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사에서 볼 건 호수위에 떠 있는 섬이다. 크게 3개의 섬이 있는데 우리는 일정상 제일 큰 하나의 섬만 볼 수 있었다. 유럽역사에 해박한 것도 아니고 사전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라 발길 닿는대로 대충 구글맵 후기를 보는데 isola bella 라는 섬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궁전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타고 그 섬으로 향했다. 사실 뭍에서 배로 가면 타자 마자 내리는 수준으로 아주 가깝긴 하지만 그 곳에 궁전이 있다니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아무리 옛날이라도 신하들을 불러들이고 나라를 다스리려면 육지에 궁전이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티켓을 끊고 이게 뭣이냐 하고 들어가 본 궁전은... 시작부터 말이 나오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압도했다. 우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난간부터 폭이 30센티미터는 족히 될 듯한 붉은 대리석을 곡선으로 깎아 만들었는데, 대리석을 판으로 만들어 붙이는 건 많이 보았어도 이렇게 덩어리로 난간을 만든 건 처음 봤다.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가 진짜 옛날에는 스위스보다 잘 살았는갑네. 이것만 봐도 알겠다." 


이어지는 동선으로 침실과 연회장과 초상화를 전시하는 방 등이 이어졌고 모든 방이 그저 탄성이 나올 뿐이었다. 창문이 있는 방에서는 당연히 아름다운 호수의 정경이 펼쳐진다. 베르사유 궁전을 볼 때도 화려하네 돈이 많았네 정도의 감상이었지 이렇게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지는 않았는데 왜 그럴까 이유를 생각해보니 이 곳은 사용하는 색채나 질감이 아주 부드럽다. 연한 분홍색이나 하늘색으로 각 방의 벽을 칠하고 화려함은 필요한 곳에 적절히 포인트로 더할 뿐 여기저기 금실이나 보석장식 같은 것을 꽝꽝꽝 덕지덕지 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급스럽지 않다거나 돈을 아낀 기색이 느껴지는 건 전혀 아니다. 방마다 대리석 조각을 아낌없이 쏟아부터 각각 다른 디자인으로 만든 한숨이 나올만큼 아름다운 바닥이라던지, 방의 컨셉에 따라 사용한 하늘색 대리석이라던지(하늘색 대리석이 존재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진으로 찍으니 연한 회색으로 나와 그 색감이 전혀 전해지지도 않았다) 이 곳에 살았을 누군가의 초상화를 싸고 있는 액자의 섬세함에서 돈을 아낄 생각따위는 일도 없다는게 잘 느껴지기 때문이다. 규모가 베르사유보다 아담하다면 아담한 궁전인 것도 좋다. 누군가의 취향이 드러날 수 있는 정도의 규모, 돌아보는 사람도 지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을 할 기력이 남아있을 수 있는 정도의 규모. 


궁전을 다 보고 나면 거대한 계단식 정원이 나타난다. 정원에는 하얀색 공작 두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보기엔 좋았는데 나는 공작이 그렇게나 경망스럽게 꽤액꽤액 우는 새라는 건 또 처음 알았네. 예쁜거 봐서 좋았고 저녁에 호텔에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궁전이 왕족의 궁전이 아니라 상인의 궁전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1300년대에 은행업으로 크게 부를 쌓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암석으로 이루어진 섬 위에 짓기 시작한 궁전이고 결국에는 짓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 후대에 걸쳐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왕족이 아니라 상인의 궁전이라는것마저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이때쯤부터 엄마는 유튜브로 스스로 자신이 방문한 장소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코로나 불경기때 자신이 사는 곳의 유적에 대한 소개 동영상을 올린 여행 가이드 분들이 꽤 많았다. 


스트레사 다음 목적지는 베니스. 스트레사는 스위스 국경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작은 동네라 정신없는 이탈리아의 느낌은 없었는데 베니스로 가는 기차로 갈아 타기 위해 밀라노 역에 내렸더니 난리 부르쓰 이탈리아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명확한 동선이랄게 없어서 넘쳐나는 관광객들은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거대하게 뒤얽히며 제각각 지 갈길로 서로를 피하며 가고 있고 기차 플랫폼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게이트 같은게 있긴 하지만 그냥 넘으려면 넘을 수 있고(역무원인지 경찰인지도 보기만 할 뿐 제지하지 않음) 철도청 유니폼을 입은 직원에게 다가가 "화장실이 어디에요?" 물었더니 웃으며 "굿 모rrrrrr닝?" 하고 그냥 웃으며 쳐다보고 있고 (정색했더니 자기도 정색하며 손가락으로 가르쳐 줌) 기차시간에 늦을까 달려서 화장실로 갔더니 1유로를 넣어야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이라 맨손을 간 나는 그냥 다시 기차로 돌아와야 하는...그냥 대환장 파티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엄마와 동생과 시간이 촉박한 기차에 올라 캐리어를 짐칸에 넣다가 내가 동생에게 물었다. "니 배낭은?" 잠시 멍한 표정의 동생이 답했다. "앞에 기차에 놔두고 왔네." 


