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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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간의 만남에 마침표를 찍으며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세상 만사 다 귀찮아졌다. '남자 허물 없이 다가올 날 생각하면 사랑도 귀찮아 지네',여류시인의 시구만 머리를 맴돌았다.  

그네타기처럼 수월하더니, 줄다리기처럼 고단하더니, 종내는 한쪽이 달아난 시소가 된다는- 그런 뻔한 관계의 기승전결이었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이 사람이라서 그럴수도 있겠고, 아님 이전의 관계들이 남긴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여 드디어 내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일수도 있겠다.  

깨달음은 간단했다. '아 이제 사랑을 글로 배워야겠구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이미지와 개념은 자본과 소비주의에 점철된 대중문화로부터 주입된 것이 대부분이고, 실제로 보는 사랑이란 것은(부부란 사람들) 팍팍한 한국에서의 삶과 고루한 보수주의의 틀 안에서 뒤틀리고 변형된 남녀관계인 경우가 많아서. 정말 두 사람의 인간이 만나서 평생을 아끼고 믿고 보살펴준다는 의미의 '사랑'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할 계기도 시간도 기회도 없었던것 같다. 너덜너덜의 끝에 그걸 깨달았다. 관계란건 스파크로 시작하지만 commitment로 이어져야 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 사랑이란 것을 배울 마지막 소스는 글 밖에 없다는 것을. 사랑을 글로 배우겠습니다. 자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절박함으로 구한 책이 바로 D에게 보낸 편지. 보통 내가 상대에게 바라는 미덕을 스스로 갖추고자 노력하며 싱글 생활을 만끽하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너무 지쳐버려서 인간동물여자로서의 정체성은 뒷마당에 던져버리고 수햏하는 마음으로 경건히 책을 읽었다. 글로 배우는 고상한 사랑의 끝이 동반자살이라니 좀 섬득한 감이 없지 않지만 사랑을 배우기엔 참 좋은 교재였다. 가령 이런 부분들. 

그 시절이었던가요? 아니면 그 전 혹은 그 후였던가요? 어쨌든 어느 해 여름의 일입니다. 둘이서 우리가 살던 아파트의 안뜰을 날아다니는 제비들의 공중 곡예를 감탄하며 보고 있을 때 당신이 말했습니다. "아, 저렇게 책임은 없고 자유만 있다니!" 점심 먹으면서 당신은 나에게 물었지요. "당신, 사흘째 나와 한마디도 안 한것 알아요?" 당신이 나와 살면서 차라리 혼자 사는 것보다 더 외로웠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봅니다.

그때는 내 기분이 왜 그리 침울했는지, 그 이유를 당신에게 결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부끄러웠던 것이겠지요. 당신의 흔들림 없는 의연함, 미래를 신뢰하는 당신의 믿음, 주어지는 행복의 순간을 포착할 줄 아는 당신의 능력, 그런 것이 감탄스러웠습니다. 어느 날인가 당신이 베티와 생제르맹 광장의 어느 작은 공원에서 커다란 버찌 아이스크림 하나로 점심을 때울수 있었던 것, 그것도 나는 좋았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친구가 더 많았습니다.

 

감상이란. 음 어른의 연애란 이런 거구나.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즉흥성에 기반한 관계와는 다른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달까. 20대 초중반엔 경험이 최고라 생각하여 이 남자는 이게 좋고, 저 남자는 저게 좋아 모두 걸쳐보고 일관성 따윈 없는 연애포트폴리오를 만들었던거 같다. 하지만 이렇게 너덜너덜 패대기질 몇 번 당하고 나면 인간이 왜 가지를 쳐내고 하나를 택하는지 언듯 이해가 간다. 하나하나의 만남에서 아프고 무언갈 깨닫고 다음에 조금 더 나아지고. 그러면서 포트폴리오는 간결해지고. 마음은 단단한 성인이 되어. 마침내 함께 있어 편안한 사람,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거구나. 서로를 존경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것이구나.  

혹은. 한 곳에 머무르겠다는 결심, 그것이 바로 어른이 되는 시작점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도 가난을 버찌 아이스크림 하나로 극복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이 책이 어떤 답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위안이 되었던 거 같다.   


비장한 각오에 비해 비루한 결론이지만 그랬다. 일단 좀 쉬고. 이 책은, 함께 오래 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한번 더 읽어보고 싶다. 내 마음이 저렇게 깊고 단단한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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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1-10-06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네타기처럼 수월하더니, 줄다리기처럼 고단하더니, 종내는 한쪽이 달아난 시소가 된다는-- 요 표현은 트위터에서 코스모폴리탄 에디터분이 쓴 표현인데 좋아서 기억해 뒀던 것!

