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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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는 다시 눈을 치떠 그녀를 더듬듯이 살폈다. 남자란 어째서 결국은 다들 똑같은 걸까. 그녀는 자신이 이 오쓰에게 다른 학생들과 다른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남성들에게 없는 것. 나무의 꿈, 물의 꿈, 불의 꿈, 사막의 꿈.
그녀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오쓰에게 건넸다. 건넬 때 일부러 휘청거리며 걸려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오쓰는 미쓰코의 몸을 떠받칠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겁쟁이잖아." 하고 그녀가 말했을 때, 비로소 그는 오래도록 억누르고 있던 욕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듯 그녀의 몸에 와락 달라붙었다. 그가 내쉬는 숨결에는 학생 식당에서 먹었을 게 분명한 카레 냄새가 났다. 미쓰코는 자기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기다려요."
미쓰코는 그를 두 손으로 밀쳐 냈다.
"샤워 정도는 해야잖아."
-69쪽

썩은 무화과의 악취가 나는 일요일이 그 후로 세 번 이어졌다. 오쓰의 머리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미쓰코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푹 빠져 엎디어 있는 건 오쓰일 뿐, 그녀는 방에 걸린 달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 무언가를 찾아서 어디론가 가고 싶다. 확실하고 뿌리 있는 것을. 인생을 붙잡고 싶다. -73쪽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는 건) 그때, 미쓰코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종잡을 수 없는 나의 충동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야)
대학 시절에 몸속을 마냥 치달았던, 자신을 더럽히고 싶다는 그 충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그녀는 사회인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 그런 파괴적인 무엇을 자극할 만한 것, 예를 들면 바그너의 오페라나 루동의 그림 같은 것들과는 통 인연이 없고 무관심한 남자와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서, 남편과 비슷한 남녀들 속에 자신을 시체처럼 묻어 버리고 싶다고 진심으로 진지하게 바랐다. -77쪽

이소베가 몸을 일으킨 뒤에도 그네는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저 홀로 흔들렸다. 마치 그의 아내가 죽고서도 그 말이 남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듯이. 우리들 일생에서는 무엇인가 끝났어도,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171쪽

저는 고독하기 때문에 필시 고독할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싶습니다. 한심하게도, 저는 고독합니다 .......-185쪽

사 년이나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귀국했으나 고생한 보람 하나 없이 어느 대학의 연구실에도 빈자리가 없다며 거절당한 그는, 여행사 안내원이라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불만을 마음 깊숙이 쌓아 두고 있었다. 솔직히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코스모스 사의 의뢰로 안내해야만 하는 일본인 관광객을 경멸했다. 오로지 감사해하며 불교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노인네들, 히피나 다름없는 방랑을 즐기는 여대생들, 그리고 누마다처럼 인도의 자연 속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남자. 그들이 일본에 갖고 돌아가는 토산품은 늘 뻔하다. 실크 사리, 백단 목걸이, 상감 세공, 스타 루비나 에머랄드 같은 보석, 은 팔찌. 예전에 미국이나 유럽의 관광객들이 휩쓸고 간 가게에서 지금은 일본인이 어정버정대는 모습을, 에나미는 가게 입구에 서서 경멸의 눈길로 보았다. -197쪽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갖춰 입고 복도로 나왔다. 오전 3시 경으로, 캄캄했다. 복도 벽에 갖다 붙인 듯이 도마뱀붙이 한 마리가 찰싹 달라붙어 있다. 밖에서는 벌레들이 홍수처럼 울어 대고 있었다.-223쪽

가트 근처의 길에는 오늘도 아이들 외에 손가락을 죄다 잃은 문둥병 환자들이 늘어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없는 그 손과,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천으로 짓무른 피부를 감춘 남녀가 누마다와 미쓰코에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똑같은 사람인데." 참다못한 누마다가 울먹이다시피 말했다. "이 사람들도....똑같은 인간인데."
미쓰코는 응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관광객인 우리가 무얼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마음 깊숙이 들려온다. 산조나 누마다 같은 값싼 동정은 미쓰코를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사랑의 흉내 짓은 더 이상 원치 않았다. 진정한 사랑만을 원했다. -243쪽