우리 기차의 출발시간은 10여분 남짓 남았고 동생은 바로 뛰어나가 우리가 내린 기차를 향해 뛰어갔지만.... 눈 앞에 보이는 역무원에게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더니 고개를 갸웃하길래 나는 이탈리아어와 비슷한 스페인어 단어라도 소지질렀다. "볼사!!!(가방) 엔 오트로 트렌!!! (다른 기차에!!!)" "오!" 역무원은 그제서야 눈을 크게 뜨고 비극을 마주친 듯한 격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의 손목시계를 탁탁 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너희 지금 기차 타야 하고 그 가방을 찾을 방법이란 없다는 뜻인거 같았다.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세상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가방을 잃어버렸다? 찾을 길은 영원히 없으리라. "여권은 가지고 있지?" 다행히 동생의 여권은 배낭이 아니라 앞으로 매는 작은 가방에 들어 있었고 우리는 빠르게 결정, 혹은 포기했다. "일단 이거 타고 가자."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정신없고 어수선하고 약간은 남루한 듯도 하면서 또 분명히 풍요로운 땅인 그들의 땅을 배경으로. 



하단부가 바로 그 부내 넘치는 대리석 난간



그저 완벽한 응접실




저 바닥이 자세히 보면 참 예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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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7-05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나 유산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이라는 것이 함께 어우러져야 하니 아무곳에서나 볼 수 있는 기술문명의 구경거리하고 다르네요

바람돌이 2022-07-0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드디어 사진이.... 궁전이 진짜 아름답네요.
이탈리아에서 가방을 두고 내렸다. 아마 가도 없을거예요. 그냥 빨리 포기하는게 맘 편한.... 저희도 예전에 일행이 택시에 배낭을 두고 내렷는데 뭐 포기햇어요. 그런데 친구가 진짜 하루씩 지날 때마다 그 가방에 뭐가 있었는지 한개씩 한개씩 생각해내는데 정말 장난 아니게 뭐가 많았더라구요. 돈으로 치면 금액도 장난 아닌..... 그래서 내내 속쓰려 햇었어요. ㅠㅠ
 

스트레사 기차역에서 호숫가의 호텔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였다. 오래된 돌 바닥에 캐리어를 끌자 드르륵 캐리어 핸들을 잡은 손 끝으로 돌 바닥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 했다. 스위스에도 돌 바닥은 많았지만 이렇게 거친 곳은 잘 없었다. 휴양지라 호수를 바라보는 큰 호텔이 몇 개 서 있었고 다행히 우리 호텔은 기차역에서 걸어갈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식 인테리어가 깨끗하게 잘 관리된 그 호텔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짙은 밤색의 목재를 사용하고 샹들리에와 조명은 화려하게, 빛은 주홍빛에 가깝도록 어두운 듯 하며 무겁게. 바닥에는 색이 있는 대리석으로 이런저런 패턴을 만들어 화려하게 연출하고 베란다나 온실쪽은 천장에 작은 스테인드글라스도 만들어 놓았다. 모든 곳에 공을 들인 옛날식 호텔이다. 엘리베이터 마저도 문에 두터운 원목판을 덧댄 옛날식이었다. 동양인 셋이 위풍당당 아이고 힘들다며 캐리어를 끌고 들어서자 분홍피부에 은발의 노인들이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빛의 천으로 싼 로비의 의자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백인들이 휴양지로 좋아하는 곳이고 코로나 때문에 동양인 관광객이 거의 없다보니 우리는 마치 장르가 다른 회화속으로 뛰어든 기분이었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도 눈이 있으니 예쁜 것 돈 낸만큼 즐기고 가겠습니다...!