2011-10-06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6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6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을품은삶 2011-10-09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겐 사랑에 관한 참고서 같은 책인데, 그것도 오래 두고 간직하고픈!,

잊히지 않는 건,
끝 부분의 다 늙어 쭈글쭈글한 앙드레가 여전히 늙은 도린을 품고 웃고 있는 모습!이에요.

뭐랄까. 일종의 환상도 심어준 측면도 있는 것이,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당신이 나를 다른 세상에 이르게 해준다는 사실."이라는 문구.

이런 사랑도 있구나,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책입니다. :)

LAYLA 2011-10-11 00:44   좋아요 0 | URL
네... 저렇게 아껴주고 싶더라구요 :)
 
다큐멘터리 미술 - 르네상스에서 21세기 아시아까지 미술의 탄생과 역사
KBS [다큐멘터리 미술] 제작팀.이성휘 지음 / 예담 / 2011년 4월
절판


프로파일 형식은 화면의 측면을 향해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람자의 시선을 외면한다. 초상화의 주인공이 관람자와 감정적인 교유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다분히 초상화의 주인공과 관람자간의 관계를 의식하고 만들어진 것이며, 실제 인물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상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고자 했다. 그래서 제작자는 주문자의 개인적인 특징을 어느 정도 표현하되 단점은 가리고 주문자의 욕구에 맞추어 미화시키고 이상화했다.-75쪽

<모나리자>는 동시대 작품들에 비해 정말 놀라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모나리자는 그림을 보는 사람을 바라보고 웃고 있다. 초상화와 관람자의 상포 작용(교감)은 여타 그림들과는 비교되는 <모나리자>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훌륭한 초상화는 모두 이와 같은 초상과 관람자 사이에 직접적인 감정의 교유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레오나르도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76쪽

영국 인구의 27퍼센트가 미술시장의 고객이라고 한다...영국에는 재미있는 이름의 아트페어가 또 하나 있다. '감당할 만한 affordable'아트페어'이다. 이 아트페어는 1년에 두 번 열리는데, 한 번 열릴때마다 100여개의 갤러리와 2만 명의 관람객이 몰린다. 이 아트페어는 미술에 대한 관심을 구매로 이끈 중요한 사례로 손꼽힌다. ..작품이 아무리 비싸도 3000파운드를 넘지 않는다.

한편 영국 정부는 미술품을 살 때 돈을 빌려주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own art with a 0%loan'이라는 제도 이다. 이 제도는 아트페어나 갤러리에서 미술품을 살 때 최대 2000파운드까지 무이자로 빌려준다. 빌린 돈은 10개월 분할 상환도 가능하다. 이 제도를 통해서 미술품 컬렉션에 대해 무지한 사람도 자신의 취향과 관심을 세련되게 다듬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248쪽

중국 미술시장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150개가 넘는 중국의 경매회사 숫자로도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은 연간 700회가 넘는 경매를 연다. 하루에 두 번골로 경매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주요 일간지인 문화보는 2006년 2월에 중국의 미술품 애호 수집가들과 투자자들은 7000만 명에 달하며 이들의 연 거래액은 200억 위안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한국 전체 인구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미술품을 수집하고 있는 것이다.-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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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30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탄과 결혼하다 -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행복한 나라
린다 리밍 지음, 송영화 옮김 / 미다스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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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소남과 카르마가 다리 위를 걸어가다가 강물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다른 문화권이라면 이야기가 이쯤에서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부탄에서는 아니다. 잠시도 쉴 겨를 없이 여프이 학생이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환생했습니다."
또 다음 학생이 잇는다.
"소남은 아름다운 새가 되었고, 카르마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과 새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내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니...정말 근사한 생각 아닌가!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낡은 사고를 끄집어내고 색다르고도 포괄적인 세계관으로 채워넣었다.-57쪽

나는 미국 남부 태생이고, 공손한 편이고, 대화를 멈추는 건 상대를 불편하게 하니까 주의하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내 고향에서는 말하고, 말하고, 가능한 한 많이 말하는 것이 훌륭한 태도로 여겨졌다. 말할 것이 있으면 말하고, 너 자신을 억제하지 마라. 말할 일이 없어도 말해라. 미국에서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표현하고, 불평하고, 권유하고, 거들먹거리기도 하고, 강의하고, 소곤소곤 떠들면서 대기를 온통 소리로 채우고는 또 큰 소리로 웃어댄다. 그것도 전혀 쉬지 않고...
부탄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부탄에서는 말수가 적은 것이 훌륭한 태도의 본보기다. 자아도취 같은 건 아예 태어날 때부터 없다.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 식사시간. 생일 잔치, 장례식, 모임에서 항상 이야기 도중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생긴다. 사실이지 말하는 시간보다 말하지 않는 시간이 더 길 정도다. 사람들은 앉아서 먹고, 마시고, 심지어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담소를 나눈다. 서양에는 존재하지 않는, 껍질 속 자기만의 삶을 살아간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 이상을 의미한다. 부탄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82쪽

