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니 에르노의 명성을 익히 들었는데 이 책을 들으며 도대체 이 여자가 왜 그리 유명한건가 싶었다. 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는 남자에 대한 마음이 책 한권을 통틀어 지리하게 똑같은 패턴으로 이어진다. 1.남자의 전화를 기다림 2.전화가 오지 않아 절망함 3. 버림받느니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겠다고 결심함 4.결심은 절대로 실천하지 않고 계속 기다리다가 남자의 전화를 받고 기뻐함 5.찾아온 남자와 섹스하고 다시 1부터 반복. 섹스에 대한 묘사가 너절하다는 식의 비판은 와닿지 않는데(별거 없음) 똑같은 이야기를 주구장창 늘어놓는 이 기나긴 일기를 왜 굳이 책으로 읽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싸이월드와 페이스북으로 온갖 사람의 일기가 넘쳐나는 세상이라 일기에 대한 내 기대치가 너무 높아진 탓일까? 미안하지만 이 글은 옐로우 페이퍼에 주말특집으로 한편 정도 실리면 좋을 듯 하다. 굳이 이렇게 일년치를 다 읽을 필요는 없다.  


일년치를 다 읽을 필요가 없다는 감상은 만약 아니 에르노의 글이 아니었더라면 이 글이 출판될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물론 출판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에르노'가 13살 연하의 남자를 사랑하고, 그의 성기 위에서 잃어버린 콘택트 렌즈를 찾고, 헤어짐의 의식으로 서재에서 애널섹스를 하였기에 쿨싴한 책이 되었을 뿐. 보통의 49살 여성이 이런 불륜담을 책으로 출판했다면 세상의 평은 비웃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서갑숙이 떠오르는 데, 거꾸로 말하자면 애초에 아니 에르노에 대한 동경이 없던 나 같은 독자에겐 서갑숙이나 아니 에르노나 별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일기가 그나마 특별한 점이라면 사람이 지천명을 눈앞에 두고서도 저리 심하게 사랑 앞에 동요할 수 있구나, 끝없는 불안에 떨 수 있구나 보여준다는 점? 끝없이 과거에 매달리고 자기연민에 허덕이는 이 여자의 일기를 보면 나이를 먹는다고 누구나 다 평안을 얻는 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 여자는 불륜 상대에게서라면 에이즈를 얻어도 괜찮다고 하고, 실제로 헤어지고 나서는 나에게 에이즈 만이라도 남겨두고 갔길!이라고 말한다. 철딱서니 없다고 해야할까 열정의 파국 앞에 삶의 매 순간을 증명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몸짓이라 해야 할까? 당연 나는 전자의 의견에 동의하니 이런 리뷰를 쓰고 있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 가서 이렇게 이해가지 않는 그녀를 이해할만한 단서를 한 구절 찾았다.


나는 지적이고 '탄탄한' 남자와 함께 무언가를 '이루어나가겠다는(?)' 꿈을 완전히 포기했다. 글과 아이들 외에 나는 아무것도 만들 능력이 없다. 애무와 욕망, 꿈, 환상 말고는 내게 아무것도 가져다줄 것 없는, 잠시 내 곁에 머물러 있는 남자가 내가 가진 유일한 현실이다. 그것도 그가 시간이 허락하는 경우에만.

내가 한 남자를 위해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이 지점에선 아니 에르노의 일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모든 걸 포기하고 마지막 남은 것이 연애 밖에 없는 여자라면, 이 정도로 절박하게 찌질해도 괜찮다. 체념한 사람에게 그 무엇이 허락되지 않을까? 하지만 여전히, 이런 일기를 쓰는 것과 출판하는 것은 별개라는 생각만은 변함이 없다. 아르노는 이 책의 출판에 부쳐 '다른 진실, 정제되지 않고 암울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어떤 제물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기에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는 데 안타깝게도 그런 문학적 의미보다는 '아르노의 포르노그라피 고백'이라는 맥락과 더 가까운 듯 하다. 진실은, 내가 우매한 독자이거나. 아르노의 자기애와 문학적 성취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거나. 아니면 그 사이 어디쯤이 아닐까. 


결론은. 이 책에 대한 소개글만 보고 한권의 책으로서 읽고자 하는 사람에겐 권하지 않겠다. 책이 아니라 일기이무니다. 아니 에르노가 너무 좋아서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팬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에겐 당연히 권하겠다. 스타의 일기장을 볼 수 있다니... 그녀의 팬들이라면 이렇게 과감히 일기를 출판해준 아르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아 마지막으로, 이 책의 출판이 100% 유감이었던건 아니다. 아니 에르노가 사랑했던 남자는 출세에 눈 먼 나르시스트에 아니 에르노에게 비싼 선물을 받고 말보로 담배까지 꼭 얻어서 가져가는 기둥서방근성이 쩌는 남자였다고 하는데(기둥서방근성은 책에 나온 표현), 불륜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은 자신이 유부남이란 이유로 연락도 제대로 하지 않아 아니 에르노를 애태우고 관계의 끝에서는 에르노의 절절매는 지난 일년이 무색하게 별 미련없이 떠나버린다. 이 책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녀가  이 책으로  그 불륜남의 뒷통수를 쳤다는 점에서는 좀 고소했다. 여성작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 아닐까? 그래, 구원의 가능성 운운 보다는 차라리 '그 놈 엿먹어 보라고 출판했어요.' 라고 말하는게 더 멋있었을거 같다. 그 불륜남 S는 밥 잘먹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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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0-22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네요! 전 못읽겠더라구요 ㅠㅠ

LAYLA 2012-10-22 14:53   좋아요 0 | URL
저도 190쪽 쯤이 고비였습니다. 같은 일기 다른버전을 300페이지나 읽어야 한다니 한숨이...에스의아내에 대한 언급이 많지는 않더군요. 그 여자보다내가 이쁘다는 아르노의 공주병은 ㅋㅋㅋㅋ

야클 2012-10-22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빠 이러지 마...." 라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 아, 내가 실제로 들었던 말이 아니라 드라마 같은데서요.ㅎㅎ

월요일 출근길에 읽는 재밌는 리뷰군요.

LAYLA 2012-10-22 14:55   좋아요 0 | URL
출근길에 보시기에 좀 개운치 않은 내용이긴 하지만 ㅎㅎㅎ 월요일 잘 보내고 계시려나요? ㅎㅎ

Arch 2012-10-24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가 짧은 책을 냈던 이유가 있었네요.

감은빛 2012-10-2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솔직하면서도 핵심을 잘 짚은 평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 책이 한국에서도 출간된 것이 신기하네요.
발행인이 이 책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작가 이름만으로 계약한 것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저도 그 불륜남이 밥 잘먹고 살고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