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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열정적으로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그때만큼 좋아할 수는 없다. 순수한만큼 서툴렀고, 두려운 게 없었으며 늘 무언가를 갈구했던 때였다. 이제 '관조'를 아는 나이가 되고보니, 무라카미 류의 작품 스타일도 많이 차분해졌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장기침체에 빠진 일본의 4050세대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2차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파리, 외과의사 라비크와 여배우 조앙 마두의 사랑으로 이십대의 한 때를 가슴떨려 했었다. 이름도 매혹적인 '칼바도스'를 처음 안 것도 <개선문>을 통해서였다.

이 봄에 다시 읽는 개선문.

그리고 칼바도스 한 잔?!!

 

 

 

 

 

 

 

2월에 새로 발간된 소설이 많지 않은 것인지, 나의 책 읽기가 게을러진 것인지 손이 가는 책이 별로 없다. 무라카미 류와 레마르크를 사랑했던 지난 추억이 없었더라면 이나마도 고르지 못했을 것 같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출판사나 서점 사정들은 좀 나아졌는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사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독자인 나로서는 책 한 권 사는 일이 전만큼 녹록하지 못하다. 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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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3 1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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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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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보스망스는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어지지 못하고 덜컥 끊겨버리는 일화들을, 이름 없는 얼굴들을, 스치듯 지나가버린 만남들을'로 시작되는 <지평>은 육십대의 소설가 보스망스가 사십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과거의 사람들을, 정확히는 스무 살 무렵 짧게 스쳐지나온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 사십여 년의 공백 동안 보스망스는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로 성장하는 한편으로, 일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단조로운 흐름의 시간을 지내왔다. 그런데 문득 떠올리는 젊은 시절에 대한 기억이라니. 문제는 기억을 단순히 추억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추억 속의 그녀, 마르가레트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왜, 어째서 보스망스는 사십여 년을 지내고서야 마르가레트를 찾아 나선 것일까.

 

사십 년 전, 시위로 어수선한 거리에서 보스망스는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보스망스는 차분한 음성과 느린 걸음걸이, 시위대에 휩쓸리다 입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마르가레트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마르가레트에게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외로움과 고독 따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고무친의 보스망스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학대를 받고 자란 탓에 체념이 성격이 되어 삶과 사람에게 늘 관조적 일정 거리를 유지하던 보스망스와​ 어머니와 절연하고 한 남자의 추적에 시달리는 마르가레트(189쪽)는 이유없는 죄책감과 오랜 학대로 인한 자괴감,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감 따위를 감추고 있음을 서로에게서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 순간부터 서로에게 스며들지만,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던 시간은 어느날 갑자기 종말을 고하고, 마르가레트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없이 보스망스를 떠난다. 그들은 같은 시간을 다른 공간에서 살게 된것이다. 서로의 생사도 모른채.

그렇게 사십 여 년이 지난 후, 보스망스는 불현듯 그녀를 찾아나선다. 스물 몇편의 책을 출판할 정도로 안정적인 작가가 되고,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좋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보스망스에게 시간을 되돌리려는 노력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영원히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을 무렵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간 시절의 사랑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작가는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새로운 만남에 여지를 줌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그들의 첫만남이 상처였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이어갈 만남이 치유의 시간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만남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분명 하찮았을 작은 만남'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라고 김춘수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에게 이제야 말로 꽃이 되려는 몸짓을 시작하는 희망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들이 서로에게 정말 꽃이 되었을지는 온전히 독자의 상상에 맡긴채로.

 

왜 나는 그때 마르가레트를 만나지 못했던가? 왜 몇 달 뒤에야 만났던가? 우리는 분명히 이 길에서, 아니면 저 모퉁이 카페에서 서로를 보지 못한 채 스쳐지나갔을 것이다.(92쪽)