몇 년 전에는 불경을 갉아먹는 종벌레로 골치를 앓은 적이 있다. 도서관 직원들은 도덕적인 딜레마에 처했다. 불경은 부처의 말슴이니 잘 지켜야 하고, 모든 생명체는 숭고한 삶을 영위하고 있으므로 살생하면 안된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이념이라 나라에서는 해충 방역도 하지 않는다. 도서관 직원들은 어떻게 했을가? 직원들은 연구를 하고 전문가와 상의한 후에 대책을 마련했다. 장뇌 같은 물질을 이용해 해충이 늘어나는 것을 막는 약초요법이었다. 즉 퇴치는 하되 죽이지는 않는다. -93쪽

미국에서는 데이트를 즐긴다. 영화를 보러 가거나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파티에 간다. 서로 화학반응이 없어도, 매력을 느끼지 못해도 수많은 대화가 오간다. 그들은 어쩌면 화학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대화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게이와 나는 전혀 달랐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109쪽

남게이와 결혼했을 때 우리는 이런저런 상황을 가정해보았다. 물론 아이를 갖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미국 여자들은 보통 마흔살이 넘으면 불임치료를 해도 아기를 갖기는 힘들다고 남게이에게 말햇다. 그 점은 분명히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부탄 여자들은 그 나이에도 쉽게 아기를 가졌고, 심지어는 오십대에 임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나이가 아미 너무 많이 들어서 임신할 수 없을 거라고 남게이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여보. 아기는 다음 생에 태어나서 가집시다."
그렇게 여운을 남겨놓는 말이 참으로 좋았다.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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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9-0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 이거 읽고 싶어졌어요. 땡스투. 오늘은 1일이니까!
:)

LAYLA 2011-09-01 19:27   좋아요 0 | URL
나 부탄앓이 하고 있어요..부탄 남자들도 멋진거 같애.. 대형마트에 가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치즈가 있을수 있냐고 놀라는 남자를 사랑할거 같아요
 
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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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의 연주 솜씨는 머스그로브 가의 두 자매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그냥 인사치레로나 자매가 잠시 쉬는 동안이 아니면, 자신의 연주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쯤은 앤도 잘 알고 있었다. 노래나 하프에 특별히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옆에 앉아 연주를 들으면서 흐뭇해하는 다정한 부모님이 계신것도 아닌 처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앤은 자신의 연주를 듣고 기뻐하는 것이 그녀 자신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새로울 건 없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정이 달랐던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열네 살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윈 이후로 누군가 그녀의 연주를 들어준다거나 정당한 평가와 진정한 감식안으로 격려해주는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었다. 음악 속에서 앤은 항상 자신이 이 세상에 혼자임을 느끼곤 했다. -65쪽

...그러나 곧 앤은 정신을 차려 감정을 다스리려 애썼다. 팔 년이었다. 모든 것을 단념한 지 어언 팔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에 묻혀 희미해져버린 줄 알았던 가슴떨림을 다시금 느끼다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팔 년 세월에 무슨 일인들 생기지 않았을까? 온갖 사건과 변화, 단절, 망각, 팔 년이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도 남을 세월이 아닌가! 과거를 잊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또 너무도 확실한 일이었다! 그 세월이 그녀가 살아온 생애 중 삼 분의 일이나 되는 시간일지라도 말이다.-82쪽

레이디 럴셀은 차분히 얘기를 듣고는 그들의 행복을 기원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스물셋의 나이에 앤 엘리엇과 같은 여자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아본 듯했던 남자가 팔 년 뒤 루이자 머스그로브 같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다니. 레이디 러셀의 마음속에선 한편 화가 나면서도 기쁘고, 또 한편 기쁘면서도 경멸스러운 복잡미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165쪽

벤윅 대령의 상태는 전에도 어렴풋이 짐작되던 바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앤은 메리와 같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에 자신을 향한 애틋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려고 메리가 전해 준 얘기 이상으로 옥측을 할 마음은 없었다. 누구든지 웬만큼 호감 가는 젊은 여자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듯 보였다면, 그녀와 똑같은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벤윅 대령은 다정다감해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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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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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이 여관에서 볼 만한 것은 가구와 집기들이다. "이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 돈을 주고 산 건 거의 없어요. 우리가 그때까지 수집해 두었던 것들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물려 주신 것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랬더니 보다시피 제법 근사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더군요."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지니고 있는 속깊은 건전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19쪽

