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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업튼 싱클레어 지음, 채광석 옮김 / 페이퍼로드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육식의 폐해를 다룬 <육식의 종말> 정도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육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도축과 가공 단계에서의 비위생적인 환경을 다룬 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글>을 읽음으로써 육식에 대한 과도한 식탐을 끊는 기회로 삼고자 시뻘건 표지의 책을 골라 들었던 나는 조금 당황했다. 업튼 싱클레어는 <정글>로 육식의 해악이나 육가공식품의 비위생성을 고발하고자 한 것이라기보다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의 비극과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본의 권력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온 식구들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오직 '유예'라는 희망만을 품고 살며, 모든 돈을 거기에 쏟아 넣었다. 그들은 힘이며, 실체이며, 영혼이며, 육체인 돈에 의해 살고, 돈이 없어 죽는 가난한 노동자였다.(251쪽)
리투아니아 이주 노동자 유르기스는 사랑하는 오나와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고향을 떠나, 시카고의 가축수용장에 취업한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면 꽤 많은 돈을 벌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자나 거지가 모두 똑같이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이윤을 향한 자본주의의 현실은 유르기스의 상상과는 달랐고, 가축수용장의 노동환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인 노동환경임에도 일하고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면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조차 받을 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건설업자는 가난한 이주민들이 집 대금을 내지 못하리라는 예상 속에 장기대출로 집을 사게게 하고, 대출금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다시 집을 빼앗는 수법으로 유르기스를 비롯한 보통사람들의 삶을 짓밟는다. 이처럼 부패와 타락이 만연한 비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유르기스는 매번 튼튼한 몸으로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의 꿈은 자본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의 피를 빨아들이는 현실 속에 무너져 가고, 희망을 안고 유르기스와 함께 시카고로 왔던 오나와 리투아니아 가족들은 추위와 고통 속에 내던져져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가장 밑바닥의 삶으로 추락한다. 유르기스가 밟았던 희망의 땅은 다름아닌 '정글'이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만큼 멍한 상태였지만, 그의 영혼 속에서 거대한 격정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리고 새로운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파멸의 구렁텅이를 뚫고 나왔다. 그는 절망의 굴레를 벗어 던졌다. 세계 전체가 변했다. 그는 자유로웠다. 비록 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을지 모르고 구걸하다가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의지와 목적을 가진 인간이 된 것이다. 더 이상 현실의 노리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위해 싸울 것이며,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을 것이다! (507쪽)
산업현장에서 거대한 톱니바퀴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뿌듯하게 여겼던 유르기스는 이주 노동자 생활 4년만에 자본이 주인인 세상은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만인의 전쟁터임을 알았다. 처음 가축수용장에 왔을 때 돼지들의 잔인한 도축 장면을 보면서 자신이 돼지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역시 돼지 이상의 처지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고용주들에게 노동자는 노동하는 돼지에 불과했다.
노동자, 범죄자, 방랑자, 노숙자가 되어 시카고 주변을 떠돌던 유르기스는 어느날 추위때문에 우연히 찾아든 강당에서 단결함으로써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의 연설을 듣는다. 이후 유르기스는 사회주의자들의 회합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자신과 가족들을 덮친 불행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야기는 유르기스가 사회주의자로서 인간다운 취급을 받는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희망을 품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그 답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정글>은 1906년 출판 직후, 미국의 도축장과 육가공 공장의 위생 상태에 대한 비난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식품위생법'과 '육류검역법 제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한 1900년대 초엽 미국 노동자들의 실상이나 자본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육류가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위생상태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있다. <정글>의 모습이 과거 미국에만 국한된 일이었거나, 세월이 흐른만큼 노동환경이나 자본에 의한 인간성 말살의 분위기가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고 묘사된 <정글>의 육가공식품 공장의 위생상태가 끔찍하리만큼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의 심장을 겨냥했는데 어쩌다보니 위에 명중하고 말았다' 라는 소회를 남긴 작가 업튼 싱클레어는 <정글>이 일으킨 '식품 위생에 관한' 사회적 반향에 만족했을까, 당황했을까. 어느쪽이였든 싱클레어는 안전한 먹거리는 '식품위생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에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