인생은 타이밍의 총합이다. 만남과 헤어짐, 첫눈에 반함, 행운이나 불운한 사고에 따른 부상과 죽음까지도, 적절한 타이밍을 필요로 한다. 그 모든 것이 찰라적 사건들의 연속이며, 그것이 인생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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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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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것은 없다는'는 말을 좋아하는 호프웰 부인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며, 많은 류의 사람들이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밥 벌이를 하며 살고 있으니만큼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다라고 여긴다. 또한 그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된다라고 믿는 낙관적인 사람이다. 그녀는 오래전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농장을 경영하며, 열 살에 총기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서른 두살의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철학 박사를 비롯한 기타의 여러 학위를 가진 딸은 시골 농장의 어머니나 주변인물들의 안일한 모습을 보며 삶은 기본적으로 허무하고 무의미하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자신만큼은 무의미한 일상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호프웰 부인이 한쪽 다리를 잃은 자신을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대하며 보호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는다. 그녀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 '조이'를 버리고, '헐가'라는 흉칙한 이름으로 개명하는 등의 소극적인 반항을 한다. 조이는 많이 배웠지만 거친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고, 어머니를 떠나 자신만의 삶을 살 용기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과 여타의 사람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감상적인 태도가 못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같이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농장에 성경을 팔겠다는 열아홉 살의 청년이 찾아오고, 타인에 대한 친절을 미덕으로 삼는 호프웰 부인은 청년을 거절하지 못하고 점심식사를 대접한다. 호프웰 부인은 그 청년을 순진하고 진실한 좋은 시골 사람으로 여겼다. 타인에 대해 그런식의 감상적인 태도를 보이는 어머니를 경멸하는 조이는, 능청맞게 식사를 하고 앉은 청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지만, 바로 그날 어머니 몰래 청년과 만날 약속을 한다.

다음날 청년을 다시 만난 조이는 투정하듯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을 말하는 청년에게서 '진정한 순수함'을 본다. 그녀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닫았던 마음을 열고, 비틀어진 내면의 근원인 의족을 내보인다. 바로 그 다음 순간, 순수함의 탈을 벗어던진 청년은 조이를 모욕하며 의족을 들고 달아난다. 

황급히 달아나는 청년을 멀리서 바라 본 호프웰 부인은 청년이 성경을 팔러 다른 마을로 가고 있다 라고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저쪽에 사는 깜둥이들한테 성경을 팔러 갔던 모양이야. 순진하기도 하지. 그래도 우리 모두가 저렇게 순진하다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거야.'(394쪽)

 

이 책에 실린 플래너리 오코너의 31편의 단편 중 하나인 「좋은 시골 사람들」을 읽고, 한동안 머리가 멍했다. 호프웰 부인이, 딸 조이가 겪은 일을 알고 난 후에도 세상에는 여러종류의 사람이 있으며, 그렇기때문에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라는 말로 청년의 악행을 이해하게 될지 궁금하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상황을 맞딱드리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 만큼이나 다르지 않은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코너의 작품을 읽고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불행을 직접 겪지 않는다면 사람은 누구나 얼마든지 너그러울 수 있다. 그러나 오코너는 너그러움이나 낙관적인 태도 역시 이기적인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좋은 시골 사람들」처럼 오코너의 단편들은 대체로 비극으로 끝을 맺는데, 이러한 결말은 느닷없고 당혹스러우며, 자못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다는 호프웰 부인의 지론은 자기만족에 빠져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추측은 언제고 빗나갈 수 있는 것이다. 「숲의 전망」에 등장하는 자만심 가득한 노인은 자신을 꼭 닮은 아홉살 손녀에게 말한다.  '주의하지 않으면 네가 무얼 잃어버릴지 늘 유념하렴.'(456쪽) 자신이 무엇을 잃게될지에 대해 늘 주의를 기울였던 노인은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손녀를 비롯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에서는 불행한 가족사로 인해 불량소년이 된 소년을 구원하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이타주의자 셰퍼드가 등장한다. 자신을 믿지않으며 도움을 거부하는 소년을 향해 셰퍼드는 '선의는 이기는 법이야.' 라고 하자, 소년은 '틀렸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638쪽) 라고 대답한다. 셰퍼드는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여겼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아이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오만한 의지나 이기적인 믿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이며, 삶이라는 것이 오코너가 이 단편소설집을 통해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플래너리 오코너는 25세에 루푸스 병의 발병으로 고향인 미국 남부지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농장에서 지내며 글을 썼다. 교육받은 병약한 젊은이가 농장을 경영하는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모습은 어쩌면 오코너 자신의 모습이다. '저는 상상력이 없어요. 재능이 없어요. 저는 창조할 수 없어요. 저한테 있는 건 그런 것들에 대한 열망뿐이에요. 왜 그것도 죽이지 않으셨나요? 어머니, 왜 내 날개를 꺾었나요?'(488쪽, 깊은 오한) 그러나 오코너의 이런 외침은 어머니에 대한 어떤 원망보다는 투병에 따른 심리적 불안이나 건강하지 못한 삶에 대한 불만을 어머니 라는 대상을 두고 쏟아 내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가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농장이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게하고 그녀의 생명 또한 앗아갈 '병'이 아니었을까.

