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럽여행기는 웬만해서는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잘 보지 않는다. 감각적으로 쓰려다 허세의 길로 접어드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담백하게 쓰려다가는 여행감상문이 아닌 여행기록문이 되기 십상이다. 오직 먼 북소리만이 나의 책장을 차지하고 있어왔다. 그런데-서재에서 만난 이 칭찬일색의 밑줄긋기들은 모다?? 뭔가 허세스러운것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싸이월드 500만 페이지를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참신함과, 뭔가 있어보이는 척 하는것 같으면서도 자신을 내려놓은 자만 쓸수있는 소탈함을 가진 이 글들은 모다?  

이 책은 동유럽이라는 생소한 소재를 유려한 글솜씨로 그려내고 있다. 저자의 글은 밑줄긋기가 많으니 별로 언급할 것도 없겠다. 다만 나는 이 여행기의 매력이 그녀의 글빨 뿐 아니라 그녀라는 사람 그 자체에 있다는 감상을 남기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윤미나라는 사람을 전혀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녀를 '30대에 자기 능력껏 돈벌며 열심히 살아가는 똑똑한 건어물녀 언니' 정도로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언니는 건어물녀이다. 



맥주를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은 태권도, 서울, 불고기에 대해 이야기했고 우리는 U2, 블러디 선데이, 조이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로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언급하고 나니 화제가 툭 끊겨버렸다. ...진은 사업 때문에 세계 곳곳을 두루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두브로브니크에는 형네 가족이 살고 있어서 겸사겸사 들렀고, 독신에 일밖에 모르고 유일한 취미라고는 포커뿐인데 즐기지만 중독자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머리카락 색깔은 옅은 다갈색, 눈동자가 선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긴 처음 보는 여자들 앞에서 눈을 살벌하게 치뜨며 나 이혼 두 번 했고 한다하는 타짜요, 이런 식으로 말할 남자는 없겠지.  

-153p





언니가 쉬운 여자이길 바라진 않지만 이렇게 철벽녀일 필요는 없잖아. 여행길의 낭만조차 허용치 않는 게 삼십대의 언니라면 내가 이십대에 여행을 한 것이 다행이라 여겨진다. 언니는 내가 술마시며 돌아다녔던 남자들과 우리의 시시덕거림에 대해 가차없이 '그런 싸구려 flirting따위'라고 말할거 같다. 거침없었던 히치하이킹에 대해선 어쩜 그렇게 조심성이 없냐고 눈썹을 치켜올리겠지. 아우아우 언니 너무 열심히 일만 하는거 아니야?란 아우성이 터져나올랑 말랑 한다. 이쁘고 똑똑하고 젊은 언니는 좀 더 인생을 즐겨도 되잖아. 
 
근데, 책을 읽다보니 언니의 건어물근성에 대해서 만큼은 단순히 나이탓이라고 몰아붙일 수 없단 결론이 도출되었다.(물론 나는 언니의 세월과 언니의 성숙을 존중한다.) 
 
꽃돌이 앞에선 끈없는 푸대마냥 늘어지는 언니의 모습을 보라.   





우리의 레이더망에 어느 상점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책을 읽고 있는 잘생긴 청년 하나가 포착되었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 굵고 낮은 목소리와 지적인 말투, 유창하다 못해 우아하기까지 한 영어, 완벽하게 테스코를 찾을 수 있는 정확한 정보 제시 능력! 역시 책을 읽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설사 그가 읽고 있던 책이 체코판 무협지였다고 해도 내 눈에 그는 영락없는 '프라하의 손석희 오빠'였다.    -58p 