복수나 증오는 정치 세계뿐만이 아니라, 종교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은 집단이 생기면 대립이 발생하고 분쟁이 벌어지고,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모략이 시작된다. 전쟁과 전후의 일본 속에서 살아온 이소베는 그러한 인간이나 집단을 싫증나게 보았다. 정의라는 단어도 지겹도록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마음 깊숙이,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막연한 기분이 늘 남았다. 그래서 회사 내에서 그는 사근사근하게 누구와도 잘 지냈지만, 어느 한 사람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저마다 마음 깊숙이 자신만의 에고이즘이 있고, 그 에고이즘을 호도하기 위해 선의니 옳은 방향이니 주장하는 것을 실생활에서 납득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걸 인정하고서, 풍파 일지 않는 인생을 꾸려왔다. 하지만 외톨이가 된 지금, 이소베는 생활과 인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겨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생활을 위해 사귄 타인은 많았어도, 인생에서 정말로 마음이 통한 사람은 단 두 사람, 어머니와 아내밖에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85쪽

사람은 사랑보다도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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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 내 취향대로 살며 사랑하고 배우는 법
김경 지음 / 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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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같은 가장 최소 단위에서 인가느이 육체를 분석하자면 우리는 사실 책상 다리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타인과 다르게 만드는가? 자아? 나는 자아라는 말이 버겁다. 영혼? 솔직히 그걸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내 몸뚱아리를 보고 나라는 인간 전부를 파악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영혼은 들을 수도 만질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맛을 볼 수도 없다. 증명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취향이다. 내 영혼의 풍향계가 그 많고 많은 티셔츠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고른다. 아무 계산도 없이 즉흥적으로. 그리고 한 인간의 인생이란 그런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톨스토이가 어딘가에 '취향이란 인간 그 자체다'라고 쓴 문장을 읽으면 우리는 그냥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다. -11쪽

사랑은 당신이 받고자 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당신이 주고자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캐서린 헵번-17쪽

새로운 것 없는 관계를 맺는 것은 타성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경험에 앞서 오는 두려움과 수줍음 때문이다. 모든 걸 감수할 준비가 된 자만이 살아 있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33쪽

가만히 생각해봤다. 가난 그 자체가 미덕일 수 없는데 왜 구태여 가난한 남자만 좋아하는 건지. 혹시 부자이거나 성공한 남자가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할 가능성이 완전 전무하다는 판단 아래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피곤한 기대와 희망에 놀아나고 싶지 않아서? 틀리지 않다. 게다가 부유한 남자는 가난한 남자만큼 개인적인 혹은 인간적인 매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돈이 있으니까, 구태여 매력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적다고 할까? -89쪽

사랑이 상대를 알아보는 것이라면, 결혼은 알아본 그 사람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더 알아가는 거다. -103쪽

"아니 검은색이 너한테 전혀 안 어울린다는 말은 아니야. 다만 검은색은 지친 사람을 더욱 지쳐 보이게 하는 것 같은데 니 일이 그렇잖아."

..그의 말에 따르면 검정은 매우 엄격한 색이라 생기 넘치는 사람이 가장 질 좋은 소재와 물 흐르듯 날렵하게 재단된 실루엣으로 입을 때만 그 어떤 색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답게 그 진가가 발휘되는 색이란다. -131쪽

"우는 여자만큼 예쁜 건 없어. 울지 않는 여자는 바보야. 현대 여자들이 그렇지. 남자 흉내를 내느라고 울지 않는 바보가 됐으니까."-151쪽

사랑하는 사람만이 창조한다.
사랑해본 사람은, 사랑을 경멸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 것을 경멸해보지 않으면, 사랑을 알지 못한다.
오직 사랑한 것을 경멸해본 사람만이 진정으로 창조할 수 있다. -153쪽

루소는 세계의 역사가 야만에서 출발하여 유럽의 훌륭한 작업장과 도시로 진보해온 게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소박하게 살기는 했지만 우리의 요구가 매우 정확하고 단순했던 원시시대의 자연인 상태로부터 우리 영혼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이 시대의 풍요로운 생활방식들에 선망을 느끼는 상태로 퇴보해왔다고 말한다.-190쪽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복식이든 행동이든 삶의 패턴이든. 그 모든 게 멋대가리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랴.- 톰 포드 -215쪽

내 머리는 내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루소-317쪽

나는 패션지 에디터로 무려 15년 동안이나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곳을 누비며 온갖 종류의 유명인을 만나 인터뷰해온 마흔즈음의 닳고 닳은 여자였고, 그는 시골에서 6년째 은둔생활을 하며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무명의 화가로 동네에서 성범죄 사건이 나면 용의자로 지목될 수도 있을 만큼 남루하고 고독한 남자였다. 사는 곳이나 직업적 환경의 격차로 보자면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질 확률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조금 더 낮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내 취향이 그를 찾아냈다. -9쪽