오코너의 인생과 작품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그녀가 태어난 미국 남부와 가톨릭, 루프스 병이 꼽히지만, 내가 이해한 그녀는 그 모두것을 떠나 '어머니로 대변되는 죽음의 권위로 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병약한 오코너 ' 이다. 모두가 그렇듯 그녀 역시 죽고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럼에도 죽음 앞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순순히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그녀만의 반항이 바로 이 단편들이었다 라고 이해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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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5-02-12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 아래 당연한 것은 오로지 죽음 뿐....
매혹적인 문장입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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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눈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던 그 마을을, 마치 성탄절 때 진열장 안에 만들어놓은 장난감들처럼 조그만 마을의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그 맑은 밤들을 나는 다시 살아보고만 싶다. 그런 밤이면 모든 것이 단순하고 걱정 없어 보였으며 우리는 미래를 꿈꾸곤 했다. 우리는 이곳에 정착하고 우리 아이들은 마을 학교에 다니고 지나가는 가축 떼들의 방울 소리 속에 여름이 올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고 난데없는 일이 생기지 않는 생활을 하리라.(233쪽)

 

난데없는 일이 생기지 않는 생활을 하는것, 그것이야 말로 보통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삶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주인공인 퇴역 탐정 기 롤랑은 한 때 그런 평범한 삶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이념이나 국가의 이기로 부터 비롯된 전쟁의 포화나 검거의 위협으로 부터 달아날 필요가 없는 보통의 삶. 끝없이 펼쳐진 눈밭의 지루한 일상조차 평화롭게 여겨질 그런 무난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였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즐거워하는 사람들 뒤로 언뜻언뜻 사진이 찍히는(76쪽),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그가 보이지 않아도 그다지 놀라는 사람이 없는 그런 모나지않는 삶을 꿈꾸었던 것이다. 세계대전 당시의 각 개인들은 누구나 그런 꿈을 꾸었다. 부디 내가 관여하지 않은 일로 지루하도록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는 일이 없기를. 혼란 속에서도 내 가족은 부디 안녕 하기를, 그리하여 내 존재 전체가 확고하고 평안하기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건 어떤 기분일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의 공간 속에 내동댕이 쳐진 듯한 기분이 그러하지 않을까. 언제부터 살아왔는지, 앞으로 얼마만큼 더 가야할지 알 수 없어 모호한, 그렇기때문에 존재의 유무에 위협을 받는듯한 기분이지 않을까.

처음부터 탐정이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가족이라곤 없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그 누구도 사랑해 본 일이 없는 것처럼, 지금 알고있는 사람이 처음부터 알던 사람들의 전부라는 듯이, 지금 여기말고 이전의 삶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의미이 삶이 아니라고 여겼을 기 롤랑은 지워져버린 자신의 과거를 찾기로 한다.

 

그 시절을 기억하려고 애를 쓰지만... 어찌나 어렴풋한지... (198쪽)

 

충격때문이든 고통때문이든 한때 사력을 다해 잊으려 했기 때문에 무의식 속으로 사라진 기억을 주인공은 다시 되돌리고 싶어한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 롤랑이 과거의 자신을 찾는 일은 낯선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과 닮았다. 자신이라고 추측되는 인물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그들은 때때로 과자나 초콜릿 상자, 혹은 담배 상자 안에 봉인되어 있던 빛바랜 추억의 조각들을 꺼내 보여준다. 주인공은 그들이 보여주는 장면들을 꿰 맞추며,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를 자신의 기억을 기다리는 것이다. 낯설지만 익숙한 거리의 소음과, 빛과 색깔과 냄새와 함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기 롤랑을 과거의 시간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는 기 롤랑이 아닌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진 페드로는 과연 기 롤랑 그 자신일 것인가.

