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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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머니의 희생은 많이 화자되지만 아버지의 희생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좀 촌티가 나는걸로 여기는 사람도 많잖아. 알코올중독 아버지, 폭력주의 아버지, 권력 지향 부정부패 아버지. 아버지 이미지는 이런 식이야. 아버지들이 만든 안락에 기대 살면서도 그래. (207쪽)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의 주인공 유르기스는 아내의 죽음에 이어 하나뿐인 피붙이 아들조차 진흙탕에 빠져 죽고나자 그때까지 삶의 터전으로부터 도망친다.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또다른 가족(아내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이 아니었고, 따라서 유르기스에게 강제된 책임은 없었다. 가축수용장의 비참한 노동환경을 견디며 짐승같이 '돈'만을 벌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집과 공장을 떠난 유르기스는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자유'를 느낀다. 아내와 아이는 처참한 현실을 견디고 열심히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할 이유였지만,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돈벌이를 위해 자신을 죽여야 할 이유조차 함께 사라진 것이다.

 

<소금>의 주인공 선명우는 푸지게 눈이 쏟아지던 막내딸의 생일에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후에 밝혀진 가출 당시의 상황은 자못 작위적이지만, 그의 가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생물학적으로 결코 아버지가 될 수 없는 나도 그 이유에 자못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쨌든 그는 가족을 버린 것이 아니냐는 원망섞인 지탄 대신 충분히 그럴만 했다라고 수긍하는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평생 빨대와 깔대기 노릇을 하며 아내와 딸들을 위해 시종이 되어 그림자처럼 살았다. 한때 그에게도 꿈과 사랑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가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우선되었다. 선명우의 아버지는 그에게 아들로서의 책임으로 그를 옭아매었고, 그의 아내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운명을 강요했다. 선명우는 바로 그것, 가족의 이름으로 져야하는 책임과 의무를 버리기로 한 것이다.

 

가출한 후 선명우는 떠돌이가 되었다. 주로 자동차에서 자고 자동차에서 먹었다. 네개의 바퀴는 어디든 그를 데려다 주었다. (223쪽)

 

가출한 후 선명우는 자유를 느낀다. 가족을 두고, 자식들을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질책이 당연한 상황임에도 나는 가출한 후 떠돌이가 되었다는 이 한 문장에 가슴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은 해방감을 느낀다. 자신의 삶에서 한 번도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회한을 뇌까리는 선명우의 일생일대의 결단이 반가웠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아버지의 울타리에서 부족함 없이 살던 그들의 가족이 '자립'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건 그의 말대로 결과적으로 보면 나로 인해 그 애들도 인생의 새로운 찬스를 맞은 거(338쪽)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책임과 의무를 벗어던진 선명우가 또다른 가족을 만든 것에서는 의문이 든다. 생물학적으로, 즉 핏줄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강제되는 책임과 의무가 없다거나 또는 가볍다고 여긴 것일까. 책임과 의무가 없는 가족을 과연 가족이라 봐도 좋은 것일까. 그건 그냥 작은 생활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언제 깨뜨려도 양심의 가책도 없고, 법적인 책임도 없는 흐지부지한 그런 관계. 자유는 있지만 결속력은 약한, 그래서 언제 깨질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하는. (선명우의 아내 역할을 하는 함열댁은 선명우가 자신들을 박차고 떠나갈까봐 불안한 모습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핏줄은 당기는 법'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가족은 각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이기 때문에 강제되는 의무가 사랑의 탈을 쓴 희생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것에 대해 '아버지'를 통해 묻는다. 혹시 '가족애'는 체제가 굳건히 유지되기 위해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때문에 선명우는 가족에게로 돌아가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빨대'노릇을 하며 '지겨워'를 연발하던 아버지의 자리 대신 한 사람의 인간 '선명우'로서 남은 삶을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체제의 세뇌로 부터 벗어나 주체적인 한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가출을 '책임에 대한 회피'라기 보다는 '용기'라고 추켜세우고 싶다. 그러나 선명우가 내 아버지, 내 남편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가진 최대의 의문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로 등장하는 화자 역시 원치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가 될 위기에 처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자식을 위해 그가 치사함을 견뎌내야 하는 것은 차치하고서, 어쨌거나 그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세상엔 두가지의 인간이 존재한다. 자식이거나, 혹은 부모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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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업튼 싱클레어 지음, 채광석 옮김 / 페이퍼로드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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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육식의 폐해를 다룬 <육식의 종말> 정도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육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도축과 가공 단계에서의 비위생적인 환경을 다룬 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글>을 읽음으로써 육식에 대한 과도한 식탐을 끊는 기회로 삼고자 시뻘건 표지의 책을 골라 들었던 나는 조금 당황했다. 업튼 싱클레어는 <정글>로 육식의 해악이나 육가공식품의 비위생성을 고발하고자 한 것이라기보다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의 비극과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본의 권력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온 식구들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오직 '유예'라는 희망만을 품고 살며, 모든 돈을 거기에 쏟아 넣었다. 그들은 힘이며, 실체이며, 영혼이며, 육체인 돈에 의해 살고, 돈이 없어 죽는 가난한 노동자였다.(251쪽)