당대 최고로 잘 팔리는 유명화가였지만 사교계를 좋아하지 않았고 화려한 자신의 그림과는 달리 희거나 검은 옷만 입는 이 아웃사이더(조지아 오키프)에게 어느 날 스물여섯 살의 청년 존 해밀턴이 찾아온다. 오키프가 여든다섯 살 되던 해에 와서 친구이자 연인이 되었다는 존이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자기 또래들과 제대로 된 우정도 나누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예순 살도 더 많은 사람과의 우정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344쪽

중요한 문제는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 -산도르 마라이 '열정'-379쪽

스타일을 논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의 총체성을 논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소재나 주제가 외부 문제이고 스타일이 내부 문제인 것이다. 콕토가 지적한 바 있듯이 장식적인 스타일이라는 것은 없다. 스타일이 곧 영혼일진대,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영혼을 형식이라는 몸뚱이쯤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의 겉모양새가 사실상 우리의 존재방식이다. 가면이 곧 얼굴인 것이다. -수전 손택-399쪽

저마다의 일생에는 그 일생이 동터오는 여명기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 장 그르니에 '섬'-470쪽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자전거에 돈을 쓰는 일은 백화점에서 옷이나 화장품을 사는 것과는 좀 다른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더 좋은 자전거로 바꾸겠다고 무리해서 돈을 쓰는 순간 (하다못해 안장이나 흙받이를 바굴 때도) 죄책감은 커녕 왠지 소비자 무리 중에서 가장 고상한 부류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540쪽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감히 용감한 사람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며,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에 이른다는 것. 이것이 나의 순례이며 저 별을 따라가는 것이 나의 길이라오. 아무리 희망이 없을지라도, 또한 아무리 멀리 있을지라도. -돈키호테-560쪽

작가에게 양심만큼 중요한 건 없다. 하지만 절대로 위선을 떨면 안 된다. 글로 누군가를 동요시키고 싶다면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의 저 맡바닥까지 내려가 써야만 한다. -590쪽

"저기 제일 빛나는 별처럼 보이는 게 목성이랬지? 어때? 보여?"
"응, 보고 있어. 앞으로는 날씨가 사나온 날에도 가끔 목성에게 말을 걸 것 같은 기분이야."
"오~ 낭만 쩌는데?"
철학자 러셀이 그랬다. 어쨋든 좋은 삶, 행복한 삶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기보다 큰 어떤 것에 유대감을 느끼며 자신이 우주의 작은 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이다 라고. -6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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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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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을 즐길 만한 장소에 좀처럼 발을 들일 수 없을 만큼 바쁜 그가 친구에게 우타이를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권유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는 완곡히 거절했지만 내심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그런 짬이 있을까 하고 놀랐다. 그는 시간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흡사 수전노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18쪽

누이는 또 수다 떨기를 아주 좋아하는 여자여다. 그 수다에는 조금도 품위가 없었다. 그녀와 마주할 때면 겐조는 언제나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누님이니까 어쩔 수 없지'-23쪽

"실은 요전에 시마다를 만났어요."
"뭐, 어디서?"

누이는 깜짝 놀란 듯 소리쳤다. 누이는 배우지 못한 도쿄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짓는 데 익숙한 여자였다. -38쪽

외롭기는 할 거야. 그렇긴 해도 사람이 그리워 외로운 게 아니라 욕심 때문에 외로운 거지-191쪽

부부는 겐조를 귀여워했다. 하지만 그 애정 속에는 이상한 보상심리가 있었다. 돈의 힘으로 아름다운 여자를 첩으로 둔 사람이 그 여자가 좋아하는 것은 뭐든지 사주는 것처럼 시마다 부부는 애정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그저 겐조의 환심을 얻기 위해 친절을 보였다. 그들은 그 불순함 때문에 벌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211쪽

집의 정면에는 새끼줄을 대문에 여러 가닥 드리운 쌀가게인가 된장가게인가가 있었다. 겐조는 이 큰 가게와 삶을 콩을 함께 기억했다. 그는 매일 삶은 콩을 먹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새로 이사한 집에 대해서는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세월'은 그를 위해 쓸쓸한 기억들을 깨끗이 지워주었다. -223쪽

