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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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27쪽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줫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50쪽

여자는 자기가 먼저 유인했다가도 내치고, 또 남이 있는 곳에서는 저를 경멸하고 함부로 대하다가도 아무도 없으면 꼭 끌어안고. 죽은 것처럼 깊이 잠들고. 여자란 잠자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등등 그 밖에도 여자에 대해 갖가지 관찰을 저는 일찌감치 어릴 때부터 해왔습니다만, 여자는 똑같은 인류 같으면서도 남자하고는 완전히 다른 생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또 이 불가해하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생물들은 기묘하게도 저를 돌보아주고 싶어하는 것이었습니다. -55쪽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으니까요. 저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 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41쪽

저는 다케이치의 말을 듣고 그때까지 그림에 대한 제 마음가짐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66쪽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을 모두 팔아치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서글플 만큼, 정말이지 티끌만큼도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서 동류로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저는 언제나 창녀들로부터 거북살스럽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감을 샀습니다. 아무런 타산도 없는 호의, 강요하지 않는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의. 저는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그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78쪽

"여자한테서 온 연애 편지로 피운 불로 물을 데워서 목욕한 남자가 있었다는군요."
"어머나, 아이 싫어. 당신이죠?"
"우유를 끓여 먹은 적은 있지요."
"그런 분하고 있다니 영광이네요. 우유 많이 드세요."-96쪽

"쓸쓸해"
저는 여자들의 천 마디, 만 마디 신세 한타노다도 그 한 마디 중얼거림에 더 공감이 갈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 여자들한테서 끝내 한번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괴상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말로 "쓸쓸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무언의 지독한 쓸쓸함을 몸 바깥에 한 폭 정도 되는 기류처럼 두르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이쪽도 그 기류에 휩싸여 제가 지니고 있는 다소 가시 돋친 음산한 기류하고 적당히 섞여서 "물속 바위에 자리 잡은 낙엽"처럼 제 몸은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105쪽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107쪽

저는 하느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안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160쪽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업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165쪽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법이지."
호리키가 태연히 그렇게 대답하기에 저는 호리키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가까운 빌딩에서 명멸하는 네온사인의 붉은빛을 받아 호리키의 얼굴은 무서운 형사처럼 위엄 있어 보였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져서 소리쳤습니다.
"죄라는 건, 자네! 그런 게 아니야"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01쪽

"아니, 이젠 필요 없어."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애에서 그때 단 한 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한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36쪽

한번은 그분이 봄 해변을 슬슬 거닐면서 문득 제 이름을 부르시더니 "자네한테는 늘 신세를 지는군. 자네의 쓸쓸함은 알고 있어. 그러나 그렇게 항상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쓸쓸할 때 쓸쓸한 얼굴을 하는 것은 위선자가 하는 짓일세. 쓸쓸하다는 것을 남이 알아줬으면 하고 일부러 표정을 꾸미는 것일 뿐이야. 진실로 신을 믿는다면 자네는 쓸쓸할 때에도 내색하지 말고 얼굴을 깨끗이 씻고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미소 짓도록 하게. 이해 못하겠나. 쓸쓸한 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어딘가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계시는 자네의 진정한 아버지가 알아주신다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렇지 않은가. 쓸쓸함은 누구한테나 있는 거라네." 라고 말씀해주셔서 저는 왠지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습니다. -257쪽

<작품해설>
...
기독교가 지배 논리가 되기 전의 서구 사회뿐 아니라 인류사에서는 동서를 막론하고 숭고한 자살에 대한 용인 내지는 존경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어왔다. 세네카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한 카토의 '의지적 죽음' 즉, 자살은 "자기 목숨으로 자유의 가치를 조명해 낸" 정의로운 죽음으로 평가되었다. 자살이 기독교에 의해 비난의 대상으로 규정되기 200년 전의 얘기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책임하에 완결짓는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성숙한 인간의 자주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자살은 용인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죽음의 미학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일본 근대 문학사를 대략 더둠어 보아도 기타무라 도코쿠, 가와카미 비잔, 아리시마 다케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다나카 히데미쓰, 미시마 유키오, 카와바타 야스나리, 에토 준 등 자살한 문인들이 많다. 미시마의 경우는 예외로 하더라도, 이들의 자살에 대한 비난은 거의 보이지 않을 뿐더러 일본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자기 논리에 따라 살다 간 존재로 간주하는 시각이 팽배하다.-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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