체크인을 하며 리셉셔니스트의 외모에서부터 이탈리아에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색은 금발이 아니라 짙은 갈색이고 손에는 화려한 매니큐어와 여러개의 반지, 팔찌 또한 여러개이다. 말투도 더 경쾌하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방은 가장 높은 층(그래봐야 5층이지만)의 호수를 바로 바라보는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오래되었지만 그만큼 귀한, 요즘은 만들라고 해야 만들수도 없는 곡선의 가구들이 들어가 있었고 욕실은 당연히 대리석으로 마감하였고 그리고 욕조도 들어가 있었다. 욕실 바로 옆의 벽에는 색색의 대리석을 손톱만하게 잘라 장미다발 모양을 모자이크 해놓았는데 그런 정성이 너무 좋았다. 단 한가지 조금 아쉬웠던 건 호텔의 침대와 침구인데 아무래도 요즘 유행하는 푹신푹신 침대가 아니라 다소 딱딱한 침대였고 기본 베딩이 딱 봐도 90년대식 무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그 베딩 아래로는 아주 깨끗하고 빳빳한 흰색시트를 깔아 두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입실할 땐 파랗고 그림같던 호수였지만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니 호수와 하늘의 경계가 안개속으로 숨어버렸다. 비가 더욱 거세지고 하늘에서 우루룽 소리도 들려왔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고 호텔의 바에서 고풍스러운 황동색 버켓에 받아 올려준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먹은 뒤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근 뒤 한국에서 가져온, 최근에 새롭게 출간된 싼마오의 에세이를 읽었다. 뜨거운 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싼마오의 남편인 호세가 얼마나 속 터지는 인간인지를 에세이로 읽자니 열이 올라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제는 흔한 말이지만서도 남자를 만나지 않아 인생 망친 여자는 없어도 남자를 잘못만나 인생망친 여자는 차고 넘친다. 간단한 셈만 할 줄 알아도 남자는 만나지 않고 사는게 똑똑한 여자들의 현명한 인생살이 방법이련만... 이렇게 하나마나한 생각을 하며 마른세수를 하고 욕실 쪽을 바라보니 어머, 보통의 욕실들과 달리 이 호텔의 욕실에는 세개의 다리를 가진 아주 귀여운 플라스틱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형태도 귀여웠지만 무엇보다 버터색의 색상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나는 욕조에 들어가 있는 그대로 상체를 길게 내밀어 그 의자를 쭈우욱 당겨보았다. 그리고, 뒤집어서 브랜드를 확인했다. 


GEDY made in Italy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브랜드라면 내가 여기서 하나 사서 가면 되잖아? 너무 멋진 기념품이 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마트폰으로 브랜드 이름을 검색하고 이런저런 검색어를 붙어 보았다. gedy stool, gedy trio, gedy chair... 그리 어렵지 않게 내가 본 그 의자가 나타났다. 구매할 수 있는 링크도 몇 개 찾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일반 상점 링크가 아니라 빈티지샵 링크이고 이미 그 의자들은 수백유로에 모두 판매완료된 상태라는 점이었다...! 조금 더 검색을 해보니 GEDY라는 브랜드는 이탈리아 욕실용품 브랜드인데 70-80년대에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협업하여 일부 제품들은 뉴욕의 MOMA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빈티지 콜렉터들 사이에서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의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이탈리아인가? 일부러 빈티지를 구해서 놓았을리는 없을테고 옛날에 호텔을 오픈하며 들였던 기본 플라스틱 의자가 세월이 지나 빈티지가 되어버리는 그런 곳? 


엄마는 모든것이 깨끗하게 정돈된 스위스에서 어수선한 이탈리아로 넘어오자 심란한듯도 했지만 나는 주입시키듯 계속 말했다. "엄마 여기가 더 좋지 않아? 주차도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한국이랑 더 비슷하다니까." 스위스에서는 노란선으로 된 주차라인은 개인에게 지정된 주차장을 뜻하는데 거기에 주차를 하면 강제 견인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자유롭게 주차를 할 곳은 거의 전무하고 호텔에 돈을 내고 주차를 하더라도 주차할 장소가 협소해서 많이 고생을 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한국처럼 2차선 도로 갓길에 그냥 흰색 선을 주욱 그어두고 아무나 편하게 대고 싶으면 대고 가고 싶으면 가면 된다. 극도의 P형 인간인 나는 이런 이탈리아에서 무한의 편안함을 느꼈다. 