어느날 겐조가 청년 중 한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행복하겠네. 졸업하면 무엇이 될까, 무엇을 할까,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청년이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선생님 시대의 일이겠지요.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될지, 무엇을 할지 생각하지 않는 건 물론 아닙니다만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과연 겐조가 졸업한 시대와 비교하면 세상은 열 배는 더 살아가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주와 관련된 물질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따라서 청년의 대답에는 겐조의 생각과 다소 엇갈리는 점이 있었다.
"아니, 자네들은 나처럼 과거 때문에 번민하지 않으니까 행복하다는 말이야"
-230쪽

아내의 병에는 숙면이 가장 좋은 약이었다. 긴시간을 아내 곁에 앉아 걱정스럽게 그 얼굴을 바라봐야 하는 겐조는 그녀의 눈꺼풀 위로 조용히 잠이 내려올 때면 하늘에서 내리는 감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261쪽

개인으로서 노기 씨는 의리가 있고 정이 두터운 정말 훌륭한 사람이네. 그러나 총독으로서 과연 적임자였는가 묻는다면 논쟁의 여지가 상당히 있어. 개인의 덕망은 친하게 지내는 주위 사람들까지는 힘을 미칠지 모르지만, 멀리 떨어진 국민에게 이익을 주기에는 불충분하다네. 그 문제로 따지자면 역시 능력이야. 능력이 없어서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그냥 자리만 지키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어.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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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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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27쪽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줫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50쪽

여자는 자기가 먼저 유인했다가도 내치고, 또 남이 있는 곳에서는 저를 경멸하고 함부로 대하다가도 아무도 없으면 꼭 끌어안고. 죽은 것처럼 깊이 잠들고. 여자란 잠자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등등 그 밖에도 여자에 대해 갖가지 관찰을 저는 일찌감치 어릴 때부터 해왔습니다만, 여자는 똑같은 인류 같으면서도 남자하고는 완전히 다른 생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또 이 불가해하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생물들은 기묘하게도 저를 돌보아주고 싶어하는 것이었습니다. -55쪽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으니까요.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 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41쪽

저는 다케이치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그림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66쪽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을 모두 팔아치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서글플 만큼, 정말이지 티끌만큼도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서 동류로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저는 언제나 창녀들로부터 거북살스럽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감을 샀습니다. 아무런 타산도 없는 호의, 강요하지 않는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의. 저는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그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78쪽

"여자한테서 온 연애 편지로 피운 불로 물을 데워서 목욕한 남자가 있었다는군요."
"어머나, 아이 싫어. 당신이죠?"
"우유를 끓여 먹은 적은 있지요."
"그런 분하고 있다니 영광이네요. 우유 많이 드세요."-96쪽

"쓸쓸해"
저는 여자들의 천 마디, 만 마디 신세 한타노다도 그 한 마디 중얼거림에 더 공감이 갈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 여자들한테서 끝내 한번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괴상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말로 "쓸쓸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무언의 지독한 쓸쓸함을 몸 바깥에 한 폭 정도 되는 기류처럼 두르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이쪽도 그 기류에 휩싸여 제가 지니고 있는 다소 가시 돋친 음산한 기류하고 적당히 섞여서 "물속 바위에 자리 잡은 낙엽"처럼 제 몸은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105쪽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107쪽

저는 하느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안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160쪽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업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165쪽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법이지."
호리키가 태연히 그렇게 대답하기에 저는 호리키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가까운 빌딩에서 명멸하는 네온사인의 붉은빛을 받아 호리키의 얼굴은 무서운 형사처럼 위엄 있어 보였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져서 소리쳤습니다.
"죄라는 건, 자네! 그런 게 아니야"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01쪽

"아니, 이젠 필요 없어."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애에서 그때 단 한 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한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36쪽

한번은 그분이 봄 해변을 슬슬 거닐면서 문득 제 이름을 부르시더니 "자네한테는 늘 신세를 지는군. 자네의 쓸쓸함은 알고 있어. 그러나 그렇게 항상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쓸쓸할 때 쓸쓸한 얼굴을 하는 것은 위선자가 하는 짓일세. 쓸쓸하다는 것을 남이 알아줬으면 하고 일부러 표정을 꾸미는 것일 뿐이야. 진실로 신을 믿는다면 자네는 쓸쓸할 때에도 내색하지 말고 얼굴을 깨끗이 씻고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미소 짓도록 하게. 이해 못하겠나. 쓸쓸한 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어딘가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계시는 자네의 진정한 아버지가 알아주신다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렇지 않은가. 쓸쓸함은 누구한테나 있는 거라네." 라고 말씀해주셔서 저는 왠지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습니다. -257쪽

