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게이라서 행복하다 - 김조광수 감독의 영화와 성 소수자 인권운동
김조광수.김도혜 지음 / 알마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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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를 그저 여가를 즐기는 수단 중의 하나로만 인식하고 있는 나로서는 김조광수라는 감독도, 제작자도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해도 그가 게이든 아니든 책을 읽고싶을 만큼 호기심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이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는 게이라서 정말 행복하다."

정말? 정말 게이라서 행복한거 맞아? 게이가 아니었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겠어? 게이라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게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힐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뜻이겠지. 골방에서 울고 있을 줄 알았겠지만, 이렇게 당당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택한 캐치플레어겠지만, 그 호들갑이 좀 오버스럽다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을 확인하고 싶었다. 굳이 나 게이요, 밝히지 않아도 될 것을 스스로 밝혀 사회적으로 온갖 부당함을 감수하는 것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나 정말 행복하다라고 떠벌이며 책까지 낸 김조광수라는 사람의 자기중심성을 확인하고 싶었다고 할까.

 

2. 성적소수자를 가르키는 용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는 나는 게이나 호머나 트랜스잰더나 그게 그거라고 혼용해서 알고 있었음을 먼저 고백해야 겠다. 따라서 책을 읽으며, 자주 네이버 용어 사전을 검색해야 했다. 퀴어영화는 또 뭐라니.

책을 다 읽고보니, 마지막 장엔 친절하게도 '게이용어'를 정리해두었다. 분명히 목차를 살피고 읽기 시작했는데, 왜 목차에는 용어정리가 안나와 있는거야? 다시 목차를 뒤집어 보니, 헐! 페이지 수까지 명조체로 분명히 박혀있었다.

초간단게이용어사전1-287

초간단게이용어사전2-309

 

3. 게이라면서 참 인생을 순탄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김조광수 자신은 중학교 시절 이미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깊어 '버스 유랑'을 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데, 나로서는 그의 고민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에게 한 첫 커밍아웃이, '나 걔들하고 뽀뽀도 하고 그래!"라니 성정체성으로 고민하며 보낸 사춘기 시절 맞아?

운동권으로 지내던 대학시절도 그다지 고생되거나 힘들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로맨스가 짙었던 군대 시절은 더구나 말할 것도 없고.

흥행에 실패한 몇편의 영화 제작자 시절에도 영화인생에 변화가 생길만큼 커다란 타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커밍아웃으로 그의 신변에 무슨 이변이 생긴일도 없었고... 이건 뭐 일반인들 보다도 더 순탄한 인생을 사는 이반인처럼 여겨졌다.

인터뷰집을 읽으며 내내 김조광수의 삶을 순탄한 인생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인터뷰를 진행하고 책을 정리한 김도혜의 어투가 구차하지 않고 담백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한 김조광수라는 사람이 그만큼 경쾌하고, 열정적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만큼 게이 김조광수는 즐거웠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아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것은 성정체성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애착이 아닐까.

 

4. 독립영화집단을 거쳐 청년필름의 제작자로 그리고 감독으로 이어진 그의 영화인생 이야기를 통해 잘 알지 못하는 영화계의 뒷얘기가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영화인으로서 그의 이야기보다는, 게이로 살아가는 그의 사적인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는 것은 숨길 수 없겠다. 특히 군시절의 로맨스는 이성애자 사이의 여느 로맨스와 다를 것이 전혀 없어 조금 황당하기까지 했다. 동성애를 섹스 중심의 사랑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탓였으리라.

김조광수 그가 이 책을 진행한 이유는 '내세울 건 별로 없고 부끄러운 건 참 많은 사람이지만, 부족한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용기를 냈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게이라서 행복하다'는 김조광수의 오버액션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지만, 이 책을 읽고나서 성적소수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전의 나는 성적소수자 그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한마디로, 나의 일이 아니므로.

언젠가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우연히 보았다. 동성애를 증오하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거세되어 죽은 동네 사람을 역시 동성애자인 주인공이 회상하던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인간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많은 이성애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정상'이라는 말조차 그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아니, 잃어야 한다.