동네에서 맛있다는 젤라또 집에 가서 젤라또를 한 컵씩 사서 먹고, 저녁은 조금 동네 외곽으로 걸어나가 구글 맵에서 평점이 좋은 피자 가게를 찾았다. 야외 테이블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앉아 술과 피자를 먹고 있었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들이 많은 걸 보자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우리도 야외 테이블에 앉자 주인 아주머니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아저씨에게 우리에게서 떨어져 저 멀리 다른 테이블의 아저씨들에게 합석하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아저씨는 조금의 반항도 없이 순순히 자리를 옮겼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동네 주민들이라 해도 애초에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유가 있을진데 합석을 하란다고 순순히 하고 또 합석을 받는 입장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그 풍경이 너무....좋았다!!!! 이탈리아어만 적힌 메뉴판과 구글맵 후기에 남겨진 사진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 동안 가게 앞 담벼락에는 공사를 마치고 퇴근하는 듯한 작업자들이 두 차 사이의 빈틈에 1톤 트럭을 신묘하게 주차하고는 야외자리의 아저씨들에게 다가가 손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고 또 합석을 했다. 우리는 피자를 먹기도 전에 그 뜨수운 분위기에 이미 감화되어 버렸다. 아 이탈리아...! 각박한 스위스에서 치인 마음이 둥글어지는 이탈리아...!


셋이서 배가 부르게 넉넉한 음식에 술까지 먹은 뒤에 나온 빌지에 찍힌 가격은 스위스에서 먹던 파스타 한그릇 값도 되지 않았다. 배를 두드리며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외쳤다. "우리 젤라또 또 먹자."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다짐했었다. 이탈리아에 닿기만 하면 1일 3젤라또를 하겠다고. 오늘 오후에 도착했으니 1일 3 젤라또는 무리더라도 식전 식후로 나누어 젤라또를 먹는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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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03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이탈리아....
맛있는게 너무 많고 1일 1 젤라토 할 수 있는 곳요. 저도 다시 가고싶은....
라일라님의 고풍스러운 호텔묘사가 너무 실감나서 저도 지금 거기에 가있는듯한 느낌이예요.

LAYLA 2022-07-04 17:3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바람돌이님 1일 1젤라또가 아니라 1일 3 젤라또 입니다...!!!ㅎㅎㅎ 젤라또 가게들 자정까지 문 열어줘서 너무 좋았어요 ^.^

transient-guest 2022-07-05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이탈리아네요! 자리가 나는 방식도 모습도 음식과 가격도. 대도시는 몰라도 외곽의 좋은 곳을 다녀오고 싶습니다

LAYLA 2022-07-10 23:49   좋아요 1 | URL
제가 뒤늦게 쓰다 보니 까먹은게 있는데 이탈리아에서부터는 조식에서 케이크가 나오더라구요. 하다못해 살구 타르트 같은거라도...! 아침부터 케이크를 많이 먹을 일은 없지만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광경이랄까요? ㅎㅎㅎ
 
포근한 밤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지나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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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돕는 마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가질 때 나의 나약함과 어려움도 잊을 수 있는 법이니까. - P18

"세상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일은 풀어 헤친 머리로 조각배나 띄워 보리."

-이백의 시의 한 구절 - P81

호세는 물속에, 깜깜한 물속에 있겠지. 지금 몇 시일까? 얼마나 오랫동안 물속에 있는 걸까? 도대체 언제 돌아올까? 뱃사람의 아내와 어머니는 한평생 어떻게 견뎠을까? 호세를 떠나자! 사랑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사랑이 없으면 내줄 것도 없다.