<작품해설>
...
기독교가 지배 논리가 되기 전의 서구 사회뿐 아니라 인류사에서는 동서를 막론하고 숭고한 자살에 대한 용인 내지는 존경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어왔다. 세네카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한 카토의 '의지적 죽음' 즉, 자살은 "자기 목숨으로 자유의 가치를 조명해 낸" 정의로운 죽음으로 평가되었다. 자살이 기독교에 의해 비난의 대상으로 규정되기 200년 전의 얘기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책임하에 완결짓는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성숙한 인간의 자주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자살은 용인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죽음의 미학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일본 근대 문학사를 대략 더둠어 보아도 기타무라 도코쿠, 가와카미 비잔, 아리시마 다케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다나카 히데미쓰, 미시마 유키오, 카와바타 야스나리, 에토 준 등 자살한 문인들이 많다. 미시마의 경우는 예외로 하더라도, 이들의 자살에 대한 비난은 거의 보이지 않을 뿐더러 일본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자기 논리에 따라 살다 간 존재로 간주하는 시각이 팽배하다.-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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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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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한테 시집 온 지 벌써 몇 년 됐습니까?" 하고 물었다.
형수는 그저 시치미를 떼고 "글쎄요"했다.
"난 그런 건 모두 잊어버렸어요. 하물며 내 나이조차 잊어버릴 정도니까요."
형수의 이 능청스러움은 너무나 형수답게 들렸다. 그리고 내게 오히려 교태로 보이는 이 어색함이, 진지한 형에겐 심한 불쾌감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형수님은 자신의 나이에조차 냉담하군요."-303쪽

두 사람은 이제 요릿집에서 주선해준 여관까지 가야 했다. 채비를 해서 현관을 내려올 때, 거기에 불 밝힌 전등이며 인력거꾼의 초롱은 빗소리와 바람의 울부짖음에 환해지며 흡사 어둠에 날뛰는 광폭함을 비추는 도구처럼 여겨졌다.-307쪽

"형수님, 무섭지 않습니까?"
"무서워요" 하는 목소리가 예상했던 언저리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무서움을 타는 기색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또한 일부러 무서운 척하는, 어리고 경박한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323쪽

"난 죽는다면 목매달거나 목을 찌르는 그런 잔재주 부리는 건 싫어요. 홍수에 휩쓸리거나 벼락을 맞든가 해서 맹렬하고 단숨에 죽는 방법을 택하고 싶어요"-335쪽

"나는 내 아이만 다룰 수 없는 게 아냐. 내 부모님조차 다를 기교를 갖질 못했어. 그뿐만 아니라 중요한 내 아내마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 이 나이가 되도록 학문을 한 덕분에 그런 기교를 배울 틈이 없었지. 지로, 어떤 기교는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같아."-393쪽

형은 등의자 위에서 오사다를 보며 "오사다 씨. 결혼 얘기로 낮을 붉힐 때가 여자의 꽃이야. 정작 해보면 결혼은 낯을 붉힐 만큼 기쁜 일도 아니요,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면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의 품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엄청난 일을 당하는 수도 있어. 그저 조심하는 게 상책이야."라고 말했다. -397쪽

긴 듯하나 짧은 겨울은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하면서도 일어나지 않는 내 앞에 찬비, 녹아드는 서릿발, 강바람....등의 짜여진 일정을 평범하게 반복하며 이렇게 지나갔다. -561쪽

"어차피 내가 이런 바보로 태어난 거니까 어쩔 수 없어요. 아무리 애써봤자 될 대로 되는 수밖에 길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면 그만이에요."
그녀는 애초에 운명 따윈 두려워하지 않는 종교심을 스스로 지니고 태어난 여자인 것 같았다. 대신, 타인의 운명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으로도 비쳤다.
"남잔 싫어지기만 하면 지로 씨처럼 어디든 날아갈 수 있지만 여잔 그렇게 못 하니까. 나 같은 사람은 마치 부모 손으로 화분에 심어진 나무와 다를 바 없이 한번 심어지면 그걸로 끝, 누군가 와서 움직여주지 않는 이상,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요. 꼼짝 않고 있을 뿐이죠. 그대로 말라죽을 때까지 꼼짝 않고 있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걸요."
나는 딱해 보이는 이 호소 이면에 헤아릴 수 없이 강한 여성을 전기처럼 느꼈다. -580쪽

나는 그 동안 한 사람의 형수를 다양하게 보았다. -그녀는 남자도 초월하기 힘든 무엇을 시집온 그날부터 이미 초월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처음부터 초월해야 할 울타리도 벽도 없었다. 처음부터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한 행동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순수의 발현에 불과했다.

