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아빠>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쁜 아빠 - 신화와 장벽
로스 D.파크 & 아민 A. 브롯 지음, 박형신.이진희 옮김 / 이학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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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회에서 남자의 역할은 독립적이고 지배적이며 경쟁적이며 투쟁적이도록 정형화되어 있다. 남자는 울어서도 안되고, 맞아서도 안되고, 져도 안되며,  맞을때 맞더라도 최소한 폼나게 맞을 줄 알아야 한다. 남자는 함부로 감정을 내 보여도 안되고 수동적이어도 안된다. 우리는 그렇게 사회화 되어왔고, 또 우리의 아이들을 그렇게 다루고 있다. 이미 태교 때부터 아이의 성별을 확인하는 순간,아이의 성역할을 대비한다. 

그렇게 교육되어지고 사회화 된 남자들은 성인이 되면 위협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이나 여자들에게 함부로 배려의 손길을 내밀면 불순한 의도를 갖은 친절로 의심받기 일수이며, 적령기가 지났는데도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언제고 성폭력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남자들은 외롭고 위협적인 존재들이 된지 이미 오래다. 

가정에서의 남자는 어떨까. 아들은 무뚝뚝해서 딸과 달리 애교를 부릴 줄도 모르고, 엄마의 가사일을 돕지도 말상대가 되지도 못한다. 그들은 그저 방문을 닫고 자기들의 세계로 들어가라고 종용당한다. 아빠가 되어서는 아기 기저귀하나 변변히 갈지 못하는 어설픈 남자 역할을 해야하고, 어쩌다 돕는 가사일은 그릇 깨뜨리기로 마무리짓고, 아내가 몇일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소금그릇 하나 찾지 못해 동동거리는 남자의 모습은 드라마에 상투적으로 등장한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멘트와 함께.... 

그러나 실생활의 남자들 모습이 그렇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집 남자만 해도 아이를 위해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숙제를 같이 하기도 하며 밀린 설겆이를 하기도 하고 그리고 결혼 후 지금껏 화장실 청소는 남편의 몫으로 변함이 없다. 요즈음의 남자들은 회사때문에 가정을 희생하던 아버지 시대의 전철을 밟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디어 속의 남자만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을 뿐이다. 

예전의 아버지들은 몹시 권위적이고 아이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위엄이 있어야 했다. 가정을 소중히 여겨도 안되고 대의를 위해 가정은 늘 희생되어야 했다. 아버지가 있다는 것 말고는 집안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능하고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상하고 배려깊은 아버지를 두었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역할이 존재 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녀의 감정을 읽고 자녀를 코칭할 줄 아는 아버지가 자녀를 성공시킨다. 또 남편으로부터 많이 지원 받는 여자일 수록 결혼생활의 행복도가 높다고 한다. 지금껏은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을 강조해 왔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것일뿐 사실은 아버지의 역할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가정의 행복과 자녀의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자녀와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아버지는 사회적, 인지적, 감정적으로 자녀에게 기여하는 아버지다. 그러므로 이제 사회적 남자의 역할에 정형화를 벗어던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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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로마 제국 쇠망사 - 한 권으로 읽는
에드워드 기번 지음, 나모리 시게나리 엮음, 한유희 옮김 / 북프렌즈(시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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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약에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지 않았다며, 카이사르가 6천명의 심복들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정부군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발렌티니아누스 황제가 서로마와 동로마로 로마를 분할하지 않았다면, 2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로마제국은 쇠락하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이 달랐다면 지금쯤의 결과는 어떨까하는 가정도 역사읽기에는 특별난 재미를 준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로마의 역사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이나, 세계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야 하는 필독서이다. 제대로 된 기번의 책을 만나려면 여섯권의 시리즈를 읽어야 하지만 이 책은 제목에서 말하고 있듯 한 권으로 요약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이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많은 부분 기번의 책을 인용하고 있다. 그렇듯 기번은 로마의 역사를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역사가이다.

