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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저돌적인 제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죽음의 푸가>를 쓴 유대계 시인 파울 첼란의 시구에서 차용했다는 데, 나는 아무래도 고통의 시인 파울 첼란의 시에서 불경한 이 시구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의미로, 어떤 맥락에서 쓰인 시구였는지 시를 읽고 이해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것이 결국 쉽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사키 아타루는 어째서 이 책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란 시구를 차용해 제목으로 사용한 것인가. 읽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사키 아타루는 베케트나 헨리 밀러,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와 같이 첼란이 없었더라면 사사키 자신조차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사사키가 첼란에게서 읽어버린 것이 무엇이었을까.

카톨릭 신자인 나는 제목을 읽는 것조차도 너무나 불경스러워 피하고 싶었던 책이다. 종교학과 종교사회학을 공부했다는 사사키 아타루가 썼을 이 책은 제목에서만도 충분하듯, 종교가 빚어내는 여러가지 해악- 종교의 무자비성, 비상식성, 몰이해,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행위의 추악성까지- 종교에 대한 비판을 아우른 책일 것이라고 미리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히 책이, 텍스트가, 읽는 것이 곧 혁명이라는 장정일의 서평을 읽게 되었고, 그 한 단락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이 책을 읽고 싶어졌다.

 

한마디로 책을 요약하자면, 폭력적 혁명 이전에 텍스트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변화를 꿈꾸는 것이며, 옛것에 대한 거부이다. 즉, 읽고 쓰는 것이 혁명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성서를 읽고 번역하고 수없이 많은 책을 씀으로써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무함마드는 천사를 매개로 신의 말을 읽음으로써 코란을 썼다. 혁명은 폭력적인 힘에 의해 출현하는 것이 아닌 준거의 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고 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저자는 끊임없이 반복한다. 읽고, 읽고, 쓰고 써라. 더구나 사사키가 말하는 문학은 읽고 쓰는 텍스트 외에도 춤, 음악 등까지를 전부 아우른다.

사사키는 준거 읽기를 내내 반복하면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 언어가 사뭇 독특하고 열정적이다. 따라서 술술 읽히는 재미가 있다.  읽지 않고, 혹은 자신의 무의식이 투영한대로 읽고 비평과 망상을 일삼거나 비평가와 전문가 사이를 오가며 불완전한 정보를 전파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비평가들, 전문가들 혹은 독서가들에 대한 꼴사나움의 토로가 통쾌하다. 문학은 끝났다라고, 인류도 멸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말론에 대해 죽음의 공포를 선동해 모든 것을 죽음으로 귀결시키는 절대적 향락주의자들의 천박함을 몰아부치는 독설이 경쾌하다. 사사키의 표현대로 그가 있어주어 다행이다. 사사키가 거기에 있다.

옮긴이 송태욱은 옮긴의 글에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긴 해도 왠지 끌리는 책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가볍게 흘러나오는 몇 문장들에서 책 전체에 대한 평가를 좌우할 만큼 와 닿는 부분이 있어서 일 것이라고 했는데, 사사키 아타루의 바로 이 책이 그러하다. 옮긴이의 그러한 느낌은 읽은이인 바로 내 느낌과 같았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무척이나 기뻤다. 옮긴이도 나처럼 몇몇 문장에 대한 매혹으로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본다. 사사키는 어째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파격적인 시구를 차용했을까. 어디로 부터 근거하는 것인지도 모를 습관적 굴종을 택할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읽고 깨우쳐 스스로를 혁명하라는, 혁명하는 개인들이 모여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것 이라는 메세지를 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맹종을 거부하고 준거를 찾아 의심하라. 읽은 자신의 기억조차 의심해 반복해 읽어라. 읽지않고, 혹은 잘못 읽고 내가 옳다는 주장을 하지마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므로써 시도되는 혁명.

장정일의 말대로 다작을 선호하는 내 독서 태도에 대해 한번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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