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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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세상을 뜬 한 노인이 있다. 그는 광고회사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했으며, 세 번 결혼했고 세 번 이혼했다. 따라서 세 명의 전 아내가 있고,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다. 그에게는 그 누구보다 정감어린 형이 있었고, 긴 직장생활 동안 오랜 우정을 나눠온 동료들이 있었으며,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육체적 사랑을 가능하게 했던 비밀의 연인도 있었다. 또한 그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아들이었으며, 직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한 때는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남편이기도 했으며, 딸에게는 죽을 때까지도 둘도없이 다정한 아버지였다.
그러니까 그는 몹시 평범한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편 그는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별다른 죄책감없이 끝내기도 했으며, 아내 몰래 여러번의 외도를 했고, 그 사실이 들통나자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할 정도로 도덕적인 면에서 완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더욱 그를 평범하게 했다. 평범한 사람, 즉 에브리맨인 그가 어느날 죽음을 맞은 것이다.
죽음은 어느 순간 파도가 치듯 갑자기 그를 덮친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의 전조가 있었고, 그는 한 순간이라도 죽음을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치료적 행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죽음을 뒤로 미루기 위한 치료는 불현듯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 이 책은 그의 장례식으로 시작되며,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회고를 통해 마무리 된다.
 
출근길에 지나게 되는 요양병원이 있다. 병원이라기 보다는 그냥 요양원라고 보는 것이 맞을 만한 곳으로, 큰 길가에 있다는 단점을 충분히 보완할만큼 안락해 보이는 곳이다.
그곳을 지날 때면 습관처럼 통유리로 된 1층 로비를 바라보곤 하는데, 어느날엔가는 은은한 노란 빛이 감도는 로비에 줄을 맞춰둔 휠체어에 앉은 노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그러나 휠체어에 기대 앉은 노인들의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 보다는 의무감에 억지로 앉은 듯한 비뚜름하게 늘어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죽을날을 기다리고 있는 멀건 학들처럼 보여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한 그들은 신의 가호나 은총을 바라기 보다는 어서 빨리 이 지루한 예배를 끝내고 침대로 돌아가고 싶은 표정이 역역해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피곤한 생을 빨리 끝내고 싶은 기대에서 우러나온 무의식의 표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은 '늙어서 요양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의미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렸든 젊었든 나이가 들었든 모든 인간은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산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은가. 이 말인 즉 죽지 못해 산다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피사체가 부재한 텅빈 눈과 축 늘어진 모습으로 설교를 듣는 그 늙은이들도 한때는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일을 하던 사람들이며,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동료들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며, 사소한 도덕쯤은 너끈히 무시할 만큼의 배짱을 부리며 살던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때까지의 삶에서 날마다의 일상을 열심히 꿰맞춘 덕에 그나마 안락한 요양소에서 생이 마무리되길 기다리고 있는그들은 내 부모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래의 '나'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바로 '에브리맨' 아니겠는가.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23쪽
필립 로스가 보통사람, 평범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에브리맨'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람은 죽는다는 명제에 관한 것이다. 평범했던 비범했던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의미에서 모든 죽음은 다 평범하다.

 

로스는 <에브리맨>을 73세에 썼고, 지금 2014년 현재 81세로, 그의 근황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뭐라 말 할 수 없지만, 여러 권의 작품을 읽고 생각컨데 로스는 몹시 건장한 노인일 것 같다. 몸은 노후했으나 정신력만은 여전히 30대인, 병들고 노후했어도 여전히 자신에게만은 죽음이 비켜갈 것이라고 믿는 그런 꼬장꼬장함을 감추지 않는 노인일 것으로 상상되지만 로스는 <에브리맨>을 통해 그 자신이 어느날 갑자기 죽는다해도 그 죽음 역시 수천 수만의 다른 죽음들만큼이나 평범할 것이라는 예언하고 있다. 
 
책을 읽기전 살펴본 독자평들 중에는 통찰도 깊이도 없다거나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의 평들이 많았지만, 내가 보기에 필립 로스는 최고다. 책마다 재탕 삼탕 우려먹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가 유대인을 주요인물로 삼기 때문이며, 배경 역시 미국의 유대인 밀집지역인 뉴워크를 즐겨 사용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 지역, 한 사회, 한 마을, 한 학교, 한 집안 일지라도 다양한 인물이 존재하고, 그 인물들 각각의 이야기 역시 무궁무진하다. 로스는 그 다양성을 고루 이용하고 존중하는 작가이다. 나는 바로 그점이 몹시 마음에 든다.
지금껏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들이 다 좋았지만, 그 중 한 권만 꼽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에브리맨>을 고르겠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짧지만, 울림은 몹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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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는 질기고 소주는 쓰지만, 인생은 그마저도 달달하게 느껴질 만큼 쓰디 쓰다.'(본문 중에서)

그러니까 내말이... 팍팍한 인생살이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남겨질 사람만 아니라면 차라리 그만 하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파란 하늘을 보며 불현듯 들더라니까. 나쁘지 않기보단 오히려 편안한 일일 것 같기도 하고.