어느 때는 또 그녀가 모든 걸 가슴속에 접어두고 쉽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소위 당찬 여자처럼 내 눈에 비쳤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녀는 흔히 있는 당찬 여자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그 차분함, 그 품위, 그 과목함, 누가 보기에도 그녀는 지나치게 당찬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놀랄 만큼 뻔뻔스럽기도 했다.
어느 순간에 그녀는 인내의 화신처럼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인내에는 고통의 흔적조차 용납하지 않는 고상함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는 대신 미소지었다. 쓰러져 우는 대신 단정히 앉았다. 마치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발이 썩기를 기다리는 듯이. 요컨대 그녀의 인내는 인내라는 의미를 넘어 거의 그녀의 자연에 가까운 무엇이었다.-587쪽

"집에선 요즘 네가 오지 않아서 모두 궁금해하고 있다. 지로는 어찌 된 셈인가 하고. 겸손이 무소식이라지만 넌 고집이 무소식이라 더욱 나빠."-604쪽

"어떤가, 마음에 안 드는가?"
"얼굴은 괜찮군."
"얼굴뿐인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한데 좀 구식이더군.무조건 사양만 하면 그게 예의인 줄 아는 모양이지."-657쪽

형님이 괴로워하는 건, 형님이 아무리 무얼 해봐도 그게 목적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수단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불안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겁니다. 형님은 차분히 누워 있을 수 없으니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일어나면, 그저 일어나 있을 수 없어 걷는다고 말합니다. 걸으면, 그저 걷고만 있을 수 없으니 달린다고 말합니다. 이미 달려나간 이상, 어디서도 멈출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멈 출 수 없기만 하다면 괜찮겠는데, 시시각각 속력을 늘려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극단을 상상하면 두렵다고 말합니다. 식은땀이 날 만큼 두렵다고 말합니다. 너무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708쪽

"나는 죽은 신보다 살아 있는 인간이 더 좋다네. 인력거꾼이든, 수레 인부든, 도둑이든, 내가 고맙게 여기는 찰나의 얼굴이 곧 신이 아닌가? 산이든 강이든 바다든, 내가 숭고하다고 느끼는 순가느이 자연, 그게 곧 신이 아닌가? 그 밖에 어떤 신이 있나?"-722쪽

"세상일이 자기 생각대로만 되지 않는 이상, 거기엔 자기 이외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걸세."
"인정하네"
"그리고 그 의지는 자네보다 훨씬 위대하지"
"위대할지도 모르지, 내가 지니까. 하지만 대개 나보다도 선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고, 진실하지 않아. 나는 그들에게 질 까닭이 없는데도 지고 있다네. 그래서 화가 나는 거지."-752쪽

하코네를 떠날 때, 형님은 "두 번 다시 이런 곳은 질색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껏 지나온 가운데 형님의 마음에 든 곳은 아직 한 군데도 없습니다. 형님은 누구와 어디를 가든 쉽게 싫증내는 사람일 테지요. 그것도 그럴 만합니다. 형님은 자신의 몸이며 마음부터 이미 성에 차지 않으니까요. 형님은 자신의 몸이나 마음이 자신을 배반하는 수상한 자인 양 말합니다.-775쪽

스님의 이름은 아마도 교겐이라 했습니다. 흔히 말하듯, 하나를 물어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하는 식의 총명하고 영리하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총명함, 영리함이 깨달음에 방해가 되어 아무리 지나도 득도할 수가 없었다고 형님은 말했습니다.깨달음을 모르는 나도 이 의미는 잘 이해가 됩니다. 자신의 지혜로 인해 괴로움을 격고 있는 형님에겐 한층 더 절실하게 와닿았겠지요. -795쪽

"시집 가기 전의 오사다 씨와 시집 간 뒤의 오사다 씨는 전혀 다르네 지금의 오사다 씨는 이미 남편 때문에 스포일spoil되고 말았다네"
"도대체 어떤 사람한테 시집을 갔기에?" 하고 도중에 내가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한테 가든, 시집을 가면 여자는 남편 때문에 부정을 타게 되지. 이렇게 말하는 내가 이미 내 아내를 얼마나 못쓰게 만들었는지 모른다네. 내가 못쓰게 만든 아내로부터 행복을 구하는 건 너무 억지가 아닌가. 행복은 결혼으로 천진함을 잃어버린 여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네."-8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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