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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저 아래 눈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던 그 마을을, 마치 성탄절 때 진열장 안에 만들어놓은 장난감들처럼 조그만 마을의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그 맑은 밤들을 나는 다시 살아보고만 싶다. 그런 밤이면 모든 것이 단순하고 걱정 없어 보였으며 우리는 미래를 꿈꾸곤 했다. 우리는 이곳에 정착하고 우리 아이들은 마을 학교에 다니고 지나가는 가축 떼들의 방울 소리 속에 여름이 올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고 난데없는 일이 생기지 않는 생활을 하리라.(233쪽)
난데없는 일이 생기지 않는 생활을 하는것, 그것이야 말로 보통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삶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주인공인 퇴역 탐정 기 롤랑은 한 때 그런 평범한 삶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이념이나 국가의 이기로 부터 비롯된 전쟁의 포화나 검거의 위협으로 부터 달아날 필요가 없는 보통의 삶. 끝없이 펼쳐진 눈밭의 지루한 일상조차 평화롭게 여겨질 그런 무난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였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즐거워하는 사람들 뒤로 언뜻언뜻 사진이 찍히는(76쪽),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그가 보이지 않아도 그다지 놀라는 사람이 없는 그런 모나지않는 삶을 꿈꾸었던 것이다. 세계대전 당시의 각 개인들은 누구나 그런 꿈을 꾸었다. 부디 내가 관여하지 않은 일로 지루하도록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는 일이 없기를. 혼란 속에서도 내 가족은 부디 안녕 하기를, 그리하여 내 존재 전체가 확고하고 평안하기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건 어떤 기분일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의 공간 속에 내동댕이 쳐진 듯한 기분이 그러하지 않을까. 언제부터 살아왔는지, 앞으로 얼마만큼 더 가야할지 알 수 없어 모호한, 그렇기때문에 존재의 유무에 위협을 받는듯한 기분이지 않을까.
처음부터 탐정이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가족이라곤 없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그 누구도 사랑해 본 일이 없는 것처럼, 지금 알고있는 사람이 처음부터 알던 사람들의 전부라는 듯이, 지금 여기말고 이전의 삶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의미이 삶이 아니라고 여겼을 기 롤랑은 지워져버린 자신의 과거를 찾기로 한다.
그 시절을 기억하려고 애를 쓰지만... 어찌나 어렴풋한지... (198쪽)
충격때문이든 고통때문이든 한때 사력을 다해 잊으려 했기 때문에 무의식 속으로 사라진 기억을 주인공은 다시 되돌리고 싶어한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 롤랑이 과거의 자신을 찾는 일은 낯선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과 닮았다. 자신이라고 추측되는 인물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그들은 때때로 과자나 초콜릿 상자, 혹은 담배 상자 안에 봉인되어 있던 빛바랜 추억의 조각들을 꺼내 보여준다. 주인공은 그들이 보여주는 장면들을 꿰 맞추며, 어느 순간 불현듯 떠오를 자신의 기억을 기다리는 것이다. 낯설지만 익숙한 거리의 소음과, 빛과 색깔과 냄새와 함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기 롤랑을 과거의 시간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는 기 롤랑이 아닌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진 페드로는 과연 기 롤랑 그 자신일 것인가.
기 롤랑이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은 낯선 거리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뜬금없고 모호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때로는 시점이나 대화의 주체마저도 명확히 알 수 없고, 무엇을 말하고자하는 것인지 작가의 의도가 불명확해지는 그런 순간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장면때문에 잃어버린 상실의 시간을 되찾는 과정이 더욱 명확해지는 것이다.
꼭 천천히 읽을 것. 되도록이면 소리내서 읽을 것. 이해되지 않는 문장은 반복해서 읽을 것. 이 세가지만 지킨다면 아름다운 문장들의 모호함 속에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넋을 잃게 된다. 진작에 프랑스어를 배워둘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