 

5. 김조광수는 성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청소년 동서애자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싶다라고 했는데, 롤 모델 보다는 의논자, 혹은 상담자가 되어주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김조광수가 청소년들의 롤모델로 적당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청소년기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정하기에는 불안정한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같은 여자 아이를 좋아했다. 물론 같은 여자 아이로 부터 고백을 받기도 했고. 그 시절에는 그것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따윌 구별하기 보다는 그 친구가 나하고만 친했으면 하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우정이였고,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는 여자 친구와의 사랑 때문에 울거나 웃었던 적이 없다.

 

6. 그러고보니, 영화 제작자나 감독으로는 김조광수를 알지 못했지만, 해고노동자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서 농성중이었을 때, 한진중공업 불법 정리해고 철회 투쟁을 지지하는 배우 김꽃비, 여균동 감독과 함께 김조광수를 본 기억이 있다.

대학에서의 운동이 졸업 후에도 계속 이어져, 그는 영화 제작 스탭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일에 앞장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한 운동도 자신의 몫이라 여기고 있다고 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어디든 간다는 김조광수. 이제는 이 이름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람과 삶을 동시에 존중하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 내 경우 2장의 스케치 프리뷰(63쪽)을 읽으며, 책을 확 덮어버리고 싶었다. 아는 형을 따라 부모님이 여행 가시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비디오를 보는 것이 그 내용으로 비디오가 시작되고 김조광수는 온몸이 굳으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고 했는데... 그 뒷 이야기는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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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미술관을 걷다 - 13개 도시 31개 미술관
이현애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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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싶었던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독일의 퀼른과 베를린에 있다는 '케테 콜비츠 미술관'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독일의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 임으로 당연히 '케테 콜비츠 미술관'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읽기 시작했다.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자신의 마음을 본다는 뜻의 休息으로 부터 프롤로그를 시작하는 저자의 글솜씨가 시작부터 썩 마음에 들었다. 본다는 것은 그것이 그림이든 책이든 혹은 그저 어떤 사물이든, 자신을 투영하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저자는 그림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며 말을 걸고,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진정한 휴식이며, 미술품에 대한 감상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는 미술사를 전공한 전문가로서의 평을 대부분 절제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저 내 짐작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저자의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저자는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는 50여 개의 미술관을 돌며 화두를 '수집에의 욕망'으로 잡았으며, 이 책에 모아 놓은 미술관은 조형예술품에 집중한 컬렉션을 갖추고 상설 전시를 하는 국공립 미술관이며, 개인 컬렉션과 사립 미술관, 종교기관의 부속 미술관 등은 제외시켰다고 프롤로그에 밝히고 있다.

두둥! 아니 이게 무슨말. 케테 콜비츠 미술관을 보겠다고 작정한 나로서는 개인 컬렉션을 제외했다는 저자의 말에서 그만 '헉'소리가 나게 놀라고 말았다. 그말인즉, 이 책에서는 케테 콜비츠를 볼 수 없다는 것이였다.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강직 또는 경직과 같은 뻣뻣한 느낌을 먼저 떠올리는 나로서는 독일을 방문하는 여행객 중 미술 전시 방문객이 압도적이라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의 이야기로 케테 콜비츠가 아니였다면 이 책을 고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케테 콜비츠를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프롤로그에서 부터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매력적인 문체와 두루두루 눈이 호사하는 이 책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책에 소개된 미술관들을 보다보면 도저히 내가 생각한 독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너무도 낭만적이고, 고풍스러우며, 무엇보다 유럽적이다. 독일이 유럽이라는 사실이 그저 새삼스러울 뿐이다. 거기에 저자는 섬세하게도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는 시간과 휴관일, 교통편 등을 자세히 적고 있다. 때문에 실제 이 책을 들고 독일의 미술관을 돈다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미술관이 있는 도시의 간단한 역사까지도 덤으로 엿들을 수 있다.

