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한테 시집 온 지 벌써 몇 년 됐습니까?" 하고 물었다. 형수는 그저 시치미를 떼고 "글쎄요"했다. "난 그런 건 모두 잊어버렸어요. 하물며 내 나이조차 잊어버릴 정도니까요." 형수의 이 능청스러움은 너무나 형수답게 들렸다. 그리고 내게 오히려 교태로 보이는 이 어색함이, 진지한 형에겐 심한 불쾌감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형수님은 자신의 나이에조차 냉담하군요."-303쪽
두 사람은 이제 요릿집에서 주선해준 여관까지 가야 했다. 채비를 해서 현관을 내려올 때, 거기에 불 밝힌 전등이며 인력거꾼의 초롱은 빗소리와 바람의 울부짖음에 환해지며 흡사 어둠에 날뛰는 광폭함을 비추는 도구처럼 여겨졌다.-307쪽
"형수님, 무섭지 않습니까?" "무서워요" 하는 목소리가 예상했던 언저리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무서움을 타는 기색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또한 일부러 무서운 척하는, 어리고 경박한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323쪽
"난 죽는다면 목매달거나 목을 찌르는 그런 잔재주 부리는 건 싫어요. 홍수에 휩쓸리거나 벼락을 맞든가 해서 맹렬하고 단숨에 죽는 방법을 택하고 싶어요"-335쪽
"나는 내 아이만 다룰 수 없는 게 아냐. 내 부모님조차 다를 기교를 갖질 못했어. 그뿐만 아니라 중요한 내 아내마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 이 나이가 되도록 학문을 한 덕분에 그런 기교를 배울 틈이 없었지. 지로, 어떤 기교는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같아."-393쪽
형은 등의자 위에서 오사다를 보며 "오사다 씨. 결혼 얘기로 낮을 붉힐 때가 여자의 꽃이야. 정작 해보면 결혼은 낯을 붉힐 만큼 기쁜 일도 아니요,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면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의 품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엄청난 일을 당하는 수도 있어. 그저 조심하는 게 상책이야."라고 말했다. -397쪽
긴 듯하나 짧은 겨울은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하면서도 일어나지 않는 내 앞에 찬비, 녹아드는 서릿발, 강바람....등의 짜여진 일정을 평범하게 반복하며 이렇게 지나갔다. -561쪽
"어차피 내가 이런 바보로 태어난 거니까 어쩔 수 없어요. 아무리 애써봤자 될 대로 되는 수밖에 길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포기하면 그만이에요." 그녀는 애초에 운명 따윈 두려워하지 않는 종교심을 스스로 지니고 태어난 여자인 것 같았다. 대신, 타인의 운명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으로도 비쳤다. "남잔 싫어지기만 하면 지로 씨처럼 어디든 날아갈 수 있지만 여잔 그렇게 못 하니까. 나 같은 사람은 마치 부모 손으로 화분에 심어진 나무와 다를 바 없이 한번 심어지면 그걸로 끝, 누군가 와서 움직여주지 않는 이상,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요. 꼼짝 않고 있을 뿐이죠. 그대로 말라죽을 때까지 꼼짝 않고 있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걸요." 나는 딱해 보이는 이 호소 이면에 헤아릴 수 없이 강한 여성을 전기처럼 느꼈다. -580쪽
나는 그 동안 한 사람의 형수를 다양하게 보았다. -그녀는 남자도 초월하기 힘든 무엇을 시집온 그날부터 이미 초월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처음부터 초월해야 할 울타리도 벽도 없었다. 처음부터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한 행동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순수의 발현에 불과했다.
