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이지만 나남출판사에서 출판된 것으로 읽었다고 기억하는 <김약국의 딸들>을 마로니에북스의 재 출간으로 다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읽었다는 나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읽지 않았음에도 그 유명세로 인해 읽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다 깨끗이 잊은것인지, 도통 내용이 기억이 나질 않고 마치 처음 읽는 책처럼 낯설었다. 정말 읽었던 책이라면 한장면이라도 기억이 나야 했을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새로 출간된 <김약국의 딸들>은 양장본이고, 2003년도 판보다 더 깔끔한 디자인이다.

이 책은 박경리의 초기 장편으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씌여진 것이며, 배경 또한 일제시대이고, 항구를 끼고있는 소도시 통영에서도 한 마을의 이야기이다. 때문에 꼭 사투리나 방언, 혼용된 일본어 뿐만 아니라, 시대적 지리적 배경으로 인해 이해되지 않는 용어들이 많았다. 요즘 푹 빠져있는 러시아 문학보다도 더 낯선 용어들이 많았다는 것은 아니러니가 아니랄 수 없다. 때문에 용어해설이 페이지마다 있지않고 마지막에 한꺼번에 정리되어 있어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책장을 넘겨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싱둥겅둥 웃는다거나, 다글다글 볶는다거나, 감실하게 햇볕에 글은 얼굴 등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어휘와 표현으로 박경리만의 글의 맛을 느낄수 있기도 했다.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혐으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408쪽)

 

<김약국의 딸들>의 줄거리는 둘째딸 용빈이 한 위와 같은 고백으로 함축된다. 약국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후에는 배를 부리는 통영의 유지였던 김약국 집이 몰락해 가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각자 다른 기질의 딸들이 살아가는 혹은 죽어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과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상을 먹고 자살한 할머니로부터 시작되는 김약국 집안의 불운은 일제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딸들 각각의 불행을 그린다.

한 자매이지만 각각 다른 기질을 타고난 다섯명의 여인은 꼭 자신의 기질 때문으로만 불행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불이익과 함께 시대적 문화적 관습에 대한 저항으로 불행해지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볼때 나는 첫째딸 용숙의 탐욕스러운 기질은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삶의 방법으로 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도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탐욕스럽게 보든 천박하게 보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않은가 말이다. 탐욕으로 똘똘뭉친 용숙은 스스로 일어나는 힘을 간직한 것이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다.

다섯 딸들 중 유독 넷째딸인 용옥이 가엾게 여겨졌는데, 그는 소위 '착한'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싶었던 가장 가엽고, 어떻게 보면 가장 불행한 여인이 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물이 훤칠하지 못했고, 성격적으로 쾌활하지도, 영민하지도 못한 그저 눈에 띄지않는 넷째 딸이였다. 그녀가 부모의 눈에 혹은 타인의 눈에 들 수 있는 방법은 고운 심성을 드러내는 일이였을 것이다. 그녀는 짧을 인생을 그렇게 자신의 속마음 한번 제대로 들어내지 못하고 침몰한 것만 같아 내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의 운명을 되풀이 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지지 못하고 미치고 마는 셋째딸의 천진함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내내 용란을 마음에 두었던 용옥의 남편 기두는 용란이 미치고 난 후에야 그녀를 온전히 거둘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지만, 전혀 사랑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그보다는 기질이 다른 다섯자매가 시대에 순응하거나, 혹은 불응하며 자신의 삶을 지어가거나 혹은 마감하는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남 하동을 지날때면 <토지>를 생각하듯, 통영을 생각할 때면 자연스럽게 김약국 집의 다섯딸들이 떠오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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