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디다, 곧 돌아올게요." 아시마는 이렇게 말했었다. 벵골 사람들은 안녕이라는 말 대신 언제나 이 말을 썼다.

"가서 마음껏 즐기거라." 할머니는 그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치듯 말씀하시면서 아시마를 일으켜주셨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아시마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닦아주셨다. "가서 이 할미가 못한 일을 하거라. 다 잘되기 위한 거란다. 명심해야 한다. 자, 이제 그만 가거라."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밤, 모두 깊이 잠들어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마자 그들은 벌떡 일어났거, 마치 똑같은 악몽을 꾸다가 깨어나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의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시마는 아쇼크가 전화를 받기 전부터 이건 인도에서 온 전화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두어 달 전 가족들이 편지로 케임브리지의 전화번호를 물었을 때, 그녀는 마지못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었다. 전화로 받을 소식이라면 분명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아시마는 요즘 들어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임신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림은 끝도 없고, 언제나 버겁고, 끊임없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한때는 평범했었던 삶에 이제는 불룩하게 괄호가 하나 삽입되었고, 이 괄호 속에는 끝나지 않는 책임이 들어 있었다. ...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임신했을 때처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호기심과, 그리고 동정심과 이해심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자아내는 어떤 것이라고, 아시마는 생각하였다.

그렇게 그들의 8개월은 지나간 일이 되어갔다. 그간의 기억은 쉽사리 몸에서 떨어져 나갔고,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특별한 날 입었던 옷이나 철이 지난 옷처럼 갑자기 쓸모없어진, 어느새 그들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맥신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대리석 무늬 종이 앨범에 껒힌 전 남자 친구들의 사진을 보여주면서도 당황하거나 후회하는 기색 없이 그들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맥신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그녀를 알아가게 되면서, 그는 맥신이 자기 이외에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다른 가정에서 다른 방식으로 자라나는 것을 원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그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이것이 그녀가 자라난 멋진 집이나 그녀가 다녔던 사립학교보다 훨씬 낯설게 느껴졌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3-02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현대소설이 주인공이 온몸으로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이 불안이다. 만약 춘향전처럼 만난 첫날에 사랑가 부르며 여주인공 옷고름 푸는, 참으로 명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원망해야 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보다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소설은 없다.

플롯과 캐릭터 같은 건 처음부터 직관적으로 멋진 것들을 떠오릴 수 있다고 해도 문장만은 제일 먼저 쓴 문장이 제일 안 좋다. 그래서 소설가에게 필요한 동사는 세가지다. 쓴다. 생각한다. 다시 쓴다.

법구경을 들춰보면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마라. 미운 사람과 만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사랑에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이윤기 선생의 여러 말씀 중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것 중에는 시장 아줌마들이 주고받는 일상의 대화가 소설가들의 문장보다 백배는 낫다는 말씀도 있었다. 선생이 시장에서 훔쳐들은 바에 따르면, 어떤 집의 아들이 자살하자 아줌마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가 세상이 텅 비어 보였는갑다." 그러면서 선생은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짜는 소설가들의 대사는 이런식이라며 예로 들었다. "그 아이가 삶의 허무를 견딜 수 없었나봐요" 라거나 "그 집 아들이 절망에 빠져 더이상 살기 싫었나봐요."라거나.

사람들은 악이 선만큼이나 대단한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악은 선의 결여일 뿐이다.

책꽃이에 꽃힌 세계문학전집을 마주하면 경외심을 느끼리라.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먼 미래까지 읽히는 작품은 그 정도, 서가 두어 개 정도에 불과하니까. 시간의 압력을 견딘 건 책의 내용 이전에 문장이다. 일단은 문장이 읽혀야 내용도 읽을 게 아닌가? 미래에도 읽을 수 있는 문장, 그게 바로 소설가가 써야 할 문장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2-08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08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09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09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5-02-09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일라님 왤케 오랜만??????? 잘 지내시죠?????

LAYLA 2015-02-09 18:37   좋아요 0 | URL
네 ㅋㅋ 어디 좀 다녀오느라... 잘 지내고 있습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사 여러분, 잘 돌봐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니었다.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힘들었다. 다원적이고 다양하다고 할까. 눈물과 웃음이 있었다. 행복과 슬픔이 있었다. 지루하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하고, 무정하기도 했다. 보이는 그대로였다. 소란스럽고 격정적인가 하면 엄숙하기도 했다.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하찮기도 했다. 단순하면서 복잡했다. 기쁨이 있었고 절망이 있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여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이 있었다. 욕망이 무거운 발을 끌면서 병원의 방들을 지나갔다. 죄 있는 자와 죄 없는 자, 홀로 된 아내들과 비참한 아이들에게 벌 주면서. 술이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벗어날 길 없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병원의 진찰실에서는 죽음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곳에서는 불쌍한 소녀를 공포와 수치로 몰아넣으며 생명의 탄생을 진단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선도 악도 없었다. 사실만이 존재했다. 그것이 인생이었다.

필립은 관념주의에 대해 얼마간 경멸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삶에 대해 늘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여태껏 만난 관념주의는 대체로 삶으로부터의 비겁한 도피처럼 여겨졌다. 관념주의자는, 번잡한 인간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그곳에서 몸을 빼낸다. 싸울 힘이 없는 그는 삶의 투쟁을 비속하게 여긴다. 그는 자만심이 강하며, 남들이 자기를 스스로 평가하는 만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남들을 경멸함으로써 위안을 삼는다. 필립이 보기에, 그 전형은 헤이워드였다. 잘생기고, 게으르며, 이제 너무 살이 찐데다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옛 미모의 흔적을 간직하면서 확실치는 않지만 언젠가는 굉장한 일을 하고 말겠노라는 뜻을 아직도 그럴싸하게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허풍 뒤에는 길거리의 천박한 연애와 위스키밖에 없었다.