죽어보기 전에야 죽음 이후의 일을 알 수가 있나...

 

 

 

 

 

 

 

 

2000년의 사람들은 평등하게 교육받고, 국가의 주도하에 산업 군대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균등하게 생산의 대가를 받으며, 45세가 되면 노동의 의무를 모두 마치고 온전히 삶을 누린다...

19세기에 씌인 이 작품은 2000년쯤엔 빈곤과 불평등,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오길 기대하고 있는데, 2014년인 오늘날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불평등이 더더욱 당연시 되고 있지 않은지.

신용카드와 쇼핑에 길들여진 나는 진심으로 평등한 세상을 기대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며, 이 책을 읽고 싶다.

 

 

 

 

 

 

필립 로스의 작품들을 거의 읽었다. 아직 읽지 못한 것은 <휴먼 스테인>과 <유령 퇴장>, 그리고 필립 로스가 작가로 데뷔한 첫 작품이라는 바로 이 책<굿바이, 콜럼버스>.

후기 작품들과 비교해 이 책은 데뷔작 답게 풋풋하고 정겹다는 평이.. 그렇다면 조금 망설여지지만, 왜냐하면 나는 필립로스가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나 어떻든 장황해지기 전의 로스는 어땠는지 알아두고 싶기 때문에 이 책을 읽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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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devous 2014-09-01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돌아보며 - 흥미로울 것 같은데 득표수가 밀릴 것 같아 리스트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ㅜ 제 예상엔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 천명관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가 아마 선정되지 않을까 싶은데 필립 로스의 저력을 기대해봅니다 ㅎㅎ

비의딸 2014-09-02 11:27   좋아요 0 | URL
득표수에 밀릴 것 같을 수록 더 힘을 보태야는 무댓보 정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ㅎㅎ 윤스리님 댓글을 보니 '뒤돌아보며' 가 더더욱 안타깝네요. 아아, 하루키는 안돼요..

rendevous 2014-09-03 20:00   좋아요 0 | URL
한 바퀴 돌고 왔는데 하루키 될 것 같아요... 남은 한 자리는 아마 천명관 작가 차지가 될 것 같습니다 ~ 운 좋게 창비 책 읽는 당 4기 뽑혀서 천명관 작가님도 만나고, 이 책으로 토론? 비스무레한 것도 할 것 같은데 무의미의 축제처럼 한 권은 제가 읽고, 신간평가단 책은 친구에게 선물하는 걸로 ㅜㅜ

비의딸 2014-09-04 11:15   좋아요 0 | URL
어, 토론까지...윤스리님의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리뷰가 기대되네요! 흐~
윤스리님 말씀이 맞는다면 저는 주는대로 받아읽고 '뒤돌아보며'는 장만하는걸로^^

rendevous 2014-09-07 15:58   좋아요 0 | URL
뒤돌아보며 리뷰 기대할게요 ㅎㅎ
 
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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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을 견디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었다면 마커스는 그로부터 열한 달 뒤 와인스버그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을 것이다. 나아가 졸업생 대표로 고별사를 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랬다면 그의 교육받지 못한 아버지가 그동안 그에게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려 했던 것은 나중에 배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239쪽
살면서, '만일...'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자주 '만일...'에 대해 생각한다. 만일 그때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그 때 그 일을 했더라면, 만일 그 때 그일을 조금만 견뎌냈더라면, 만일 그 때 그 일을 참지 않았더라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예측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예측한 만큼만 세상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결과가 어떻든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기에게 있다. 그것이 때때로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삶이며 인생인 것을.
 
유대인이며 정육점 주인의 아들인 마커스는 꼬마시절부터 익숙한 피와 살육의 정육점을 떠나 다른 삶을 살고 싶어했다. 정육점을 떠나기 위해서 마커스는 정말 하기 싫은 닭의 내장을 빼내는 일도 참고 해치울 수 있었다. 그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어쨌거나 그는 정육점을 떠날 것이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한 마커스에게 정육점과 아버지를 떠날 기회가 왔고 마커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를 위해 아버지와의 불화를 이겨냈고, 어머니의 희생을 모른척 했다. 그리고 새로 시작된 삶. 마커스는 미국이 벌이고 있는 전쟁에 강제로 소환되어 소나 닭처럼 피를 흘리며 처참히 죽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법률가가 되고 싶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 공부 밖에 없었다.
마커스는 자신이 선택한 떠남과 공부로 다가올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고, 그 결과를 위해 매진했으나 인생은 정말 말도안되고 얼토당토않은 일로 순식간에 뒤집히곤 한다.
 
