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소설이 주인공이 온몸으로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이 불안이다. 만약 춘향전처럼 만난 첫날에 사랑가 부르며 여주인공 옷고름 푸는, 참으로 명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원망해야 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보다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소설은 없다.
플롯과 캐릭터 같은 건 처음부터 직관적으로 멋진 것들을 떠오릴 수 있다고 해도 문장만은 제일 먼저 쓴 문장이 제일 안 좋다. 그래서 소설가에게 필요한 동사는 세가지다. 쓴다. 생각한다. 다시 쓴다.
법구경을 들춰보면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마라. 미운 사람과 만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사랑에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이윤기 선생의 여러 말씀 중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것 중에는 시장 아줌마들이 주고받는 일상의 대화가 소설가들의 문장보다 백배는 낫다는 말씀도 있었다. 선생이 시장에서 훔쳐들은 바에 따르면, 어떤 집의 아들이 자살하자 아줌마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가 세상이 텅 비어 보였는갑다." 그러면서 선생은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짜는 소설가들의 대사는 이런식이라며 예로 들었다. "그 아이가 삶의 허무를 견딜 수 없었나봐요" 라거나 "그 집 아들이 절망에 빠져 더이상 살기 싫었나봐요."라거나.
사람들은 악이 선만큼이나 대단한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악은 선의 결여일 뿐이다.
책꽃이에 꽃힌 세계문학전집을 마주하면 경외심을 느끼리라. 시간의 압력을 견디고 먼 미래까지 읽히는 작품은 그 정도, 서가 두어 개 정도에 불과하니까. 시간의 압력을 견딘 건 책의 내용 이전에 문장이다. 일단은 문장이 읽혀야 내용도 읽을 게 아닌가? 미래에도 읽을 수 있는 문장, 그게 바로 소설가가 써야 할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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