 

기 롤랑이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은 낯선 거리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뜬금없고 모호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때로는 시점이나 대화의 주체마저도 명확히 알 수 없고, 무엇을 말하고자하는 것인지 작가의 의도가 불명확해지는 그런 순간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장면때문에 잃어버린 상실의 시간을 되찾는 과정이 더욱 명확해지는 것이다.

꼭 천천히 읽을 것. 되도록이면 소리내서 읽을 것. 이해되지 않는 문장은 반복해서 읽을 것. 이 세가지만 지킨다면 아름다운 문장들의 모호함 속에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넋을 잃게 된다. 진작에 프랑스어를 배워둘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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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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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의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아옌데가 '칠레여, 영원하라!'는 마지막 연설을 남긴 후 죽음을 맞이하고, 그와 정치적 노선을 같이했던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병든 몸으로 쿠데타 소식과 아옌데의 죽음을 접한다.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네루다는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자신을 바다가 보이는 창가로 이끌어 줄 것을 부탁한다. 네루다의 건강을 염려해 그의 부탁을 거절하는 마리오를 향해 네루다는 묻는다.

 

"뭘 감추고 싶은 거지? 창문을 열어봤자 저 아래 바다가 사라지고 없다는 건가? 그들이 바다까지 연행해 갔어? 나까지 우리에 가둔 건가?"

 

네루다가 그 순간 바라보았을 바다를 내 눈으로도 보고 싶었다. 인터넷 서핑을 통해 이슬라 네그라의 네루다의 집으로 알려진 사진을 찾아 보았다. 사진만으로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 네루다가 느낀 절망 혹은 체념을 아주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사진의 힘이라기 보다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그린 장면의 힘이다. 시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이슬라 네그라의 짙은 안개가 낀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네루다는 시를 읊는다.

 

하늘의 품에 휩싸인 바다로 나 돌아가노니,

물결 사이사이의 고요가

위태로운 긴장을 자아내는구나.

새로운 파도가 이를 깨뜨리고

무한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그때까지.

어허! 삶은 스러지고

피는 침잠하려니.

 

시인을 바라보던 마리오는 네루다를 뒤에서 안고 신들린 눈동자를 손으로 덮어주면서 말했다.

 

"제발, 제발 죽지 마세요. 선생님."

 

이슬라 네그라는 칠레의 한 귀퉁이 작은 바닷가 마을로 편지 왕래조차 뜸한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까막눈이며 따라서 편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마리오 히메네스는 이슬라 네그라의 우편 배달부였으며, 그는 늘 우편가방이 넘치도록 우편물을 배달했다. 다만, 수신인은 모두 시인 네루다 였다. 마리오는 시인의 편지를 배달하며 시인으로부터 메타포와 시에 대해서 배우고, 네루다의 시를 적절히 표절해 베아트리스와의 사랑을 이룬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들어난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리오로 대표되는 칠레의 민중들이 국가로부터 비롯된 오래된 착취의 근원을 끊어내고 자신들의 말을 하며, 깨어날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이야기 전체가 네루다에 대한 메타포인 것이다.

 

"제가 시인이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있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요. 시인이 아니라서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걸요."

 

스카르메타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 가벼운 네루다의 이미지를 그리고자 했다. 민중 시인으로, 정치인으로 투사의 이미지가 강한 네루다를 친근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스카르메타가 그린 가벼운 네루다는 무지한 민초들과도 격의가 없는 모습이었으며, 그만큼 친근했고, 자신을 뚜쟁이로 표현할 만큼 때때로 익살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착취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네루다의 깊은 절망까지도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쿠데타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절망으로 창가에 선 네루다의 모습은 오래도록 가슴아픈 여운을 남긴다.

 

이 이야기는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며 끝을 맺는다 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읽는 것은 공기처럼 가볍고 물방울처럼 즐거운 반면, 책을 다 읽고 나면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물안개 속에 서 있는 것처럼 갑갑하고 축축해진다.

착취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 하고싶은 말이 넘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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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5-02-1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갑하고 축축해진다 이 문장이 마음에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