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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1601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빈민법을 제정하였다. 빈민법은 빈곤의 문제를 처음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대처했다는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빈민법은 빈민의 구제보다는 빈민의 통제에 더 많은 초점을 두었고, 빈민의 노동능력에 따라 차등대우하였다. 빈민법은 여러번의 개정을 통해 1834년 신빈민법을 완성하였다. 그 후 100년이 지난 어느날 오웰은 영국의 구빈원을 전전하고, 파리의 지하굴에서 접시를 닦으며 빈민으로서 삶을 체험하고 그 경험을 소설형식으로 썼다. 이것이 바로 그의 첫번째 작품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다.
구빈원은 영국 빈민법시대에 만들어진 일명 노숙자쉼터이다. 구빈원에서는 노숙자들이 마치 죄수들처럼 취급되었다. 그래도 그 시대에 빈민구제라는 명목의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것이 영국의 저력이라고 말 할 수 있으려나. 반대로 제도적인 빈민구제 시스템은 없었지만 비교적 자유로웠던 파리의 밑바닥 생활과 비교한다면 스스로 살게 하는 힘은 파리의 빈민에게 더 충만했지 않았나 싶다.
아침 출근시간의 지하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양복이 구겨지고, 세련되게 세팅한 머리가 헝클어지는일이 번번히 벌어지는 지옥철을 타고 아침마다 일터로 향하는 수도없이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문득 서글퍼진다. 무엇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아귀다툼을 하며 살아야만 하는가....
오웰은 노동의 삶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산업혁명기에 파리의 지하실에서 접시를 닦는 노예와 같은 노동을 하며 노동의 가치에 대해 의심했다. 업주를 제외하고는 결국 아무도 이익을 얻지 못하는 무익한 노동을 사람들은 어째서 당연시하는가. 오웰은 이와같은 무익한 노동이 멈추지 않는 것은 대중이 여가를 갖게 되면 위험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일부 기득권층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오웰은 한달에 한 번의 숙박만을 허용하는 런던의 구빈원들을 돌며, 노숙자들에게 시혜적인 일회성의 자선을 베풀것이 아니라 이들이 스스로 자활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노숙자는 개인적인 게으름때문에 걸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다. 희망을 갖지 못한 개인들이 가득한 사회에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1934년의 영국뿐만 아니라 2010년의 서울에도 노숙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게 미래가 존재하는가.
아침마다 지옥철에서 내려서면서, 표정없는 개미떼처럼 일터로 향하는 근로자들과 일반적인 행동규범에서 벗어난 자유로움과 따분함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얼굴로 종이상자를 깔고 앉은 노숙자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서글픔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