 

리투아니아 이주 노동자 유르기스는 사랑하는 오나와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며 고향을 떠나, 시카고의 가축수용장에 취업한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면 꽤 많은 돈을 벌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자나 거지가 모두 똑같이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이윤을 향한 자본주의의 현실은 유르기스의 상상과는 달랐고, 가축수용장의 노동환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비인간적이고 비위생적인 노동환경임에도 일하고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면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조차 받을 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건설업자는 가난한 이주민들이 집 대금을 내지 못하리라는 예상 속에 장기대출로 집을 사게게 하고, 대출금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다시 집을 빼앗는 수법으로 유르기스를 비롯한 보통사람들의 삶을 짓밟는다. 이처럼 부패와 타락이 만연한 비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유르기스는 매번 튼튼한 몸으로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의 꿈은 자본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의 피를 빨아들이는 현실 속에 무너져 가고, 희망을 안고 유르기스와 함께 시카고로 왔던 오나와 리투아니아 가족들은 추위와 고통 속에 내던져져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가장 밑바닥의 삶으로 추락한다. 유르기스가 밟았던 희망의 땅은 다름아닌 '정글'이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만큼 멍한 상태였지만, 그의 영혼 속에서 거대한 격정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리고 새로운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파멸의 구렁텅이를 뚫고 나왔다. 그는 절망의 굴레를 벗어 던졌다. 세계 전체가 변했다. 그는 자유로웠다. 비록 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을지 모르고 구걸하다가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의지와 목적을 가진 인간이 된 것이다. 더 이상 현실의 노리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위해 싸울 것이며,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을 것이다! (507쪽)

 

산업현장에서 거대한 톱니바퀴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뿌듯하게 여겼던 유르기스는 이주 노동자 생활 4년만에 자본이 주인인 세상은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만인의 전쟁터임을 알았다.  처음 가축수용장에 왔을 때 돼지들의 잔인한 도축 장면을 보면서 자신이 돼지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역시 돼지 이상의 처지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고용주들에게 노동자는 노동하는 돼지에 불과했다.

노동자, 범죄자, 방랑자, 노숙자가 되어 시카고 주변을 떠돌던 유르기스는 어느날 추위때문에 우연히 찾아든 강당에서 단결함으로써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의 연설을 듣는다. 이후 유르기스는 사회주의자들의 회합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자신과 가족들을 덮친 불행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야기는 유르기스가 사회주의자로서  인간다운 취급을 받는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희망을 품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그 답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정글>은 1906년 출판 직후, 미국의 도축장과 육가공 공장의 위생 상태에 대한 비난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식품위생법'과 '육류검역법 제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한 1900년대 초엽 미국 노동자들의 실상이나 자본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육류가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위생상태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있다. <정글>의 모습이 과거 미국에만 국한된 일이었거나, 세월이 흐른만큼 노동환경이나 자본에 의한 인간성 말살의 분위기가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고 묘사된 <정글>의 육가공식품 공장의 위생상태가 끔찍하리만큼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의 심장을 겨냥했는데 어쩌다보니 위에 명중하고 말았다' 라는 소회를 남긴 작가 업튼 싱클레어는 <정글>이 일으킨 '식품 위생에 관한' 사회적 반향에 만족했을까, 당황했을까. 어느쪽이였든 싱클레어는 안전한 먹거리는 '식품위생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에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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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면 처음의 그 잔인했던 할머니나 이중적인 신부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 책을 읽은 독자의 리뷰에 적혔더란 이 한 문장만으로도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읽을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슬라예보 지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라는 거창한 미사여구가 없더라도 말이다. 책을 읽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먼저니까 말이다. 그래야만 타인을 이해하고 난 후라야만 나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복자들>을 통해 말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부조리할지라도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고.