...호세의 아내가 되는 것이 내 인생의 최종 목표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지? 도대체 어떤 사람?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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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8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위스에서 지낸지 일주일이 지나가자 어서 다음 목적지인 이탈리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탈리아로 가서 하루에 3번 젤라또를 먹고 싶었다. 저녁으로는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푸짐하게 먹고 후식으로는 티라미수를 챙겨 먹고 싶었다. 크레마가 풍부한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싶었다. 스위스는 호텔의 간단한 조식 오믈렛마저도 간이 맞지 않았고 구글맵으로 평점이 좋은 음식점을 찾아보면 모두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케밥집이라거나 인도 음식점이라거나 이탈리아 음식점이라거나... 비싼 스위스 물가는 그에 맞는 경험을 한다면 충분히 치를 수 있다. 스위스에서만 먹을 수 있는 괜찮은 음식이라던지. 하지만 스위스에 그런 건 없다. 스위스로 이주한 외국인이 만든 자신의 나라 음식이 그나마 이 나라에선 먹을 만한 음식이란 사실이... 여행이 길어지자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마지막 스위스 목적지는 체르마트란 산골 동네였다. 정책적으로 동네에선 전기차만 탈 수 있기 때문에 외부인들은 기차가 정차하는 인근도시에 차를 주차하고 기차로 갈아탄 다음 체르마트로 들어가야 했다. 검색해보니 친환경 도시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동네에서 탈 수 있는 전기차라는 건 테슬라 같은 전기차라 아니라 자기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전기차로 사이즈가 경차보다 더 작다. 사실 실제로 가 보니 워낙에 작은 골목길로 이루어진 동네라서 친환경이고 뭐고를 떠나서 일반 차량은 원래부터 다닐 수가 없는 곳이었다. 1세계 국가들이 자기들은 할 거 다해놓고 이제와서 사다리 걷어차기 하듯 친환경 어쩌구 하는 것에 반감이 있다보니 어차피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으면서 친환경 도시라고 자랑을 해야 했나?’ 싶었다. 그 와중에 동네 중심가에는 윤기나는 털의 말들이 끄는 마차가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21세기 식으로 친환경을 외치면서 동시에 동물권에 대해서는 19세기와 별 다를 바 없는 둔감한 모습에 한층 더 어쩌라구상태가 되었다.

 

이 동네도 만년설이 올라가 있는 뾰족한 산이 유명하고 겨울이 되면 스키 휴양지가 된다는데 또 날씨가 흐려 그 봉우리는 제대로 보지 못했고 간단히 동네 구경만 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호텔 정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느낌으로 파스텔 톤으로 인테리어를 해놨는데 아침을 먹으러 가서 깜짝 놀랐다. 식당이 온통 핑크빛이었다. 겨울이 되어 바깥이 모두 하얘지면 더 멋질 것 같았다. 그 호텔의 리셉션을 지키고 있던 직원은 매우 유쾌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탈리아 출신이라 했다. “내가 여기 일한지 2주 밖에 안되어서 산으로 올라가는 기차 시간표는 모르지만 동네에서 맛있는 이탈리아 음식점이 어딘지는 알아.” 알고 보니 이탈리아 국경과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이 동네에는 이탈리아에서 돈 벌러 온 노동자들이 꽤 많았다. 골목이 좁고 경사가 심한 곳이라 공사를 하기에 꽤 까다로운 곳이지만 매년 보수를 해서 새로운 관광객을 맞이해야 하니 여름인 지금 공사를 하고 있는 곳이 많았는데, 그 곳에 있는 근로자 중 많은 수가 짙은 갈색 머리칼에 긴 속눈썹을 가진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다. 산책을 하다 막다른 곳에 다다랐는데 그곳에서 시멘트 반죽을 하고 있던 한 이탈리아 청년이 다가와 손짓발짓으로 여긴 길이 없다고 알려 주었다. 국경이 맞닿아 있다고 해도 스위스 사람은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이탈리아 사람은 전혀 하지 못한다. 나중에 식당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하다가 트럭 뒷자리에 올라타 퇴근하는 현장 노동자들을 보여 시계를 확인했더니 정확히 64분이었다. 6시에 칼퇴근을 하고 페이도 좋을테니 1시간 거리의 외국으로 외노자가 되어 온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그 식당은 이탈리아인 사장이 운영하는 이탈리아 음식점이었는데 파스타 한 접시가 39프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는다고 해도 여권을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기차에서 국경을 넘는다고 알려주는 것도 아니지만 엄마는 창밖의 풍경으로 우리가 이제는 다른 나라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 나라는 좀 못사나?” 나무 토막 하나도 줄지워 세워놓는 스위스와 달리 이탈리아는 철로 옆으로 잘라둔 나무 토막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수습하지 않고 벌려 놓은 공사 자재도 보였다. 뭐라고 집어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나는 이탈리아에 온 것이 그냥 좋았다. “지금은 못 살지만 옛날에는 스위스보다 잘 살았을 걸?” 우리는 대도시로 가지 않고 중간에 있는 작은 휴양도시 stresa에 내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설산에서 겨우 한 시간 떨어졌을 뿐안데 이 곳의 산에는 만년설이 없고 멋진 암석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산이 되어 버렸다. 대신 푸르고 넓은, 작은 파도까지 치는 마치 바다 같은 호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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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6-2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맛난 음식과 와인을 즐기시면 됩니다 스위스는 원래 척박하고 가난했던 곳이라서 그런지 음식문화를 별게 없다는 말은 여러 번 들어왔습니다 ㅎㅎ 이탈리안 남자들의 신사적이만 매우 느끼한 예절은 덤으로 ㅎㅎ

