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즈광, 히피, 마약중독자 그리고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였다
키라 밴 겔더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키라는 열두 살에 첫 자살 시도를 했다. 이유는 시험을 앞두고 수학 노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시작되면 반복적인 자해를 하게 되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한 직장에서 오래 일을 할 수 없어 생계에 지장을 받았다. 외로움과 성적 충동을 제어할 수 없어 본능대로 행동하게 되면서 성적으로 문란해졌고, 약물중독과 우울증으로 6개월 이상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그동안 키라에게는 우울증, 불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약물 의존증 등 병명이 자꾸만 늘어나 이에따른 정신병적 치료약을 열가지가 넘게 복용해야 했다.

그러던 중 키라는 한 정신과 의사를 만나면서 자신이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라는 판정을 받는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키라는 한편으로 안도한다. 수없는 자해와 상대를 향한 지독한 집착, 자살에 대한 강박관념, 수시로 경계를 넘나드는 변덕 등, 주변인물 뿐 아니라 그녀 자신조차도 끊임없는 고통속에 가두는 그 많은 일들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구제불능의 실패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잘못된 감정상태와 행동들은 그녀 자신도 어쩔수 없는 병 때문이였다는 면죄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키라의 친구와 심리치료사 안나는 그녀가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경계성 인격장애자라는 것은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정신병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키라는 불과 6살의 나이에 베이비시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키라는 성추행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했을뿐더러 내심 부드러움과 관심을 원했다는 죄책감과 동시에 자신을 그런 상황에 내몰아둔 엄마를 비난하고 싶은 무의식이 있다. 어릴 때 성적으로 학대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경계성 인격장애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키라는 예민한 아이였기 때문에 깊은 죄책감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그러한 죄책감은 상대방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은 버림받을 것이라는 공포로 이어져 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섹스에 매달리는 잘못된 행동 패턴을 반복하게 됐다.뿐만 아니라 키라는 죽은 동생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동생 대신 자신이 죽었어야 했다는 잘못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키라가 보이는 일련의 증상들이 이 최초의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키라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네 잘못이 아니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라는 한마디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경계성 인격장애자임을 믿음으로써 오히려 안도하는 키라는 치료를 위한 노력의 하나로 변증법적 행동치료법을 배우게 된다. 변증법적 행동치료는 겉으로 보기에 상반된 듯한 두가지 사항이 동시에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불안하거나 격한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관찰하며 분석하는 것으로 감정의 강도를 조절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인지행동 치료의 하나로 반복적 연습을 통해 자신의 불쾌한 감정들을 맞닥뜨리고 그를 참고 견디는 것을 익히는 것이였다. 키라는 매주 만나는 변증법적 행동치료 모임을 통해 자신을 효과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도움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웠다.

또한 키라에게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버거워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같이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누군가로부터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상처받은 내면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긍정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존재를 긍정받게 되면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경계성 인격장애로 구분되는 그들은 원초적인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자신의 존재를 상처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친밀감을 키우고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약점으로 보지 않으며, 혼란스러운 키라의 상태를 보고도 차분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강인한 자의식과 자기 세계를 가진 테일러를 만나 사랑하게 된 것은 키라에게는 행운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키라는 의도적으로 그를 밀어냄으로써 또다시 방황을 자처하게 된다. 비정상적인 감정상태를 완벽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사랑과 결혼을 다짐하는 테일러를 밀어내는 키라의 심리는 어떤 것이였을까. 그것은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버리겠다는 심리이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은 불행해 마땅한 사람이라는 무의식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였을까.

궁극적으로 키라는 변증법적 행동치료로 자신이 경계성 인격장애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안도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의 정당성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았을까.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난 후에라야,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받아들일 수 있게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행동을 좀 더 잘 통제하게 되어 경계성 인격장애로 보여지는 여러 증상들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였다.

키라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과적 치료라기 보다는 비판받고, 지시받고, 과소평가받음으로써 수치심을 느꼈던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무의식의 암시를 벗어버리고 현재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였다.

키라는 엉뚱하게도 티벳의 승려를 만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승려에게 명상하는 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존재에 긍정의 메시지를 보내고, 견딜수 없는 감정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참고 견디는 것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질병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달라져야할 지를 깨닫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키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불안한 감정상태의 모든 고통의 모습들을 정상화시키고, 타인과의 관계를 정상적인 것으로 돌려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불교의 자비심은 자신이 어느 경계의 어느 쪽에 치우쳐 있든, 그대로의 그녀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교를 통해 경계성 인격장애라고 명명되는 증상들은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믿음을 얻었다.