역사 속에서 ‘제국’은 종종 이야기 되지만, 2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제국은 로마제국이 유일하다. 또 로마제국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서구문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를 알아야 오늘의 세계를 통찰할 수 있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세계를 예측할 수 있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인류에게 반복되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기본을 무시하는 권력은 스스로 망할 수 밖에 없고, 지혜로운 집권자라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했을때 그 결과는 참담했다는 것,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스러지고, 적까지도 포용하는 관용은 무력을 이기는 진정한 힘이라는 것이다.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본 책에는 로마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 보다 쇠락의 길로 떨어지는 과정을 테마로 적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역사서 최고의 테마는 전성기서부터 시작되는 퇴락의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권으로 읽는 로마제국쇠망사에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카이사르 시대 등 로마의 전성기 이야기도 읽을 수 있다. 역사는 연속성을 가지고 진행되는 사실이다. 따라서 따로 떨어진 쇠망사는 역사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방대한 로마사의 요약본인 이 책은 중요한 사건과 거기에 따른 간단명료한 해석이 지루하지 않고, 그렇다고 읽기에 흥미가 떨어지지도 않게 기번의 방대한 <로마제국쇠망사>를 읽어보고픈 욕구를 자극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창부에서 황비가 된 테오도라가 사회복지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럴수 없게 잔인했던 처사가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폭로라는 점에서 특히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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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차가운희망보다뜨거운욕망이고싶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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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봄날이라는 표현이 너무도 어울리게 이 봄은 정말 혹독했다. 개나리와 폭설이 한 컷에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도 그렇고, 펴보지도 못한 꽃송이와 같은 청춘들이 바닷속에서 이유도 모른채 숨져갔다는 것도 그렇다. 그 혹독한 봄 날, 광화문 네거리를 찾았다. 때는 마침 점심시간이었고,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봄볕만큼이나 쏟아져 나온 대로변의 메밀국수집에는 국수 한그릇을 먹기 위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늘어서고, 그리고 그 앞에서는 비틀린 몸으로 휠체어에 기대앉은 장애인들 몇몇이 서명운동을 하고 있었다.  시설에서 나와 자유로운 생활을 하기 위한 서명운동이었는데 나는 그 앞을 지나다가 똑바로 고개 한 번 들지 못한채 서명을 하고 모금함에 돈을 넣고 연필 한자루를 쥐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것은, 봄볕이 따갑기도 했지만, 비틀린 몸을 갖은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설픈 내 ’동정’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청년 김원영 그는 자다가도 뼈가 부러지는 희귀한 질병을 앓는 장애인이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갖지 못한 그는 검정고시와 재활원,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생이 되었고 로스쿨 재학생이 되었다. 흔한 표현으로 그는 장애를 넘어선 장애인이다. 그러나 그는 장애를 넘어섰다는 표현을 부정한다. 장애가 넘어선다고 넘어서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방바닥을 구르던 그때나 로스쿨에 재학하며 책을쓴 지금이나 그는 여전히 두발로 설 수 없는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두발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나는 책 속의 원영씨를 만나면서 많이 부끄러웠다. 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천박한 욕심으로 건강한 내 몸을 학대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지육신 멀쩡한 몸으로 로스쿨에 진학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부끄러웠던 이유는 장애인이 파는 껌은 항상 사야했고, 장애인이 받는 서명운동은 어떤 목적인지도 모르면서 서명해야 했고, 누가 받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한달에 한번은 자동이체로 사랑의 모금을 해야하는, 그러면서 어딘가는 비틀리고 모자란 비정상적인 신체를 갖은 그들로 인한 내 삶의 정상성에 기뻐했던 내 모습을 나에게 들켰기 때문이었다.  유치하도록 감상적인 나는 ’동정’하기를 즐기며, 사실은 내가 멀쩡하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원영 씨가 자신의 정체성을 장애인이라고 규정했듯이 나는 내 정체성을 정상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비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부족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정상인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나는 정상인가.. 정상은 비정상적인 것이 존재함으로 가치가 있다.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 써왔던 내 속의 나는 정상인가..
’다름’은 비정상과 정상의 존재를 무상케 한다. 장애인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동정 또한 필요치 않다. 장애를 극복할 이유가 없듯이, 동정을 가장한 우월감 또한 갖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각기 다를 뿐이고, 장애조차도 하나의 개성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다양한 신체조건의 인간들이 서로 불편함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누구나 하나의 인간으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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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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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601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빈민법을 제정하였다. 빈민법은 빈곤의 문제를 처음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대처했다는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빈민법은 빈민의 구제보다는 빈민의 통제에 더 많은 초점을 두었고, 빈민의 노동능력에 따라 차등대우하였다. 빈민법은 여러번의 개정을 통해 1834년 신빈민법을 완성하였다. 그 후 100년이 지난 어느날 오웰은 영국의 구빈원을 전전하고, 파리의 지하굴에서 접시를 닦으며 빈민으로서 삶을 체험하고 그 경험을 소설형식으로 썼다. 이것이 바로 그의 첫번째 작품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다. 
구빈원은 영국 빈민법시대에 만들어진  일명 노숙자쉼터이다. 구빈원에서는 노숙자들이 마치 죄수들처럼 취급되었다. 그래도 그 시대에 빈민구제라는 명목의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것이 영국의 저력이라고 말 할 수 있으려나. 반대로 제도적인 빈민구제 시스템은 없었지만 비교적 자유로웠던 파리의 밑바닥 생활과 비교한다면 스스로 살게 하는 힘은 파리의 빈민에게 더 충만했지 않았나 싶다.