LAYLA 2022-07-03 04:57   좋아요 1 | URL
이탈리아 역에 내리고 나서 남자 역무원에게 화장실이 어디냐 물었더니 ˝굿 모rrrr닝?˝ 그러고 그냥 쳐다보기만 하더군요. ㅋㅋㅋㅋㅋㅋ 아 여기는 이탈리아다. 바로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스위스를 찾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알프스 정상 투어. 스위스에 가 본 적도 없고 갈 계획도 없는 한국인 조차도 스위스의 융프라우 정상에서는 신라면을 엄청나게 비싸게 팔며, 그런데 그 비싼 신라면이 인생에 한 번은 먹어봐야 할 꿀맛이라는 과장 섞인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한 번 쯤은 들어본 적이 있다. 너무 오래전에 듣고 여러 번에 걸쳐 들어 도대체 언제 처음으로 알게 된 정보인지도 가물가물한 그 후기는 여행지에 대한 후기라기보다는 전래동화나 구전설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융프라우 정상으로 가는 곤돌라와 기차 티켓은 동생이 한국에서 예약했는데 바우처를 보니 아예 예약하는 티켓에서부터 정상에서 먹을 신라면 값이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하기 전날 미리 표를 수령하러 터미널을 찾았더니 미니컵의 신라면 이미지가 인쇄된 예약 바우처를 보고 스위스인 직원이 표를 내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이 흐렸다. 빗방울도 좀 떨어졌다. 다시 이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테니 실망할 법도 했지만 엄마는 흐린 날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며 개의치 않았다. 나 역시 장마를 일년 내내 기다리는 사람인지라 물안개가 낀 알프스 마을의 풍경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도 나름의 사치 아니겠는가? 남들이 화창한 날씨에 만년설이 낀 뽀족한 정상의 풍경을 선명히 보기 위해 찾을 때 우리는 흐리고 구름에 잠긴 융프라우를 즐긴다는 것. 애초에 산의 정상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가치관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산이 있으니 오른다는 식의 마인드를 일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이런 관광도 부모님이 원하니 하는 거지 혼자하는 여행이었다면 밑에서 바라보는 걸로 백분 만족하고 일부러 산의 정상에 올라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삶을 잘 살고 산은 산의 삶을 잘 살도록 서로 터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융프라우 정상을 올라가는 루트는 출발하는 동네에 따라 몇 가지 경로가 있는 듯 했는데 우리는 그린덴발트란 동네에서 사방이 투명한 고속 곤돌라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올라간 다음 산 정상까지는 급한 경사를 오르는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경로를 택했다. 비수기인데다가 이 곳을 많이 찾았을 동양인 여행자들은 급감한 상태이고(중국이 코로나로 인해 봉쇄 정책을 펴기 때문에 중국인이 거의 없음) 날씨가지 우중충하니 곤돌라를 타는 플랫폼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무한히 회전하며 들어오고 떠나는 곤돌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평생 이런 관광객을 봐 왔을 터미널 직원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영혼 없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풍경이 좋고 복지가 좋아도 인생의 지루함, 무료함, 지긋지긋함 그런 것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공통이겠지. 사실 나는 이미 스위스에선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체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지긋지긋한 인생 이 작은 곳에서 도망갈 곳도 없이 맛없는 음식을 먹으며 살 수는 없었다. 역시 나는 오징어게임을 만드는 나라 출신이며 이미 삼십년 넘게 그 곳에 길들여진 인간이었던 것이다. 어릴 적에 여행 다닐 땐 몸도 마음도 정신도 부드러워서 세상의 어느 곳에든 뜻만 있다면 자리 잡고 그 곳의 모양에 맞게 본을 뜨듯 내 모습을 맞춰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곤돌라에 올라타고 나서 보니 비오는 날 융프라우의 특전이 여기에 있었다. 날씨가 화창한 날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탔을 곤돌라를 회색빛 날인 오늘만큼은 전세 낸 것처럼 우리 일행 단 3명이서 탈 수 있었다. 아주 큰 대형 곤돌라였는데 엄마의 감상은 이랬다. “이 나라 사람들은 우째 이래 튼튼하게 만들어 놨노. 이 케이블 봐라. 한국에 있는거보다 훨씬 굵다. 내가 잘 모르지만 이것만 봐도 우리나라에 있는 거랑은 비교가 안된다. @@@에 새로 생긴 케이블카 처음에 만들고 고장나서 6개월 운행 안하다가 나중에 시작했잖아. 거기 가면 이것보다 더 비실한데 사람 50명씩 탄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탄 대형 곤돌라 사이즈라면 정말로 한국인 5060명쯤은 서로 밀치고 탈 수 있을거 같았고 마치 단풍같이 화려할 고어텍스 잠바들의 풍경도 눈 앞에 있는 듯 그려졌다. 곤돌라값이 비싸지만 높은 산으로 빠르게 쑥쑥 올라가는 곤돌라 안에서 그것이 안전의 값이라면 충분히 지불할만 하단 생각을 했다. 곤돌라 아래로는 끝없는 초록이 펼쳐졌고 소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곤돌라에서 내리자 공기가 싸늘했고 나는 미리 챙겨온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산악기차에 올라탔다. 급한 경사를 올라가기 때문에 역방향으로 앉으면 몸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 대단한 융프라우 정상은 미리 예상했듯이 보이는 것이 전혀 없었다. 전면 창으로 끝없이 하얀 빛만 눈이 부시게 쏟아졌다. 밖으로 나가 보니 그 하얀 안개인지 구름인지의 세상 속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정상이 보이지 않으니 그 곳이 융프라우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건 눈밭에 꽂혀 있는 스위스 국기가 전부였다. 우리도 눈을 밟고 나가 남들과 똑같이 깃발의 끝을 잡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셋이서 함께 셀카도 찍고,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하는 다른 관광객의 요청에 따라 스마트폰을 가로와 세로로 현란하게 돌려가며 사진도 찍어주었다. 그리고 실내로 돌아와 신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스위스 브랜드인 린트 초콜릿 샵도 있어서 나는 핫초콜렛을 먹을 수 있길 기대했지만 린트 초콜렛은 그램단위로 일반 초콜렛을 팔 뿐 핫초콜렛은 팔지 않았다. 도대체 왜 때문에 이 좋은 장사를 안하고 저에게 실망을 안겨주시나요? 여튼 신라면 맛은 좋았고 린트 초콜렛은 한국에서 더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스위스에서 살 필요는 없었다. 직장 동료들에게 돌릴 선물이 필요하다면 그냥 한국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인터넷으로 주문해놓으면 집 앞에 고이 잘 도착해있을거에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인상적이었던 건 산 정상에 명품시계를 판매하고 있었다. 몇몇 브랜드들 중 내가 아는 건 오메가 정도였는데, 인테리어가 너무 소박해서 오메가가 아니라 오메가 짝퉁 같았고 그건 세일즈 직원이 너무나 네이티브 중국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방팔방 어느 각도로 보아도 교포가 아니라 본토 중국인인 그 직원이 얼마 되지 않는 중국인 관광객에게 현란한 중국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제가 잘 모르지만 시계도 스위스가 세계에서 제일 비싼 곳이라고 하니 시계도 굳이 여기서 사는 것보다는 현대백화점에서 사는 게 더 나은거 같습니다...!