마커스가 불화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였다. 아버지와의 불화에서도 그랬고, 처음 진학한 대학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도 그랬다. 또 새로 편입한 와인스버그에서 룸메이트들과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 방을 떠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마커스의 그런 문제 해결방식이 잘못된 것이라곤 할 수 없지만 어쩐지 잘하는 일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건 남에게 피해주는 것 없으니 됐지 않았냐며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꼭 같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당연함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떠나기 보다는 부딪히고, 갈등하면서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마커스의 짧은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내 삶도 그렇지만 부모로서 아이에게 강요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좀더 자신있게 대처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되고나니 내 삶보다는 아이의 삶이 먼저 밟히고 걱정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위치에서 볼 때, 아이에게 이런저런 좋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을 제안하지만, 그것들이 아이의 인생에 정말로 좋은 것들을 가져다 줄 것인가 하는 것에서는 정작 자신이 없다.
마커스의 걱정많은 아버지도 그랬다. 그의 눈에는 마커스의 불안한 미래가 훤히 보였지만, 그렇더라도 걱정하는 것 외에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부모는 자식에게 길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 길을 가게 할 수는 없는 것을. 그 길을 가게 했다하더라도 그것이 아이 인생에 정말로 좋은 일이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을.
 
<울분>은 1950년대 무렵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정작 로스가 이 책을 언제 쓴 것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혼자 추측해 볼때 비교적 근작인 <미국의 목가>나 <휴먼 스테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보다는 이전에 <포트노이의 불평>을 쓸 무렵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앞의 세권과는 사뭇 다른 느낌, 로스의 이야기가 장황해지기 이전의, 작품 속에 이런저런 인물들을 끼워넣기 이전의  로스 스타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가 장황해진, 혹은 방대해진,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삶을 길게 설명하는 로스 스타일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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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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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포트노이의 불평>순으로 필립 로스를 읽어온 나는, 이번에 읽은 책 <포트노이의 불평>에서 몹시 당황했다. 왜냐하면 여든살을 넘어선 필립 로스의 근작과는 상당히 다른 삼십대의 필립 로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앞의 세 권이 미국의 근대사 속 유대인, 2차세계 대전 후 미국 사회에서 상처받은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 였다면, <포트노이의 불평>은 그야말로 한 개인의 사적인 성생활에 대한 불평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적인 문제 뒤에 숨은 것은 역시 유대인이면서 이방의 땅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디언 지는 <포트노이의 불평>에 대한 서평에서 '로스는 코믹 작가다' 라고 평했다는데, 내가 이전에 읽은 세권의 책에서 로스는 전혀 코믹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너무 진지한 작가였다. 심각할 정도로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휴먼 스테인>에서 칠십대의 콜먼 실크가 자기 나이의 딱 반 밖에 되지 않는 여자와의 노골적인 정사 장면조차도 전혀 외설스럽거나 천박하지 않게 표현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전혀 외설스럽지 않게 표현했다는 것은 내 생각이고, 정사장면 조차도 너무 진지하고 냉철했기 때문에 독자로서 나는 그것에서 야하다거나 외설스럽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던 것이라는 것을 <포트노이의 불평>을 읽으며 알겠다.
 
<포트노이의 불평>은 책 제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포트노이의 독백으로 씌여졌다. 미국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삼십대 초반의 앨릭잰더 포트노이가 정신과 의사를 상대로 자신의 문제를 고백하는 것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여느 상담과는 다르게 정신과 의사의 피드백은 전혀 없고, 포트노이가 마마보이였던 어린시절부터 성도착증세를 보이는 삼십대의 남자가 된 현재까지를 오로지 혼자서만 진술한다.
상담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그에 대해 진술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 답을 찾는 것인데 포트노이는 상담자의 피드백 없이도 그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퍼즐 조각을 맞춰간다. 표면적으로는 전혀 해결되는 것이 없지만, 기억을 거슬러 자신의 문제를 되짚어 내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포트노이의 비뚤어진 성적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다.
한편 그 독백이 얼마나 외설스럽던지 근간의 로스만을 읽어온 나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옮긴이의 말을 따르자면 필립 로스는 적나라한 표현으로 꽤 악명이 높은 작가라는데, 이전에 세권을 읽는동안 나는 로스의 글이 야하다라거나 노골적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못했던 것이 의아스러웠다. 생각해보면 옮긴이의 말처럼 로스는 선정적인 장면에서도 감상을 뺀 냉철하고 건조한 관찰자의 문체를 고수했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포트노이의 불평>만은 전철과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읽기 낯뜨거울 정도로 외설스러운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나는 의아스럽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적인 것이 인생에서 이다지도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역시 문학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아니라면 내가 성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한 것일까?
 