한번은 템즈 강에 뛰어들어 죽으려는 사람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건져내 이리로 실어왔죠. 그런데 열흘 뒤에 보니까 그때 마신 강물 때문에 장티푸스에 걸려 버리고 말았어요. 그야, 죽었죠. 그런데 이걸 자살로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자살하려는 사람들 말이죠. 또 한 사람이 생각나는데, 이 사람은 일자리를 잃은 데다가 마누라도 죽어버리자 옷가지를 전당포에 잡히고 권총을 한 자루 샀어요. 그런데 그만 실수를 해서 한쪽 눈만 다치고 죽진 않았죠. 그런데 말예요, 한쪽 눈을 날리고 얼굴 한쪽도 날아갔는데 이 사람이 내린 결론은 글쎄, 이 세상이 알고 보니 그리 허악한 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곤 그 뒤로 잘 살았죠. 내가 그 동안 겪어본 바로는요,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은 생각만큼 없어요. 다 소설가들이 지어내는 이야기죠. 자살은 주로 돈 때문에 해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필립은 동방의 어떤 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 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 그것을 다시 줄여오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 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다거나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산다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필립은 벅찬 기쁨을 느꼈다. 소년 시절, 신을 믿어야 한다는 무거운 신앙의 짐을 벗어버렸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이제 책임이라는 마지막 짐까지도 벗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셈이었다.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이 오히려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제까지 자기를 박해한다고만 생각했던 잔혹한 운명과 갑자기 대등해진 느낌이 들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세상도 잔혹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성공 역시 의미가 없다.

필립은 끝없는 노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에게 삶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저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듯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것이리라. 이 모두가 헛된 것이려니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필립으로서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마다, 생각되는 것마다 그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그것은 즐거운 분노였다. 삶이 무의미하다면 그것을 별로 두려워할 것도 없을 테니까. 필립은 이상한 힘을 느끼며 삶과 마주하였다.

노인은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었다. 누구나 한번은 이 공포를 겪어야 하리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정말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잔인한 고통을 겪게 하는 신을 믿는다! 필립은 한번도 백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지난 이 년 동안은 날마다 백부가 죽기를 바랬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가슴에서 솟구치는 연민을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가 정말 얼마나 큰가!

<이마에 땀을 흘려 일용할 양식을 얻으리라>
이 말은 인간에게 내린 저주라기보다 생존을 감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향유가 아닌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1-13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지방의 관습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68
이디스 워튼 지음, 정혜옥.손영희 옮김 / 아카넷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미국인은 여자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해도 된다고 `허락하는`일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의무적인 미덕이란 게 많지 않거든요."
보언의 친구가 이 말에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부부가 그렇게 따로 논다면 결혼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가 미국인들에게 왜 아직도 존속하죠?"
"오, 결혼은 아직 쓸모가 있어요. 결혼을 하지 않으면 이혼을 할 수가 없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굴레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 아우구스투스는 지구가 납작하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사람은 자기 시대가 믿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지.

필립은 인생의 나그네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전에 메마르고 험준한 세상을 얼마나 넓게 돌아다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젊음이 행복하다는 것은 환상이며 그것은 젊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환상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머리에는 끊임없이 주입되어 온 진실없는 이상들만 가득 차 있어 현실을 접촉할 때마다 멍들고 상처받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어떤 공모의 희생자처럼 보인다. 선택해서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나 이상적인 책들, 그리고 망각의 장밋빛 아지랑이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나이든 사람들의 대화, 이 두가지가 공모하여 젊은이들로 항금 비현실적인 삶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읽은 모든 것, 자기가 들으 모든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여야 한다. 그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은 인생의 십자가에 그들을 때려박는 못이 된다. 이상한 것은 쓰라린 환멸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무의식적으로 저마다, 억제할 수 없는 내부의 어떤 큰 힘에 의해 그 환멸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헤이워드를 사귄 것은 필립에게 최악의 일이었다. 헤이워드는 자신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만사를 문학적인 분위기를 통해서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성실하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관능을 낭만적 감정이라고 잘못 알았고, 우유부단을 예술적 기질로 잘못 알았으며, 게으름을 철학적인 초연함이라고 잘못 알았다. 그의 정신은 속물적으로 세련을 추구하였으며, 따라서 모든 것을 감상의 금빛 안개 속에서 실물 크기보다 약간 크게, 흐릿한 윤곽으로 보았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누가 거짓말을 한다고 지적하면 거짓말은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는 관념주의자였다.

-그래 자넨 여자들을 어떻게 낚았나
로슨이 골을 내며 말했다.
-별로 어려울 것 없어, 이 사람아.
플래너건이 말했다.
-곧 바로 부딪치면 돼. 문제는 떼내는 일이야. 그건 요령이 필요하지.

세상에서 가장 굴욕스러운 일은 말이지, 먹고 사는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야. 난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감밖에 들지 않네. 그런 자들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야. 돈이란 제 육감과 같아. 그게 없이는 다른 오감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지. 적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생의 가능성 가운데 절반은 막혀버리네. 딱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한푼 벌면 한푼이상 쓰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 예술가에겐 가난이 제일 좋은 채찍이 된다는 말들을 하잖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가난의 쓰라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하게 만드는지 몰라. 사람을 끝없이 비굴하게 만드네. 사람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암처럼 사람의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고, 너그럽고 솔직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정도는 있어야지. 나는 말이야,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예술하는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을 자기 예술에만 의존한다면 그런 사람을 정말 가련하게 보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