 

그렇게 누구나 다 하는 일을 따라 하는 것 같았던 일정에 한 줄기 빛같이 재미가 찾아들었다. 그건 바로. 이 터널을 처음 지을 때의 사진이라던지, 그때 당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라던지를 전시하는 코너가 실내에 있었는데 그 경로를 따라가다 보니 얼음으로 사방이 만들어진 공간이 나왔다. 겨울왕국에 나올법한 딱 그런 곳이었다. 아니, 왜 다들 융프라우에 신라면 있다는 소리는 하고 이런 멋진 얼음 궁전이 있다는 건 안 알려주신 거죠? 전혀 기대하지 않던 곳에 눈이 휘둥그래졌고 조금씩 미끄러지는 발걸음에 어릴 적 동심이 깨어나는 듯 했다. 신이 났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휴대폰을 꺼냈다. 인천 공항에서 출국할 때 로밍서비스를 처리해준 이동통신사 직원은이 이 정도면 카톡 보내고 지도 찾는 정도는 하실 수 있으세요.”라고 해서 그 뒤로 정말로 카카오톡과 구글맵만 사용하고 SNS 같은 건 하지 않고 데이터를 아껴가며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과감하게 유튜브 뮤직앱을 열어 겨울왕국 ost를 재생했다. 최대한의 볼륨으로.