 

저자가 이 책을 기획하며 화두를 '수집'에 두었다고 했는데, 모든 수집의 역사는 착취의 역사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수집에의 욕망을 감히 사랑이라 이름할 수 있을까. 갖고싶다는, 소장하겠다는 욕망은 집착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생각과 함께 유럽의 유명 미술관 순례기를 읽을 때면 경탄과 함께 드는 씁쓸함은 이책에서도 예외가 아니였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 책에 실린 독일의 미술관을 순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여느곳 보다도 먼저 함부르크의 함부르거 쿤스트할레에서 프리드리히의 '빙해'를 보고 싶다. 저자처럼 내 입에도 시큼한 침이 고이려나. 그것보다는 먼저 소름이 돗을듯 하기도 하고.

아쉽다. 이 멋진 책에서 케테 콜비츠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알지못했던 독일인의 미술 사랑을 읽을 수 있었고, 처음보는 많은 작품들도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밝은 곳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문체도 좋지만, 미술관과 작품들, 주변환경을 담은 사진이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좋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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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츠 시네마 파티? 똥파리! - 양익준 감독의 치열한 영화 인생과 폭력에 대한 성찰
양익준.지승호 지음 / 알마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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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똥파리>를 본 것이 언제던가.

영화 <똥파리>는 생각했던 것 만큼 폭력적이였고, 생각했던 것 만큼 처참했고,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양익준이란 사람이 괜찮은 배우, 감독으로 남았다는 것과 아프게 기억되는 몇몇 장면외에는 영화의 줄거리조차 벌써 가물가물해져 버렸는데, 참 오래도 울궈먹는 다는 생각을 했다면 너무 솔직한가.

양익준 스스로도 말하고 있다. 영화 <똥파리> 이후 인터뷰를 천번쯤 했던 것 같다고. 인터뷰를 천번쯤 하다보니 자신이 한말이라도 사실인지, 진심인지 모르게 되더라고. 그런데 그렇게 변조된 인터뷰 글을 읽은 자신이, 다음 인터뷰에서 앞서 변조된 내용을 인용하고 있더라고. 결국 자신이 인터뷰에 중독되더라고.

 

영화가 상영되던 2009년 당시와 2012년 책에서 만난 양익준은 외모 면에서도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2009년의 양익준이 투박하고, 모질며,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던 상훈의 모습 그대로였다면 2012년 인터뷰집 속의 양익준은 표현은 다소 거칠지만, 자신이 해야할 말을 다듬어 할 줄 아는 배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솔직함을 장점으로, 상업성 짙은 배우가 아님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더라도.

 

인터뷰를 읽다보니 <똥파리>로 양익준을 울궈먹고 있는 것은 정작 양익준이 아닌 '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도 강렬했던 영화 <똥파리>의 기억으로 이 책을 선택했으니까.

좋으면 하고, 아니면 아닌 거라고 생각한다는 양익준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사람이다. 인기에도, 돈에도, 걸리지 않으며 그렇게 자신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만 '우리'가 배우 양익준에게 혹은 감독 양익준에게 우리에게 익숙한 역할만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 사람에 대해 솔직하고, 사랑에 대해 솔직하며,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솔직한 양익준이 이제 그만 영화 <똥파리>로 부터 자유로워져 새로운 장면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도약하는 날개짓이되던, 그렇지 못하던, 인간 양익준의 아픔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영화 <똥파리>를 보고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라면, 포장되지 않은 그의 진정성을 들여다 보았던 사람이라면, 여전히 그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믿는다.

 

-인터뷰어는 거울과 같다는 것을 새삼 생각한다. 인터뷰어 지승호는 양익준의 이야기를 거울처럼 비추며 반사해 이야기를 끌고가는 재주를 이번 인터뷰에서도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나는 한때 인터뷰어들의 이런 재주를 자신의 주관을 그때그때 포장하는 매우 간사한 일이라고 비하해 생각한 일이 있는데, 새삼 반성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의 목적은 어떻든 인터뷰이들로 부터 이야기를 끌어내야 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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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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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일이란 것이 참으로 알 수 없고, 오묘한 것이라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나야말로 어쩌다보니 사회학에 관심이 많아졌다. 불안하고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내 심리 상태를 이해하고자 시작한 심리 공부가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인데, 개인의 문제를 한개인에게만 국한시키기는 심리학보다는 한개인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사회학이 궁금해지게 된 것이다. 사회 속의 인간이며,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기에.

