야. 부주의한 주인이지만 앞으로 니가 어떤 주인을 만나든 십만키로 더 달릴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