어느 때는 또 그녀가 모든 걸 가슴속에 접어두고 쉽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소위 당찬 여자처럼 내 눈에 비쳤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녀는 흔히 있는 당찬 여자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그 차분함, 그 품위, 그 과목함, 누가 보기에도 그녀는 지나치게 당찬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놀랄 만큼 뻔뻔스럽기도 했다. 어느 순간에 그녀는 인내의 화신처럼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인내에는 고통의 흔적조차 용납하지 않는 고상함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는 대신 미소지었다. 쓰러져 우는 대신 단정히 앉았다. 마치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발이 썩기를 기다리는 듯이. 요컨대 그녀의 인내는 인내라는 의미를 넘어 거의 그녀의 자연에 가까운 무엇이었다.-587쪽
"집에선 요즘 네가 오지 않아서 모두 궁금해하고 있다. 지로는 어찌 된 셈인가 하고. 겸손이 무소식이라지만 넌 고집이 무소식이라 더욱 나빠."-604쪽
"어떤가, 마음에 안 드는가?" "얼굴은 괜찮군." "얼굴뿐인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한데 좀 구식이더군.무조건 사양만 하면 그게 예의인 줄 아는 모양이지."-657쪽
형님이 괴로워하는 건, 형님이 아무리 무얼 해봐도 그게 목적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수단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불안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겁니다. 형님은 차분히 누워 있을 수 없으니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일어나면, 그저 일어나 있을 수 없어 걷는다고 말합니다. 걸으면, 그저 걷고만 있을 수 없으니 달린다고 말합니다. 이미 달려나간 이상, 어디서도 멈출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멈 출 수 없기만 하다면 괜찮겠는데, 시시각각 속력을 늘려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극단을 상상하면 두렵다고 말합니다. 식은땀이 날 만큼 두렵다고 말합니다. 너무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708쪽
"나는 죽은 신보다 살아 있는 인간이 더 좋다네. 인력거꾼이든, 수레 인부든, 도둑이든, 내가 고맙게 여기는 찰나의 얼굴이 곧 신이 아닌가? 산이든 강이든 바다든, 내가 숭고하다고 느끼는 순가느이 자연, 그게 곧 신이 아닌가? 그 밖에 어떤 신이 있나?"-722쪽
"세상일이 자기 생각대로만 되지 않는 이상, 거기엔 자기 이외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걸세." "인정하네" "그리고 그 의지는 자네보다 훨씬 위대하지" "위대할지도 모르지, 내가 지니까. 하지만 대개 나보다도 선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고, 진실하지 않아. 나는 그들에게 질 까닭이 없는데도 지고 있다네. 그래서 화가 나는 거지."-752쪽
하코네를 떠날 때, 형님은 "두 번 다시 이런 곳은 질색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껏 지나온 가운데 형님의 마음에 든 곳은 아직 한 군데도 없습니다. 형님은 누구와 어디를 가든 쉽게 싫증내는 사람일 테지요. 그것도 그럴 만합니다. 형님은 자신의 몸이며 마음부터 이미 성에 차지 않으니까요. 형님은 자신의 몸이나 마음이 자신을 배반하는 수상한 자인 양 말합니다.-775쪽
스님의 이름은 아마도 교겐이라 했습니다. 흔히 말하듯, 하나를 물어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하는 식의 총명하고 영리하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총명함, 영리함이 깨달음에 방해가 되어 아무리 지나도 득도할 수가 없었다고 형님은 말했습니다.깨달음을 모르는 나도 이 의미는 잘 이해가 됩니다. 자신의 지혜로 인해 괴로움을 격고 있는 형님에겐 한층 더 절실하게 와닿았겠지요. -795쪽
"시집 가기 전의 오사다 씨와 시집 간 뒤의 오사다 씨는 전혀 다르네 지금의 오사다 씨는 이미 남편 때문에 스포일spoil되고 말았다네" "도대체 어떤 사람한테 시집을 갔기에?" 하고 도중에 내가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한테 가든, 시집을 가면 여자는 남편 때문에 부정을 타게 되지. 이렇게 말하는 내가 이미 내 아내를 얼마나 못쓰게 만들었는지 모른다네. 내가 못쓰게 만든 아내로부터 행복을 구하는 건 너무 억지가 아닌가. 행복은 결혼으로 천진함을 잃어버린 여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네."-8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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