막상 사회학에 관심을 갖고 책을 찾다보니, 학문적인 것보다는 일상적인 내용의 사회학 책들을 주로 읽을 수 밖에 없었는데, <괴짜 사회학>, <마음의 사회학>, <나와 너의 사회과학> 따위의 책들이 바로 그랬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좋아하는 책의 장르를 물으면 망설이지 않고 답하게 되었다. "사회과학 서적을 좋아해요."

그렇게 시작한 사회학에 관한 독서로 사회학과 대학원을 생각하는 단계에로까지 이르게 되는 시점에서 만난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라는 책은 내게 단비와 같은 책이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사회학에의 초대>를 썼다는 피터 버거의 사회학자로서의 여정에 대한 고백이니 말이다.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한 책의 머리말에서 피터 버거는 인간 세상의 거대한 파노라마에 변함없이 끌리며,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죽겠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학문이 사회학이라고 했다. 여기서 궁금해 죽는 사람은 의심없이 나를 지칭하는 것으로, 나는 더더욱 광분하며 책을 끌어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피터 버거 자신이 사회학에 푹 빠지게 된 건 사회학이 한 사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려는 끝없는 노력이자, 개개인이 가진 동기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했다. 바로 내가 사회학에 빠지게 된 동기와 꼭 같았다. 그러나...

내게있어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은 그렇게 유쾌하지 않았다. 간간히 알아듣겠는 말을 빼고는 대학자의 유머를 곁들인 명랑한 문체의 가벼운 농담조차도 이해하기 버거웠으며, 사회학은 따분하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제가 되려다 어쩌다 실수로 사회학자가 된 피터 버거는 자신의 신학적 믿음에 대해 입이 무겁지 않았으며,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자주 드러냄으로써 피터 버거라는 사회학자의 보수성을 온 사방에서 느낄 수 있었다(나 혼자만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나의 곡해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바로 그점이 이 책에서 나를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가치 중립성'이란 베버의 이상을 신봉한다는 피터 버거는 사회과학자로서의 연구와 종교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라고 했다. 피터 버거는 그를 충실히 행하고 있었겠지만, 이 책을 읽는 나는 달랐다. 절대 가치 중립적일 수가 없었다. 때문에 곳곳에서 피터 버거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

 

책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 했다. 나는 피터 버거의 책에 나의 상태를 비추며 내 입맛대로 읽히지 않는 책에 자주 지루해졌고, 읽으면 읽을수록 지루함을 느끼는 내 자신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무력감을 느꼈다. 그저 단순히 사회학자의 세상 설명이 재미없었을 뿐이었다면 이다지도 실망스럽지는 않았을텐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사회학은 인간이 모여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호기심이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는 것이였지만, 학문적으로 만나는 사회학은 여타의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론 이상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역시 한 인간의 인생 여정에 관한 것이라면 자서전보다는 평전이 읽기에 껄끄럽지 않더라는 것으로 이 책을 읽은 소감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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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19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지루해서, 그리고 자기 인생사 나열이 끊임없이 나와서 어디에 포인트를 두고 읽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마감이 하루 남은 오늘 아직도 서평 못쓰고 이렇게 이웃 서재만 둘러보고 있습니다. 지겹게 읽으니 쓰는건 더 힘들더군요. 흑흑

비의딸 2012-07-19 08:59   좋아요 0 | URL
아고... 이 책으로 사회학에 대한 열망에 대해 고민스런 경험을 했던 저로서는 일개미님의 덧글로 힘이 나네요. 서평이랍시고 써놓고 얼마나 신경이 쓰였던지요. 고맙습니다. 지금쯤은 힘든 서평 마무리 하셨겠지요.^^;;

이정규 2013-01-2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회학 전공을 고민하며 우연히 이 책을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가진 느낌은 비의딸님께서 느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제가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인지 책의 내용이 그런것인지는 판단이 안서 인터넷을 보고 있는데 사회학을
깊게 공부 하지 않은 분들은 대부분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는 듯 하네요.