 

우우우우~ 신비로운 얼음왕국의 메아리 같은 멜로디가 울려퍼지자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음악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인투디언노운을 거쳐 레리꼬에 다다르자 얼음궁전 속 관광객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내적흥분의 도가니 속에 하나가 되었다. 마음 속으론 모두 아이가 된 우리들은 허리를 숙이고 얼음 위에서 미끄러졌고 얼음상 옆에서 사진을 찍을 땐 부끄러운 포즈도 서슴치 않았다. 내가 꽃받침 포즈로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 깝치며 귀여운 척 사진을 찍었더니 그걸 보던 분홍피부 은발의 할아버지도 그대로 따라해서 귀욥기 그지 없었다 진짜...이 모든 것이 파워오브뮤직입니다...! 돌아다니다 보니 부모를 따라온 미국인 청소년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이즈 댓 유?” 나는 휴대폰이 들어 있는 소리나는 내 가방을 들어보였다. 한창 반항할 나이의 남자아이였지만 년도를 따져보면 겨울왕국과 함께 성장한 겨울왕국 키즈일테다. 그는 엄지를 척 세워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인생에서 융프라우를 본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일이고 굳이 의미를 두자면 가족과 함께봤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할테다. 하지만 레리꼬를 전세계 관광객들이 가장 듣고 싶어할 순간에 적시에 들려줬다는 점에서 나는 아주 큰 기쁨과 뿌듯함을 느꼈고 이건 인생의 추억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재미로 한 일을 넘어 거의 선행과 덕업 아닐까요? 죽어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면 나는 신에게 분명 이 일을 이야기할 것이다. 제가요, 2022년에 스위스 융프라우 갔을 때 데이터를 아끼지 않고 얼음왕국ost를 펑펑 재생해서요, 그래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었고 좋은 추억을 남겨주었답니다. 생면부지 타인들에게 이렇게 귀여운 친절을 베푼 저를 천국으로 보내주지 않으시겠어요?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도 말씀드립니다. 융프라우 정상에서 인싸가 되려면 겨울왕국 ost를 재생하면 됩니다. 본인에게도 타인들에게도 너무나 기쁜 추억이 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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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25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왕국 ost를 틀고 즐거워하는 라일라님이 너무 상상돼서 막 즐겁네요. 제 상상속에서는 라일라님이 안나와 엘사처럼 막 춤추고 있어요. ㅎㅎ 저도 간다면 꼭 기억하겟습니다. 신라면만 먹지 말고 겨울왕국 ost!!!!

LAYLA 2022-06-27 17:3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제 나이가 좀 부끄럽지만 마음속으론 한 순간 엘사이고 안나였음을 부인할수가 없네요...!!! ㅎㅎㅎㅎ

transient-guest 2022-06-25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 지인으로부터 회사중역과 함께 스위스 출장가서 알프스 정상에 올라 중역의 고집으로 엄청 비싼 값의 소주를 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신라면이 아예 투어상품에 들어있다니 신기하네요 어쨌든 여행은 부럽습니다 젊을 땐 한국 드나들면서 다른 나라는 못 갔고 나이를 먹으니 여러 가지로 시간을 못 내니 천상 은퇴 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LAYLA 2022-06-27 17:40   좋아요 1 | URL
이웃님들 달아주신 댓글로 예전 이야기도 들으니 너무 재미있어요. 옛날엔 또 산 정상에서 쏘주도 있었군요?? 진상부릴 취객들 생각하면 엄두도 나지 않는데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긴 하겠지요. 스위스에서 한식집 한 번 갔었는데 부대찌개가 인당 5만원 정도이고 2인부터 주문 가능했던 걸로 기억해요. 소주값은 확인해보지 않은게 아쉽네요 ㅎㅎㅎ

잉크냄새 2022-06-2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라면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도 엄청 비싸게 팔더군요. 9박10일 동안 신라면에 밥 말아 먹고 트랙킹한 기억이 나네요.

LAYLA 2022-06-27 17:41   좋아요 0 | URL
농심이 애국기업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ㅎㅎㅎ 영양학적으론 특출난게 없을테지만 한국인은 확실히 한번씩은 매운 라면을 먹어줘야 힘이 나는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