이 책에서도 역시 이전에 읽었던 로스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유대인이고, 그는 이방인의 나라에 속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는다. 부모는 포트노이를 이방인들과 이방인들의 문화로 부터 보호하려는 미국내 유대인으로, 그들은 이방의 땅에서 이방인들과 선긋기를 통해 자신들은 선택된 민족, 즉 유대인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후 세대인 포트노이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있다.
이방의 것에 대한 부모의 공포는 포트노이에게로 그대로 전달되어, 자신을 이방인과 동일시하기를 선망하는 만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사춘기에 접어든 포트노이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성'뿐이라는 무언의 깨닫음을 피부로 얻는 발로가 된다. 그로부터 점차로 성도착증세로까지 발전되는 포트노이의 성적 취향은 안정보다는 성적 모험을 감행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반대로 가정을 꾸리고, 유대인의 피를 이어가기를 끝없이 바라마지 않는데, 그러지 않음으로서 자신이 유대인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포트노이도 그 자신이 유대인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타고난 '선민'이라는 핏줄의 끌림보다는 끝없는 교육에 의한 세뇌, 즉 후전적으로 '득의' 된 것으로 보여진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보면서 유대인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있지 않은 나는 근본적으로 유대인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이라는 것에는 무감각한 편인데, 포트노이가 이방의 땅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유대인으로서 정체성 문제로 갈등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선민의식이 살아남기 위한 '적응훈련'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체는 모두 후손을 남김으로서 존재로서의 영속성을 꾀하기 마련이 아니던가 말이다.
 
이전에 읽었던 세 권의 책과 필립 로스가 삼십대에 쓴 <포트노이의 불평>은 크게 다른 책인 것 같지만, 여러 모습에서 비슷하다. 첫째로 이방인의 땅에 사는 유대인으로서 오히려 그땅의 주인을 이방인으로 역차별하며, 남의 땅에 사는 이방인이라는 내면의 공포를 표현했다는 것과, 부모를 넘고, 민족을 넘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몸부림 치는 자식, 후세들이 등장하는 점에서 말이다.
전작주의자는 아니지만, 한 작가의 책을 쭈욱 따라 읽는 것은 그 작가의 생애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유대인이었던 필립 로스가 이방의 땅(미국)에서 이방인(유대인)으로서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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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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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역사가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쓴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과 함께 필립 로스의 3부작으로 불리우는 작품 중 하나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이다.
발표순으로 보자면 <미국의 목가>에 이은 두번째 작품이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이지만, 내가 읽은 순으로 보자면 이 책이 세번째로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이다. 세작품의 공통점이라면 은둔 소설가 네이선 주커먼이 작품의 화자인 것 외에도, 사회 속에서 배신당하는 개인, 역사 속에서 무너지는 개인이겠지만,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 것은 대중은 한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 왜 무너뜨리는가 이다.
삼부작의 주인공들은 사회와 역사에 꼬투리를 잡혔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고 악랄하며 다분히 의도적인 공격 아래 다시는 회생할 수 없을만큼 무참히 무너진다. 그리고 공격의 주체인 대중은 단순히 재미를 위해 한 개인을 희생양 삼을 수도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닫는다.
더더욱 서늘한 진실은 재미로 한 사람을 공격하는 자들의 발부리는 언제든 달아날 수 있게 바깥을 향하며, 그 대중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일 수 있지만, 반대로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공격하는 대중은 어느순간에는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이럴 때는 이런 사람, 저럴 때는 저런 사람, 또 다른 데서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필립 로스가 말하는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배신당했지만, 또 다른 곳에서 그들은 배신자일 수 있고, 나 역시 배신당할 수 있지만, 언제든 배신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지만 타고난 신체적 조건으로 힘으로 살아남는 법을 일찍부터 익힌 아이라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에서 달아난 후로 탄광노동자, 공사장 인부, 제조공 등을 거치며 알게 된 공산주의자 오데이를 통해 이상주의를 꿈꾸게 된다. 아이라는 이후 노조행사에서 링컨의 연기를 맡으면서 더더욱 이상주의에 심취하고, 라디오 스타로까지 오르지만 그는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으며 혁명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꾀하는 한편으로, 아름다운 여배우와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꿈꾸며 그것이 여의치않자 여대생 혹은 매춘부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상주의를 꿈꾸는 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명백한 배신이며, 이는 이상주의가 아니어도 배우자에 대한 심각한 배신이다. 그러나 필립 로스의 인간관에 의하면 그 역시도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싸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끝내는 자신의 이상과 신념으로 부터 버림받고 생 앞에 무릎을 꿇은 아이라를 보면서 언제가 '세상에 얼마간 거리를 두고 살 작정'이라고 했던 한 정치인이 생각났다. 상처입은 깊은 눈으로 그렇게 말했던 그는 지난 대선에 출마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이고, 세상이며 인간이라고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통해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세상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혼자 사는 것에 대해 한없이 만족하는 작품 속의 화자이며 작가인 네이선 주커먼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주커먼이 대학시절 만난 교수 리오 글럭스먼에게 푹 빠졌는데, 글럭스먼은 내용상 비중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주커먼을 선동가가 아닌 진정한 예술가로 키워보고 싶어했던 인물로, 어쩌면 그는 역사 앞에 기회주의적이거나 방관자적이지만 그러나 내가 가장 닮고싶은 인물이다. 무엇보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강의가 매혹적이었다.
 
