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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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간의 만남에 마침표를 찍으며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세상 만사 다 귀찮아졌다. '남자 허물 없이 다가올 날 생각하면 사랑도 귀찮아 지네',여류시인의 시구만 머리를 맴돌았다.  

그네타기처럼 수월하더니, 줄다리기처럼 고단하더니, 종내는 한쪽이 달아난 시소가 된다는- 그런 뻔한 관계의 기승전결이었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이 사람이라서 그럴수도 있겠고, 아님 이전의 관계들이 남긴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여 드디어 내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일수도 있겠다.  

깨달음은 간단했다. '아 이제 사랑을 글로 배워야겠구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이미지와 개념은 자본과 소비주의에 점철된 대중문화로부터 주입된 것이 대부분이고, 실제로 보는 사랑이란 것은(부부란 사람들) 팍팍한 한국에서의 삶과 고루한 보수주의의 틀 안에서 뒤틀리고 변형된 남녀관계인 경우가 많아서. 정말 두 사람의 인간이 만나서 평생을 아끼고 믿고 보살펴준다는 의미의 '사랑'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할 계기도 시간도 기회도 없었던것 같다. 너덜너덜의 끝에 그걸 깨달았다. 관계란건 스파크로 시작하지만 commitment로 이어져야 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 사랑이란 것을 배울 마지막 소스는 글 밖에 없다는 것을. 사랑을 글로 배우겠습니다. 자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절박함으로 구한 책이 바로 D에게 보낸 편지. 보통 내가 상대에게 바라는 미덕을 스스로 갖추고자 노력하며 싱글 생활을 만끽하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너무 지쳐버려서 인간동물여자로서의 정체성은 뒷마당에 던져버리고 수햏하는 마음으로 경건히 책을 읽었다. 글로 배우는 고상한 사랑의 끝이 동반자살이라니 좀 섬득한 감이 없지 않지만 사랑을 배우기엔 참 좋은 교재였다. 가령 이런 부분들. 

그 시절이었던가요? 아니면 그 전 혹은 그 후였던가요? 어쨌든 어느 해 여름의 일입니다. 둘이서 우리가 살던 아파트의 안뜰을 날아다니는 제비들의 공중 곡예를 감탄하며 보고 있을 때 당신이 말했습니다. "아, 저렇게 책임은 없고 자유만 있다니!" 점심 먹으면서 당신은 나에게 물었지요. "당신, 사흘째 나와 한마디도 안 한것 알아요?" 당신이 나와 살면서 차라리 혼자 사는 것보다 더 외로웠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봅니다.

그때는 내 기분이 왜 그리 침울했는지, 그 이유를 당신에게 결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부끄러웠던 것이겠지요. 당신의 흔들림 없는 의연함, 미래를 신뢰하는 당신의 믿음, 주어지는 행복의 순간을 포착할 줄 아는 당신의 능력, 그런 것이 감탄스러웠습니다. 어느 날인가 당신이 베티와 생제르맹 광장의 어느 작은 공원에서 커다란 버찌 아이스크림 하나로 점심을 때울수 있었던 것, 그것도 나는 좋았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친구가 더 많았습니다.

 

감상이란. 음 어른의 연애란 이런 거구나.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즉흥성에 기반한 관계와는 다른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달까. 20대 초중반엔 경험이 최고라 생각하여 이 남자는 이게 좋고, 저 남자는 저게 좋아 모두 걸쳐보고 일관성 따윈 없는 연애포트폴리오를 만들었던거 같다. 하지만 이렇게 너덜너덜 패대기질 몇 번 당하고 나면 인간이 왜 가지를 쳐내고 하나를 택하는지 언듯 이해가 간다. 하나하나의 만남에서 아프고 무언갈 깨닫고 다음에 조금 더 나아지고. 그러면서 포트폴리오는 간결해지고. 마음은 단단한 성인이 되어. 마침내 함께 있어 편안한 사람,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거구나. 서로를 존경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것이구나.  

혹은. 한 곳에 머무르겠다는 결심, 그것이 바로 어른이 되는 시작점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도 가난을 버찌 아이스크림 하나로 극복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이 책이 어떤 답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위안이 되었던 거 같다.   


비장한 각오에 비해 비루한 결론이지만 그랬다. 일단 좀 쉬고. 이 책은, 함께 오래 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한번 더 읽어보고 싶다. 내 마음이 저렇게 깊고 단단한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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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1-10-06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네타기처럼 수월하더니, 줄다리기처럼 고단하더니, 종내는 한쪽이 달아난 시소가 된다는-- 요 표현은 트위터에서 코스모폴리탄 에디터분이 쓴 표현인데 좋아서 기억해 뒀던 것!

2011-10-06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6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6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을품은삶 2011-10-09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겐 사랑에 관한 참고서 같은 책인데, 그것도 오래 두고 간직하고픈!,

잊히지 않는 건,
끝 부분의 다 늙어 쭈글쭈글한 앙드레가 여전히 늙은 도린을 품고 웃고 있는 모습!이에요.

뭐랄까. 일종의 환상도 심어준 측면도 있는 것이,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당신이 나를 다른 세상에 이르게 해준다는 사실."이라는 문구.

이런 사랑도 있구나,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책입니다. :)

LAYLA 2011-10-11 00:44   좋아요 0 | URL
네... 저렇게 아껴주고 싶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