열흘 동안 원인 모를 식중독과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멕시코 노래, 자동 소총을 든 용감한 젊은이들과 냉방 장치가 고장난 버스, 아무리 걷어차도 꼼짝달싹도 않는 코끼리처럼 뻔뻔스런 새치기 장사꾼 아줌마를 견뎌 내면서 혼자 멕시코를 여행해보고 새삼스레 절실히 느낀 것은,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피곤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내가 자주 여행을 해보고 나서 체득한 절대적인 진리다. 여행은 피곤한 것이며, 피곤하지 않은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비참함이 끝없이 이어지고, 예상했던 일이 빗나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67쪽

이상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물건을 한 가지씩 잃어버릴 때마다, 한 번 설사를 할 때마다, 시간에 늦어 한 번 버스를 놓칠 때마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새치기를 할 때마다, 내 마음속엔 멕시코란 나라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다. 독일에는 독일 나름대로의 피곤이 있고, 인도에는 인도, 뉴저지에는 뉴저지 나름대로의 피곤이 있다. 하지만 멕시코의 피곤은 멕시코에서밖에 얻을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인 것이다.

한 가지 피곤으로 다른 피곤을 상대화하는 일, 한 가지 피곤으로 다른 피곤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해 내는 일. 그것이 워크맨으로 릭넬슨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던 생각이었다.-69쪽

인디언 청년은 고향 마을에 살고 있던 때는 한 번도 굶은 적이 없었다. 가난한 마을이기는 했지만 굶주림이란 걸 그는 모르고 지냈다. 왜냐하면 그 마을에서 혹시 그가 끼니를 굶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누군가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그 목소리를 듣고 아이고 넌 배가 고픈 것 같구나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으렴 하고 말하면서 밥을 먹여 주는 것이었다. 그 안녕하세요?하는 말소리만 듣고도 상대방이 밥을 먹었는지 굶었는지, 건강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까지 금세 다 알아차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이심전심의 분위기에서 그는 자라났던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 나온 지 아직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는 그 인디오 청년은 배가 고프면 이 사람 저 사람을 향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밥을 먹여 주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그래, 잘 있었지? 하고 인사를 받아 줄 뿐이었다. 그는 배가 고파 소리가 나오지 않을때까지 안녕하세요?하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어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겨우 여기서는 아무도 말의 울림이란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102쪽

알아차렸다.-102쪽

태평양 전쟁에서는 실로 2백만이 넘는 병사들이 전사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거의 의미 없는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밀페된 조직 속에서 이름도 없는 소모품으로서 아주 운 나쁘게 비합리적으로 죽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비합리적인 죽음','운 나쁜' 혹은 '비합리성'을 우리는 '아시아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인은 전쟁을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하게 되었다.(좀 더 정확히 말하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우리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파국으로 이끈 그 비합리성을 전근대적인 형태로 타파하려고 노력해왔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비효율성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강요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외과수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단순히 그것을 물리적으로 배제했다. 그 결과 우리는 분명히 근대 시민 사화의 이념에 따른 합리적인 세계에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합리성은 사회에 압도적인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역시 지금까지도 많은 사회적 국면에서 우리들이 이름도 없는 소모품으로서 조용히 평화적으로 말살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129쪽

의혹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는 일본이라는 평화로운 민주국가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으며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표면을 한 껍질 벗겨 내면, 그곳에는 역시 이전과 비슷한 밀페된 국가 조직이나 이념 같은 것이 면면히 숨쉬고 있지는 않을까?-129쪽

지도라는 것은 아주 매혹적인 것이다. 지도에는 아직 자기가 가 본 적이 없는 지역이 펼쳐져 있다. 조용히, 말없이, 그러나 도전적으로. 들어 본 적도 없는 지명이 허다하다. 건너 본 적이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본 적 없는 높은 산맥이 줄을 잇고 있다. 호수나 하구는 하나같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변변치 않은 사막조차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보낸다. 지도를 펴놓고 자기가 아직 가 본적 없는 곳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마녀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처럼 마음이 자꾸만 끌려 들어간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느껴진다. 아드레날린이 굶주린 들개처럼 혈관 속을 뛰어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피부가 새로운 바람의 산들거림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문득 떠나고 싶다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 일단 그곳에 가면, 인생을 마구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중대한 일과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든다.(실제로는 그런 일은 매우 상징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지만).-180쪽

이 세상에는 고향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양쪽을 구분짓는 기준은 대부분의 경우 일종의 운명의 힘인데, 그곳은 고향에 대한 상념의 비중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204쪽

30여 년이나 지난 이야기- 그렇다. 나는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그만큼 자꾸만 고독해져 간다.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고독에 익숙해지기 위한 하나의 연속된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불만을 토로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불만을 털어놓더라도 도대체 누구를 향해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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