척 봐도 어마어마하게 귀여워 보이는 남자애가 저만치 아래에서 자전거를 끌며 우리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키가 크고 늘씬한 여자애가 인절미의 콩가루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슬로베니아 현지 꽃소년이 분명했다. 가까이서 보니 우윳빛 피부에 나팔꽃러첨 울긋불긋 핀 여드름이 까무러치게 사랑스러웠다. ...소년의 이름은 마테우스. 하하하, 마테우스래, 누굴 닮아 이름까지 귀엽니? ...마테우스랑 걷는 동안 나는 좀 이상해져버렸다. 웬일인지 입이 다물어지질 않고 몸은 전화선처럼 풀어도 풀어도 자꾸만 꼬이는 중이다. 앞으로 나무 베는 사람이 되고 싶단다. 내가 들어본 그 어떤 장래 희망보다도 근사하다. ...작별인사를 빌미로 악수를 청하고 염통이 살짝 오그라드는 듯한 달콤한 고통을 느끼며 마테우스를 떠나보냈다. 마테, 너는 너한테 베이는 나무들조차 아프게 할 거야. 함부로 웃지 마.     -212p 







그렇타. 언니는 단지 미에 대한 섬세한 기준을 가진 녀성이었던 것이다. 언니에게서 나의 미래를 본다. 서른이 되면 다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건어물 마음을 가지는거냐고 몰아붙였던거 정말 진짜 완전 미안해진다. 생각해보니 나도 이렇게 5년만 더 살면 언니같은 서른이 될 것을. 지금도 조금씩 건조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흙흙흑 

 

 

여행기임은 분명한데 단순히 여행기라고 말해버리면 레몬같이 노랗고 별사탕같이 톡톡 튀는 언니에게 미안해진다. 언니의 여행기는 '언니'의 여행기임을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이니까. 그러니까, 이 책을 선택할 땐 '동유럽''여행기' 보단 동유럽여행기를 통해 '윤미나'란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면 실망이 없을 것이다. 내가 단지 동유럽에 대해 알고 싶었다거나 여행을 통해 내지에 묶인 삶을 해방시키고자 전전긍긍했다면 이렇게까지 만족스럽진 못했을 것이다. 체코나 슬로베니아와는 전연 상관없는 그녀의 까탈과 편견까지 사랑스러운 건 내가 그녀를 '언니'로 읽어냈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이 그녀를 어떻게 읽어냈을지 궁금하고 또 한편 그녀의 다음 글은 무엇이 될지 궁금해진다. 강원도에서 번역가로 사는 삶에 대해 읊어줄 생각은 없으신지?  좋은 글 감사하고 언니 화이팅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4-05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10-04-06 00: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Forgettable. 2010-04-0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꽃돌이 이야기는 언제나 듀근듀근

LAYLA 2010-04-06 00:58   좋아요 0 | URL
캐나다에서 꽃돌이 소식 꼬옥 전해주셔야해요 흙흙흑

다락방 2010-04-05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꽃돌이 이야기는 언제나 듀근듀근 2

LAYLA 2010-04-06 00:58   좋아요 0 | URL
이 꽃돌이 이야기는 언제나 듀근듀근3

아포지 2010-04-0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참... ㅎㅎ 정말.. 즐겁네요. 알라딘에서 글을 읽으 면서 이렇게 즐거워 본 건 정말 오랜 만이 아닐까 합니다. 고마워요. 이래서 서재질을 끊을 수 없는지도.. 혼자 오래 웃습니다. ㅎㅎㅎ

LAYLA 2010-04-06 00:59   좋아요 0 | URL
apouge님 일상에 작은 웃음 드릴 수 있었다니 저도 참 기분이 좋습니다 :)

프레이야 2010-04-05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리뷰에요.^^
건어물녀가 무슨 뜻인지 이제사 알았다는..ㅎㅎ

LAYLA 2010-04-06 00:59   좋아요 0 | URL
가슴에 팍팍 와닿는 말이죠. 철벽녀, 건어물녀. 히히히

pjy 2010-04-0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어물녀로 그냥 살면 안되는건가요 ^^; 주변의 압박이 심하네요 ㅋ

LAYLA 2010-04-06 01:00   좋아요 0 | URL
요즘은 건어물녀가 트렌드에요. 주변분들이 건어물녀의 매력을 모르나 보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