아침 출근시간의 지하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양복이 구겨지고, 세련되게 세팅한 머리가 헝클어지는일이 번번히 벌어지는 지옥철을 타고 아침마다 일터로 향하는 수도없이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문득 서글퍼진다. 무엇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아귀다툼을 하며 살아야만 하는가.... 

오웰은 노동의 삶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산업혁명기에 파리의 지하실에서 접시를 닦는 노예와 같은 노동을 하며 노동의 가치에 대해 의심했다. 업주를 제외하고는 결국 아무도 이익을 얻지 못하는 무익한 노동을 사람들은 어째서 당연시하는가. 오웰은 이와같은 무익한 노동이 멈추지 않는 것은 대중이 여가를 갖게 되면 위험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일부 기득권층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오웰은 한달에 한 번의 숙박만을 허용하는 런던의 구빈원들을 돌며, 노숙자들에게 시혜적인 일회성의 자선을 베풀것이 아니라 이들이 스스로 자활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노숙자는 개인적인 게으름때문에 걸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다. 희망을 갖지 못한 개인들이 가득한 사회에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1934년의 영국뿐만 아니라 2010년의 서울에도 노숙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게 미래가 존재하는가. 

아침마다 지옥철에서 내려서면서, 표정없는 개미떼처럼 일터로 향하는 근로자들과 일반적인 행동규범에서 벗어난 자유로움과 따분함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얼굴로 종이상자를 깔고 앉은 노숙자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서글픔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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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사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폭력사회 - 폭력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볼프강 조프스키 지음, 이한우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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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을 한다. 법 앞에 시시콜콜 하소연을 하기에는 법의 문턱은 너무 높고 그보다는 손쉬운 해결책으로 주먹이 빠르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주먹을 쓰는 폭력이나, 법의 심판이나 개인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매 한가지란 생각이다. 
국가는 자국민의 안녕을 위해 이바지할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헌법 제1장 2조 2항에는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국민은 국가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또, 대한민국헌법 제2장 1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도 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국민의로서의 의무를 져버리지 않는 국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로 ’모든 국민’에게 해당되는 조항이 아니다. 국가의 정책에 반하는 사상을 표하는 국민은 국가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까.. 없을까..  헌법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나는 이것이 참으로 궁금하다. 왜냐하면 국가는 국민에게 때로는 무자비하게 폭력적이기도 하니까.

폭력사회. 나는 단순하게도 사회의 악, ’조폭’을 떠올렸다. 그러나 폭력은 조폭들의 주먹다짐 정도의 미시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폭력은 도처에 만연해 있고, 폭력은 국가의 질서를 잡는 틀이기도 하다. 하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조폭들은 때때로 국가를 위해 일하기도 한다(어느때냐고..? 그야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차마 국가의 이름으로 행할 수 없는 일을 국가가 해야 만 할 때.....)
저자는 사람들이 서로 협력해 사회를 형성하는 것은 인간이 본시 사회성을 지닌 동물이라서가 아니라 폭력으로 부터 해방되기 위해 단합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럴듯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또, 폭력을 피해기 위해 형성한 사회는 폭력으로 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그 폭력은 사회적 규범을 형성한다. 평상시 국가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저항할 수 없는 개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나로서는 ’아하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폭력’을 역사적 측면에서 다각도로 조명한다. 고문, 무기, 사냥... 등등 평소 폭력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읽다보면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얼마나 끔찍하고도 잔인한 존재인지 혐오감이 든다. 저자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본능을 능가하며 고정되어 있지 않는 정신력, 그리고 인간이 갖은 파괴력이 인간으로부터 폭력을 무한히 행하게 하며, 폭력은 인류의 숙명이라고 한다. 생각할 수록 암담한 이야기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타적 존재, 문화적 존재인 인간관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너무나 섬뜩해서 받아들이기 힘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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