 
잃어버린 대의를 위해 싸우고 싶나? 그렇다면 말을 위해 싸워. 거창한 말이 아니라, 감격적인 말이 아니라, 이걸 찬성하고 저걸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네가 짓밟히고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선 훌륭하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걸 존경스러운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광고하는 말이 아니라, 형벌처럼 미국에서 살아가는 교양 있는 소수에게 네가 말의 편이라는 걸 알리는 말을 위해 싸우라고!
예술가의 미덕을 입증하려는 욕망보다 더 사악한 영향을 끼치는 건 없어. 이상주의의 끔찍한 유혹이라고! 넌 너의 이상주의, 너의 미덕을 완전히 정복해야 할 뿐 아니라 너의 사악함도 정복해야 해. 애초에 너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든 것, 너의 분노, 너의 정치적 동기, 너의 슬픔, 너의 사랑, 이 모든 걸 미적으로 정복해야 하는 거야! 처음부터 설교하고 자기 입장을 내세우면, 처음부터 우월한 관점을 들이대면 예술가로서 무가치하고 한심한 존재가 되고 말아. 왜 이런 선언문을 쓰지? 주위를 둘러보고 '충격'받아서? 주위를 둘러보고 '감동'을 먹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거짓 느낌을 꾸며내. 무엇이든 즉석에서 느끼고 싶어하는데, 충격과 감동이 가장 느끼기 쉬운 거야. 가장 멍청하기도 하고, 드문 경우가 있긴 하지만 주커먼 군, 충격은 항상 가짜야. -368쪽
내가 주커먼이라면 흔들리지 않고(공산주의자 오데이에게를, 혹은 이상주의자 아이라를 고민하지 않고) 현실주의자인 혹은 그저 단순히 예술가일 뿐인 글럭스먼의 제자가 되었을텐데.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내 삶,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고민했을 텐데.
이데올로기는 일정부분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고 피폐하게 했지만, 분명 세상의 진보에 기여한 바가 있고(그것도 아주 많은 부분에서),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개인의 삶에 대해 존경과 사의를 표해야 하겠지만, 나라면 나라면 좀 더 나에게 집중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비단 예술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이게는 나를 위해, 단 한번뿐인 내 삶을 위해 그래야 할 것 같다.
 
출판사 서평을 읽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필립 로스는 한 때 유명 여배우와 결혼생활을 했었다고. 그러나 이혼 후, 여배우가 로스와의 사생활을 폭로한 책을 출판했다고. 그녀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로스는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출판했다고.
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배신이라니. 책의 중후반 쯤 아이라는 네이선을 데리고 박제사를 찾아가는데, 로스의 방대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도대체 이 장면이 왜 필요했는지 내내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책의 말미에 풀렸는데, 아이라를 좋아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존경하기도 했던 이 박제사는 아이라가 공산주의자로 폭로되고, 그의 인생이 하락길에 이르자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아이라를 고발하고, 아이라를 좋아했다고 보여지던 그동안에도 내내 아이라를 감시했던 것으로 밝혀진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보다 더 섬뜩한 장면이 있을까. 
한 인간을 향한 배신은 곳곳에 잠복해 있다가 그가 내리막길을 들어설 기미가 보이면 서슴치않고 포화를 쏟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라도 세상에 약간은 거리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조금 더 확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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