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여행법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구판절판


...또 한 가지 이 여관에서 볼 만한 것은 가구와 집기들이다. "이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 돈을 주고 산 건 거의 없어요. 우리가 그때까지 수집해 두었던 것들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물려 주신 것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랬더니 보다시피 제법 근사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더군요."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지니고 있는 속깊은 건전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19쪽

열흘 동안 원인 모를 식중독과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멕시코 노래, 자동 소총을 든 용감한 젊은이들과 냉방 장치가 고장난 버스, 아무리 걷어차도 꼼짝달싹도 않는 코끼리처럼 뻔뻔스런 새치기 장사꾼 아줌마를 견뎌 내면서 혼자 멕시코를 여행해보고 새삼스레 절실히 느낀 것은,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피곤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내가 자주 여행을 해보고 나서 체득한 절대적인 진리다. 여행은 피곤한 것이며, 피곤하지 않은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비참함이 끝없이 이어지고, 예상했던 일이 빗나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67쪽

이상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물건을 한 가지씩 잃어버릴 때마다, 한 번 설사를 할 때마다, 시간에 늦어 한 번 버스를 놓칠 때마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새치기를 할 때마다, 내 마음속엔 멕시코란 나라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다. 독일에는 독일 나름대로의 피곤이 있고, 인도에는 인도, 뉴저지에는 뉴저지 나름대로의 피곤이 있다. 하지만 멕시코의 피곤은 멕시코에서밖에 얻을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인 것이다.

한 가지 피곤으로 다른 피곤을 상대화하는 일, 한 가지 피곤으로 다른 피곤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해 내는 일. 그것이 워크맨으로 릭넬슨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던 생각이었다.-69쪽

인디언 청년은 고향 마을에 살고 있던 때는 한 번도 굶은 적이 없었다. 가난한 마을이기는 했지만 굶주림이란 걸 그는 모르고 지냈다. 왜냐하면 그 마을에서 혹시 그가 끼니를 굶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누군가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그 목소리를 듣고 아이고 넌 배가 고픈 것 같구나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으렴 하고 말하면서 밥을 먹여 주는 것이었다. 그 안녕하세요?하는 말소리만 듣고도 상대방이 밥을 먹었는지 굶었는지, 건강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까지 금세 다 알아차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이심전심의 분위기에서 그는 자라났던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 나온 지 아직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는 그 인디오 청년은 배가 고프면 이 사람 저 사람을 향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밥을 먹여 주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그래, 잘 있었지? 하고 인사를 받아 줄 뿐이었다. 그는 배가 고파 소리가 나오지 않을때까지 안녕하세요?하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어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겨우 여기서는 아무도 말의 울림이란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102쪽

알아차렸다.-102쪽

태평양 전쟁에서는 실로 2백만이 넘는 병사들이 전사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거의 의미 없는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밀페된 조직 속에서 이름도 없는 소모품으로서 아주 운 나쁘게 비합리적으로 죽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비합리적인 죽음','운 나쁜' 혹은 '비합리성'을 우리는 '아시아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인은 전쟁을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하게 되었다.(좀 더 정확히 말하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우리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파국으로 이끈 그 비합리성을 전근대적인 형태로 타파하려고 노력해왔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비효율성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강요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외과수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단순히 그것을 물리적으로 배제했다. 그 결과 우리는 분명히 근대 시민 사화의 이념에 따른 합리적인 세계에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합리성은 사회에 압도적인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역시 지금까지도 많은 사회적 국면에서 우리들이 이름도 없는 소모품으로서 조용히 평화적으로 말살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129쪽

의혹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는 일본이라는 평화로운 민주국가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으며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표면을 한 껍질 벗겨 내면, 그곳에는 역시 이전과 비슷한 밀페된 국가 조직이나 이념 같은 것이 면면히 숨쉬고 있지는 않을까?-129쪽

지도라는 것은 아주 매혹적인 것이다. 지도에는 아직 자기가 가 본 적이 없는 지역이 펼쳐져 있다. 조용히, 말없이, 그러나 도전적으로. 들어 본 적도 없는 지명이 허다하다. 건너 본 적이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본 적 없는 높은 산맥이 줄을 잇고 있다. 호수나 하구는 하나같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변변치 않은 사막조차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보낸다. 지도를 펴놓고 자기가 아직 가 본적 없는 곳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마녀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처럼 마음이 자꾸만 끌려 들어간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느껴진다. 아드레날린이 굶주린 들개처럼 혈관 속을 뛰어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피부가 새로운 바람의 산들거림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문득 떠나고 싶다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 일단 그곳에 가면, 인생을 마구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중대한 일과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든다.(실제로는 그런 일은 매우 상징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지만).-180쪽

이 세상에는 고향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양쪽을 구분짓는 기준은 대부분의 경우 일종의 운명의 힘인데, 그곳은 고향에 대한 상념의 비중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204쪽

30여 년이나 지난 이야기- 그렇다. 나는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그만큼 자꾸만 고독해져 간다.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고독에 익숙해지기 위한 하나의 연속된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불만을 토로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불만을 털어놓더라도 도대체 누구를 향해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21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