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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술꾼 - 임범 에세이
임범 지음 / 자음과모음 / 2011년 11월
평점 :
임범의 첫번째 책인 술꾼의 품격을 괜찮게 본 기억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술꾼의 품격보다 이번 책이 더 좋았다. 사실 술 이야기는 술꾼의 품격이 더 각잡고 정식으로 풀어놓는데, 원래 술이 술이라서 마시는게 아니라 취하려고 마시는 거니까. 함께 취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번 책이 더 술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대략 서른명의 술 친구 이야길 담고 있는데, 한 꼭지 서너장 남짓한 글로 한 사람의 인생이며 술에 관한 에피소드를 곶감꿰듯 줄줄이 엮어내는 솜씨가 대단하다. 때론 이런 개인적인 이야길 적어도 되나? 하는 부분도 많이 나온다. 공지영이 첫 이혼하고 잠이 오지 않아 밤마다 술을 마시다 보니 매일 마시게 되었다거나, 김조광수 감독이 남자랑 함께 여관에 있다가 임검에 걸려 경찰들에게 '더러운 놈들' 소리 들은 일이라던가, 그외 지지리 안되는 사업만 하는 이런저런 먹물 친구들 이야기라던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전혀 궁상맞거나 지질해보이지 않고 하나하나가 다 단편소설처럼 근사하게 들린다. 그게 술과 세월의 힘인가보다. 이십대는 술마시고 찔러봤자 이놈이나 저놈이나 연애사밖에 나올게 없는데 오십까지 술을 마시면 이혼 ,부도, 실직, 우울증에 이상의 좌절까지 다들 제 나름의 인생소설을 쓰게 되니 말이다. 이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되 무심하게 툭툭 쓰는 임범의 글솜씨는 단연 최고이다.
술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을 쓴 글이긴 한데, 만난 사람이 다 임범 또래이다 보니 종내는 술 이야기가 아니라 386이야기가 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그것도 그 나름대로 좋았다. 학교 다닐땐 운동하고, 1-2년 쯤은 감옥에서 살고, 아무 생각없이 졸업하고, 뭐 그래도 그런대로 하고 싶은거 하며 살았고 그런 전형적인 386이야기. 한 학기 휴학만 해도 어떤 스펙으로 그 공백을 메꾸어야 하나 벌벌떨고 감옥은 커녕 평생 공중도덕 위반 스티커 하나 떼여본적 없는 희멀건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정말 필요한건 술꾼이야기보다 386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386의 삶이 더 나았다는 게 아니라, 그런 다른 삶도 존재하고 가능했단걸 보여줌으로써 요즘 젊은이들의 창의력을 조금은 자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인생이 결국엔 술잔 기울이는 일로 귀결된다는 염세론으로 빠지면 어떡하나 조금 걱정은 된다.)
책을 읽다보면 임범이 술이야기 쓰려고 신문사 때려친게 아니라, 영화프로듀서 하려고 때려친거란말이 나온다. 사실 자신도 자신의 인생으로 한편의 소설을 쓰고 있었던거다. 이 책을 보니 그의 영화가 기다려진다. 사람 사랑할 줄 알고 더러운 꼴 험한 꼴 다 본 후에도 냉소하지 않는 사람의 작품이 진짜라고 믿기 때문이다. 기자 그만두고 5년을 기다리고 있다는데 곧 영화로 그를 만날 수 있길 바란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