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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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의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아옌데가 '칠레여, 영원하라!'는 마지막 연설을 남긴 후 죽음을 맞이하고, 그와 정치적 노선을 같이했던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병든 몸으로 쿠데타 소식과 아옌데의 죽음을 접한다.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네루다는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자신을 바다가 보이는 창가로 이끌어 줄 것을 부탁한다. 네루다의 건강을 염려해 그의 부탁을 거절하는 마리오를 향해 네루다는 묻는다.

 

"뭘 감추고 싶은 거지? 창문을 열어봤자 저 아래 바다가 사라지고 없다는 건가? 그들이 바다까지 연행해 갔어? 나까지 우리에 가둔 건가?"

 

네루다가 그 순간 바라보았을 바다를 내 눈으로도 보고 싶었다. 인터넷 서핑을 통해 이슬라 네그라의 네루다의 집으로 알려진 사진을 찾아 보았다. 사진만으로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 네루다가 느낀 절망 혹은 체념을 아주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사진의 힘이라기 보다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그린 장면의 힘이다. 시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이슬라 네그라의 짙은 안개가 낀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네루다는 시를 읊는다.

 

하늘의 품에 휩싸인 바다로 나 돌아가노니,

물결 사이사이의 고요가

위태로운 긴장을 자아내는구나.

새로운 파도가 이를 깨뜨리고

무한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그때까지.

어허! 삶은 스러지고

피는 침잠하려니.

 

시인을 바라보던 마리오는 네루다를 뒤에서 안고 신들린 눈동자를 손으로 덮어주면서 말했다.

 

"제발, 제발 죽지 마세요. 선생님."

 

이슬라 네그라는 칠레의 한 귀퉁이 작은 바닷가 마을로 편지 왕래조차 뜸한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까막눈이며 따라서 편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마리오 히메네스는 이슬라 네그라의 우편 배달부였으며, 그는 늘 우편가방이 넘치도록 우편물을 배달했다. 다만, 수신인은 모두 시인 네루다 였다. 마리오는 시인의 편지를 배달하며 시인으로부터 메타포와 시에 대해서 배우고, 네루다의 시를 적절히 표절해 베아트리스와의 사랑을 이룬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들어난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리오로 대표되는 칠레의 민중들이 국가로부터 비롯된 오래된 착취의 근원을 끊어내고 자신들의 말을 하며, 깨어날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이야기 전체가 네루다에 대한 메타포인 것이다.

 

"제가 시인이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있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요. 시인이 아니라서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걸요."

 

스카르메타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 가벼운 네루다의 이미지를 그리고자 했다. 민중 시인으로, 정치인으로 투사의 이미지가 강한 네루다를 친근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스카르메타가 그린 가벼운 네루다는 무지한 민초들과도 격의가 없는 모습이었으며, 그만큼 친근했고, 자신을 뚜쟁이로 표현할 만큼 때때로 익살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착취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네루다의 깊은 절망까지도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쿠데타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절망으로 창가에 선 네루다의 모습은 오래도록 가슴아픈 여운을 남긴다.

 

이 이야기는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며 끝을 맺는다 라고 말한 작가의 말처럼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읽는 것은 공기처럼 가볍고 물방울처럼 즐거운 반면, 책을 다 읽고 나면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물안개 속에 서 있는 것처럼 갑갑하고 축축해진다.

착취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 하고싶은 말이 넘치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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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5-02-1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갑하고 축축해진다 이 문장이 마음에 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