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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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여러분, 잘 돌봐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니었다.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힘들었다. 다원적이고 다양하다고 할까. 눈물과 웃음이 있었다. 행복과 슬픔이 있었다. 지루하기도 하고, 재미나기도 하고, 무정하기도 했다. 보이는 그대로였다. 소란스럽고 격정적인가 하면 엄숙하기도 했다.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하찮기도 했다. 단순하면서 복잡했다. 기쁨이 있었고 절망이 있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여자에 대한 남자의 사랑이 있었다. 욕망이 무거운 발을 끌면서 병원의 방들을 지나갔다. 죄 있는 자와 죄 없는 자, 홀로 된 아내들과 비참한 아이들에게 벌 주면서. 술이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벗어날 길 없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병원의 진찰실에서는 죽음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곳에서는 불쌍한 소녀를 공포와 수치로 몰아넣으며 생명의 탄생을 진단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선도 악도 없었다. 사실만이 존재했다. 그것이 인생이었다.

필립은 관념주의에 대해 얼마간 경멸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삶에 대해 늘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여태껏 만난 관념주의는 대체로 삶으로부터의 비겁한 도피처럼 여겨졌다. 관념주의자는, 번잡한 인간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그곳에서 몸을 빼낸다. 싸울 힘이 없는 그는 삶의 투쟁을 비속하게 여긴다. 그는 자만심이 강하며, 남들이 자기를 스스로 평가하는 만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남들을 경멸함으로써 위안을 삼는다. 필립이 보기에, 그 전형은 헤이워드였다. 잘생기고, 게으르며, 이제 너무 살이 찐데다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옛 미모의 흔적을 간직하면서 확실치는 않지만 언젠가는 굉장한 일을 하고 말겠노라는 뜻을 아직도 그럴싸하게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허풍 뒤에는 길거리의 천박한 연애와 위스키밖에 없었다.

한번은 템즈 강에 뛰어들어 죽으려는 사람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건져내 이리로 실어왔죠. 그런데 열흘 뒤에 보니까 그때 마신 강물 때문에 장티푸스에 걸려 버리고 말았어요. 그야, 죽었죠. 그런데 이걸 자살로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자살하려는 사람들 말이죠. 또 한 사람이 생각나는데, 이 사람은 일자리를 잃은 데다가 마누라도 죽어버리자 옷가지를 전당포에 잡히고 권총을 한 자루 샀어요. 그런데 그만 실수를 해서 한쪽 눈만 다치고 죽진 않았죠. 그런데 말예요, 한쪽 눈을 날리고 얼굴 한쪽도 날아갔는데 이 사람이 내린 결론은 글쎄, 이 세상이 알고 보니 그리 허악한 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곤 그 뒤로 잘 살았죠. 내가 그 동안 겪어본 바로는요,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은 생각만큼 없어요. 다 소설가들이 지어내는 이야기죠. 자살은 주로 돈 때문에 해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필립은 동방의 어떤 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 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 그것을 다시 줄여오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 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사람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다거나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산다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필립은 벅찬 기쁨을 느꼈다. 소년 시절, 신을 믿어야 한다는 무거운 신앙의 짐을 벗어버렸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이제 책임이라는 마지막 짐까지도 벗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셈이었다.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이 오히려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제까지 자기를 박해한다고만 생각했던 잔혹한 운명과 갑자기 대등해진 느낌이 들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세상도 잔혹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성공 역시 의미가 없다.

필립은 끝없는 노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에게 삶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저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듯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것이리라. 이 모두가 헛된 것이려니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필립으로서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마다, 생각되는 것마다 그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그것은 즐거운 분노였다. 삶이 무의미하다면 그것을 별로 두려워할 것도 없을 테니까. 필립은 이상한 힘을 느끼며 삶과 마주하였다.

노인은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었다. 누구나 한번은 이 공포를 겪어야 하리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정말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잔인한 고통을 겪게 하는 신을 믿는다! 필립은 한번도 백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지난 이 년 동안은 날마다 백부가 죽기를 바랬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가슴에서 솟구치는 연민을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가 정말 얼마나 큰가!

<이마에 땀을 흘려 일용할 양식을 얻으리라>
이 말은 인간에게 내린 저주라기보다 생존을 감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향유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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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3 2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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