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의 연주 솜씨는 머스그로브 가의 두 자매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그냥 인사치레로나 자매가 잠시 쉬는 동안이 아니면, 자신의 연주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쯤은 앤도 잘 알고 있었다. 노래나 하프에 특별히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옆에 앉아 연주를 들으면서 흐뭇해하는 다정한 부모님이 계신것도 아닌 처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앤은 자신의 연주를 듣고 기뻐하는 것이 그녀 자신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새로울 건 없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정이 달랐던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열네 살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윈 이후로 누군가 그녀의 연주를 들어준다거나 정당한 평가와 진정한 감식안으로 격려해주는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었다. 음악 속에서 앤은 항상 자신이 이 세상에 혼자임을 느끼곤 했다. -65쪽
...그러나 곧 앤은 정신을 차려 감정을 다스리려 애썼다. 팔 년이었다. 모든 것을 단념한 지 어언 팔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에 묻혀 희미해져버린 줄 알았던 가슴떨림을 다시금 느끼다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팔 년 세월에 무슨 일인들 생기지 않았을까? 온갖 사건과 변화, 단절, 망각, 팔 년이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도 남을 세월이 아닌가! 과거를 잊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또 너무도 확실한 일이었다! 그 세월이 그녀가 살아온 생애 중 삼 분의 일이나 되는 시간일지라도 말이다.-82쪽
레이디 럴셀은 차분히 얘기를 듣고는 그들의 행복을 기원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스물셋의 나이에 앤 엘리엇과 같은 여자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아본 듯했던 남자가 팔 년 뒤 루이자 머스그로브 같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다니. 레이디 러셀의 마음속에선 한편 화가 나면서도 기쁘고, 또 한편 기쁘면서도 경멸스러운 복잡미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165쪽
벤윅 대령의 상태는 전에도 어렴풋이 짐작되던 바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앤은 메리와 같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에 자신을 향한 애틋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려고 메리가 전해 준 얘기 이상으로 옥측을 할 마음은 없었다. 누구든지 웬만큼 호감 가는 젊은 여자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듯 보였다면, 그녀와 똑같은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벤윅 대령은 다정다감해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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