그러나 어쨌든 그는 프랑스인인데 중국 혁명 당시 광둥 정부를 주요 무대로 소설을 썼다하니, 좀 의아하다.  더구나 외국인으로서 중국을 보는 여행자 시각에서 씌여진 소설이 아니라하니 더더욱.

 

 

 

 

 

 

 

 

 

 

 

파트릭 모디아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힘입어 <지평>, <청춘시절>,<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등이 우리나라에서 잇달아 출간되었다. 그 중에서 고른 책은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196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진정한 삶'을 찾아 나선 한 여인의 흩어진 생의 흔적을 쫓는다는 책소개에 이어 열어본 책의 첫 페이지에 등장한 주인공은 늘 드나드는 카페의 같은 테이블에 앉고, 그리고 그녀는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소개된다. 궁금하다. 그녀가 누구인지.

 

 

 

 

 

헌 해의 마지막과 새 해의 시작을 여행으로 잇는 바람에 읽고싶은 신간 목록 작성을 못할까봐 조금 마음 졸였네요. 얼렁뚱땅 이렇게라도 작성하고 나니, 밀린 숙제를 끝낸 기분입니다.

새해의 첫 시작이 남들보다 좀 늦은 탓에 정신이 '두 배'로 없네요.

바쁘지만 기쁘게, 즐겁게 읽고, 읽은 것에 대해 많이 기억하고 싶어요. 그것이 15기 신간평가단을 시작하는 제 다짐입니다.

일단 정신부터 차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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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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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을 개척하려는 이주민들과 황금을 찾는 노다지꾼들, 열대동물을 포획하려는 사냥꾼들로 어수선한 마을 엘 이딜리오는 아마존 밀림 지역이다. 어느날 엘 이딜리오에 아마존 원주민 수아르 족이 백인의 시신을 가져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새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온 이주민 중 한 명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오랜 세월 수아르 족과 함께 아마존의 이곳저곳에서 생활하면서 밀림에서 생존해 나가는 법을 배운 지혜로운 노인이다. 반 수아르족과 같은 그는 새로운 이주민들과 노다지꾼들, 사냥꾼들이 들끓으면서 나날이 황폐해지는 아마존을 가슴아프게 바라본다. 그러던 중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깨닫고, 책을 읽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노인이 즐겨읽는 책은 역사책도 환경에 관한 책도 인문서도 아닌 사랑 이야기 였으니, 다소 희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딱딱하고 형식적인 내용인데다 자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세상의 이야기들은 어떤 호기심이나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자극제가 되지 못한다(72쪽)고 말하는 노인은 연애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건 사랑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 일세.'(134쪽) 인간의 이기심을 앞세운 개발과 포획으로 황폐해지는 아마존에서 사랑 이야기에 빠진 노인이 온몸으로 말 하는 것은 인간은 무엇보다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에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등장한다. 양키로 대변되는 무지막지한 사냥꾼의 공격을 받고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상처를 입은 숫컷 살쾡이의 목숨을 끊어줄 것을 바라는 암살쾡이는 노인을 숫컷이 은신하고 있는 곳으로 이끌고 간다. 암살쾡이는 무엇보다 고통 속에 죽어가는 숫컷의 목숨을 단번에 끊어주기를 원한 것이다. 노인이 숫컷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자리를 떠나자 암살쾡이는 숫컷에게로 다가간다. 노인이 읽었을 무수한 사랑 이야기와 살쾡이의 사랑 이야기가 겹쳐지는 순간이다. 사랑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는 오만은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설계되고 창조되었다고 믿는 인간의 어리석음의 한 가지다.