비의딸 2013-01-28 09:27   좋아요 0 | URL
사회학 전공을 고민하신다니, 저로서는 부러운 일이네요. 대학원을 고민하긴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보류할 수 밖에 없거든요... ^^; 사회학을 깊게 공부하지 않은 대부분의 분들이 이 책을 읽으며 저처럼 헤메셨을 것이라는 말씀에 기운이 좀 나네요. 좀더 사회학에 대한 내공이 생기면 이 책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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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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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돌적인 제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죽음의 푸가>를 쓴 유대계 시인 파울 첼란의 시구에서 차용했다는 데, 나는 아무래도 고통의 시인 파울 첼란의 시에서 불경한 이 시구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의미로, 어떤 맥락에서 쓰인 시구였는지 시를 읽고 이해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것이 결국 쉽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사키 아타루는 어째서 이 책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란 시구를 차용해 제목으로 사용한 것인가. 읽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사키 아타루는 베케트나 헨리 밀러,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와 같이 첼란이 없었더라면 사사키 자신조차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사키가 첼란에게서 읽어버린 것이 무엇이었을까.

카톨릭 신자인 나는 제목을 읽는 것조차도 너무나 불경스러워 피하고 싶었던 책이다. 종교학과 종교사회학을 공부했다는 사사키 아타루가 썼을 이 책은 제목에서만도 충분하듯, 종교가 빚어내는 여러가지 해악- 종교의 무자비성, 비상식성, 몰이해,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행위의 추악성까지- 종교에 대한 비판을 아우른 책일 것이라고 미리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히 책이, 텍스트가, 읽는 것이 곧 혁명이라는 장정일의 서평을 읽게 되었고, 그 한 단락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이 책을 읽고 싶어졌다.

 

한마디로 책을 요약하자면, 폭력적 혁명 이전에 텍스트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변화를 꿈꾸는 것이며, 옛것에 대한 거부이다. 즉, 읽고 쓰는 것이 혁명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성서를 읽고 번역하고 수없이 많은 책을 씀으로써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무함마드는 천사를 매개로 신의 말을 읽음으로써 코란을 썼다. 혁명은 폭력적인 힘에 의해 출현하는 것이 아닌 준거의 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고 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저자는 끊임없이 반복한다. 읽고, 읽고, 쓰고 써라. 더구나 사사키가 말하는 문학은 읽고 쓰는 텍스트 외에도 춤, 음악 등까지를 전부 아우른다.

사사키는 준거 읽기를 내내 반복하면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 언어가 사뭇 독특하고 열정적이다. 따라서 술술 읽히는 재미가 있다.  읽지 않고, 혹은 자신의 무의식이 투영한대로 읽고 비평과 망상을 일삼거나 비평가와 전문가 사이를 오가며 불완전한 정보를 전파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비평가들, 전문가들 혹은 독서가들에 대한 꼴사나움의 토로가 통쾌하다. 문학은 끝났다라고, 인류도 멸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말론에 대해 죽음의 공포를 선동해 모든 것을 죽음으로 귀결시키는 절대적 향락주의자들의 천박함을 몰아부치는 독설이 경쾌하다. 사사키의 표현대로 그가 있어주어 다행이다. 사사키가 거기에 있다.

옮긴이 송태욱은 옮긴의 글에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긴 해도 왠지 끌리는 책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가볍게 흘러나오는 몇 문장들에서 책 전체에 대한 평가를 좌우할 만큼 와 닿는 부분이 있어서 일 것이라고 했는데, 사사키 아타루의 바로 이 책이 그러하다. 옮긴이의 그러한 느낌은 읽은이인 바로 내 느낌과 같았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무척이나 기뻤다. 옮긴이도 나처럼 몇몇 문장에 대한 매혹으로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본다. 사사키는 어째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파격적인 시구를 차용했을까. 어디로 부터 근거하는 것인지도 모를 습관적 굴종을 택할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고 깨우쳐 스스로를 혁명하라는, 혁명하는 개인들이 모여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것 이라는 메세지를 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맹종을 거부하고 준거를 찾아 의심하라. 읽은 자신의 기억조차 의심해 반복해 읽어라. 읽지않고, 혹은 잘못 읽고 내가 옳다는 주장을 하지마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므로써 시도되는 혁명.

장정일의 말대로 다작을 선호하는 내 독서 태도에 대해 한번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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