결국 키라를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증상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것은 정신과 치료도, 정신병적 치료약도 아닌 명상이였다. 명상을 통해 키라는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며 사랑하는 법을 깨닫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타인에 대한 이타심은 저절로 생겨나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던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키라 역시 부모로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비난을 받고, 화풀이 대상이 되었으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키라의 엄마가 인격장애자 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부모에게 수시로 자신의 기분을 무시당했고,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움 속에 성장했다. 때문에 어린 키라를 대하는 방법의 무엇이 잘못인지 미처 깨닫지 못한채로 같은 양육방식을 굴레처럼 되풀이 한 것이었다. 모범적인 역할 모델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어른이 된 키라가 보이는 행동들은 어떤 정신병적, 혹은 인격장애적 증상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비롯된 흉터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버림받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관계, 충동적인 낭비, 성관계, 물질 남용, 자살시도, 공허함, 부적절하고 조절하기 어려운 심한 분노'  DSM-가 말하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증상은 나에게도 무척 익숙하다. 나는 경계성 인격장애자라 불리는 키라를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키라의 증상들은 정도 문제지만 어느정도는 과거의 나이거나, 혹은 현재의 내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경계성 인격장애자인 것일까.

지난 주, 민들레 출판사에서 진행한 일본의 교육자 나까지마 히로카즈의 강연회에 다녀왔다. 나카지마 히로카즈는 <마음을 상품화하는 사회>, <카운슬링의 환상과 현실>, <마음을 원격관리 하는 사회>와 같은 책을 통해, 문제 해결의 근원을 개인의 내면으로 보는 사회 풍조를 통렬히 비판해 왔다고 했다. 그는 개인의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 영향 구조 안에서 발생하고, 그 해결의 실마리 역시 그 구조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관점으로 일본의 탈학교 청소년들과 만나고 있다고 했다.

 

'나는...'하고 설정된 문제조차도 문제의 성립 과정을 개인의 내면에서만 구할 수는 없다. 문제를 심리적으로만 설명하려고 해도 무리다. 문제는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역으로 문제를 사회학적 경제학적으로만 설명하려 해도 무리가 따른다. 문제는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사회, 개인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다. 문제는 오직 개인의 내면 또는 사회만으로 환원할 수 없다.(격월간 <민들레>83호, '마음 돌보기를 권하는 사회의 함정)

 

나카지마는 강연회에서 개인의 심리적 문제가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치료행위에도 이점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상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 했는데, 현대 사회는 갈수록 정신과적 혹은 인격적 장애를 세분화하고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이 있다고 해서 그 학생을 비정상으로 볼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는 나카지마의 주장에 동감한다.

 

정신병자도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이제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인격이 아니다. 정신병자의 특성과 개인사는 그저 먼지처럼 제거된다. 옛 정신의학서에는 환자의 증언이 가득하지만, 오늘날 교과서에는 수학을 흉내낸 도표와 통계뿐이다. 환자에 대한 연구를 보아도 개인 사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거의 나오지 않고, 사례들을 합산한 숫자가 나온다. 연구 결과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환자 개인이 왜 치료에 반응했고 정확히 어떻게 반응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그저 몇 퍼센트의 환자가 반응했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환자 개인은 증발해버렸다.(광기, 대니언 리더, 도서출판 까치)

 

 스트레스에 약하고 쉽게 좌절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감정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격하며 감정조절에 서투르다고 해서, 관계끊기에 두려움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꼭 어떤 인격적 결핍혹은 정신적인 병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규범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신과적 장애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정해진 답을 내놓지 않는 이들을 비정상이라는 틀로 묶어 치료행위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보이는 경향 또한 날로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다른 것은 잘못되고, 고쳐야만 하는 질병인 것일까.

 

엄마, 난 정당성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랐어. 내가 딱부러지게 말했다. 아무도 내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어. 하는 행동마다 비난을 받았어. 내가 속상해서 화를 내도 아무도 나에게 스스로 돌보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어. 엄마는 자주 해외로 여행을 다녔고, 여행을 가지 않을 땐 언제나 다른 일에 몰두했어. 엄마는 내곁에 있을 때조차 나에게 멀리 있었어. 난 철저하게 외로웠어.(본문 중에서)

 

이 책을 읽으며, DSM-가 제시하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증상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존재조차 부정당했던 과거를 잊고 차라리 경계성인격장애라는 병명을 받아들이는 키라의 외로움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반으로 치닫을수록 키라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과적 의료적 진단이나 약이 아닌 키라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사랑이 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정신장애를 구분하는 일괄적인 축(DSM-와 같은)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독특한 문화와 관습, 기질, 성장 환경에 따라 모두 다르다. 그렇기때문에 사회규범이 필요한 것이며, 이것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본이 된다. 때문에 결국 정신적 장애라는 것은 사회규범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마음의 상태에 무어라 이름을 붙이고 경계를 짓는 것은 당사자를 위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시대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 조차도 모두 병으로 회귀되어 치료를 요하는 시대라는 것에 심한 공포를 느꼈다.

결론적으로 한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경계짓기 보다는 개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먼저 앞서야 할 것이다. 또한 치료적 개입이 필요한 정신과적 진료에 있어서도 개인의 독특성은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