 

작가는 이 책을 자본에 의해 살해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바친다고 밝히면서 이 책이 무엇보다 환경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이 책은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랑만이 인간의 독선으로부터 지구를, 세상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구할 수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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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27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이 소설을 읽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각나기도 했고, 결말이 찡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비의딸 2014-12-28 14:04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은 많은 분들이 <노인과 바다>를 떠오른다 하시고, 옮긴이의 해설도 그랬죠. 그런데 전 엉뚱하게 `사랑`에 촛점이 맞더라구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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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영국의 침략으로 서서히 무너져가는 나이지리아의 작은 마을 우무오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남자로서의 '명예'를 가장 중요시 하는 주인공 오콩고가 부족의 전통과 함께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렸다.

 

오콩고의 아버지는 음악과 시를 사랑하고 전쟁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가족을 부양하고, 부를 쌓고, 전통을 고수하기 위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남자다움으로 치부되던 이보족에게 오콩고의 아버지는 유약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를 보고 자란 오콩고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인 것을 부끄러워했고,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다. 이로인해 의식적으로 공격적이고, 권위적인 사람이 된 오콩고는 청년시절에는 마을에서 가장 강한 씨름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악착같은 노력으로 점차 부를 늘려갔으며, 전쟁시에는 앞장을 서는 등의 노력을 통해 진정한 남자에게만 하사되는 칭호를 받은 명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남자다운 명예를 삶의 기준으로 삼은 오콩고는 자신이 나약하다고 여겨질 것을 두려워해 친아들 처럼 소중히 여겼던 소년 이케메푸나를 죽인다. 그러나 이케메푸나의 죽음은 후에 오콩고의 친아들 은워예가 오콩고와 마을의 전통을 떠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오콩고는 여신의 뜻을 거슬러 마을에서 유기한 추방을 당한다. 오콩고가 마을을 떠난동안 우무오피아에는 교회가 세워지고, 영국정부가 들어서서 마을의 기초와 전통을 흔든다. 교회는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던 부랑자를 비롯하여 부족에게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그들을 개종시키면서 세를 확장했다.  또한 영국여왕을 앞세운 정부는 새로운 법을 만들고 토착민들에게 그를 지킬 것을 강요한다.

7년후 우무오피아로 돌아온 오콩고는 마을사람들이 기독교로 무장한 영국의 침략을 묵인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힘과 권위, 남자다운 명예를 소중히 하는 오콩고에게 그것은 부족이 나약해졌다는 증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개인일뿐인 오콩고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의 운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섭게 들이치는 새로운 시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강한 남자 오콩고는 부족의 운명과 함께 산산이 부서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 아체베는 묻고있다. 정말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이냐고. 우무오피아 마을에 온 초기의 선교사 브라운 씨 처럼 자신들과 다른 아프리카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은 정말 없었던 것이냐고.

 

아체베는 이 소설을 통해 유럽인의 쪽으로도 아프리카인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 시각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영국이 침략하기 전의 아프리카가 지상 낙원 이었다라거나, 아프리카 전통의 몰락이 영국 탓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무오피아를 비롯한 나이지리아의 여러 부족이 몰락하게 된 것은 새로운 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오콩고나 오비에리카의 입을 통해 여러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작은신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한 야만적이고 잔혹한 아프리카의 주술적 행위가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백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따르지 않으면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다 라고 협박하는 행위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 물음은 유럽의 문화건 아프리카의 문화건 서로 다른만큼 각각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파이 이야기>를 쓴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은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에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 대해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만남이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간 이유는 어느 한쪽이 열등했기 때문이 아니라 둘 모두가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라고 했다. 서양에서 보는 아프리카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아체베의 다른 책 <신의 화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역시 결혼식이나 장례식, 축제 등의 아프리가 전통문화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허식이나 주술행위가 많다라고 여겨지지만, 이방인의 눈에 보이는 우리의 전통문화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존중하는 것, 이것이 세계문학을 읽어야만 하는 근거이며, 아체베의 소설이 널리 읽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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