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이야기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촌 누나가,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할아버지는 지리산 기슭의 어느 고을에 사시는 양반이셨단다. 신언서판이 반듯하고 훤칠한 분이셨지만 고지식하기로, 홍수가 나서 마당에 볏섬이 물에 둥둥 떠내려가도 방안에 앉하늘 천 따 지만 하시던 그런 양반 말이다.”하고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셨다.


 게다가 세도가 보통이 아니었으며 성질까지 대단해서 상민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붙잡아서 곤장을 치고 재산을 뺏기도 했단다.


 아버지께서는 막내여서 나는 당연히 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일절 할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나는 처음부터 할아버지가 그냥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알고 있던, 사촌 누나로부터 할아버지의 갖가지 만행(?)을 들은 적은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셨는데,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는 그 고을의 군수 직을 제안하였단다. 그러자 우리 할아버지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는 쪽바리들의 밥은 얻어먹지 않는다며 제의를 거절하셨고, 서서히 저들의 탄압이 시작되자 달랑 괴나리봇짐 하나만 짊어지고 과객이 되어 전국을 떠돌며 놈들을 피해 다니셨단다.


 모르는 분들은, 그래서 오늘날의 내가 친일파의 후손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때 어린 아이였던 우리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너무도 큰 시련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전국을 돌아다니시며 간간이 인편으로 소식을 전해오셨고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또 깨끗한 의복을 준비했다가 보내곤 하셨다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할아버지의 도피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활은 점점 쪼그라들었단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가족을 돌 볼 여지가 없어 가족들의 생활이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놈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면서 피해 다닌 우리 할아버지의 가족도 형편이 말이 아니었단다.


 그래서 할머니께서는 집안에 돈 될 만한 물건들은 하나씩 하나씩 다 내다 팔았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보시던 책을 팔았다는데, 양반에 선비 집안이다 보니 그 분량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궤짝 3개 분량이었단다.(그 분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지만, 내가 어릴 때 우리집에 있었던 궤짝으로 추정컨대, 궤짝 하나가 요즘의 사람 키만 한 서류 캐비닛 1개 정도는 더 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아뿔사! 그 책들 속에 우리집 족보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본의 아니게 우리집 족보를 팔아먹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신께서는 족보를 팔아먹었는지도 모르고 돌아가셨을 것이니 그것도 어쩌면 다행스런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집에는 족보가 없었다. 그리고 자라면서도 족보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조상이 어떻고, 집안이 어떻고, 족보가 어떻고 하시면서 강의를 하신다. 친구들은 자기 집에 족보가 있는데, 자기의 선조는 벼슬이 어디까지 올랐다고 자랑하고, 또 어떤 놈은 조상들이 장에 가서 물건 산 것까지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서 뻥을 치고 자랑을 해 댄다.(이놈아족보가 무슨 일기장이냐, 장에 가서 물건 산 것까지 기록하게?)


 집에 돌아온 나는 아버지께 우리집 족보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일절 말씀이 없으시고 묵묵부답이시다. 나는, 그 한참 후에 사촌 누나로부터 우리집 족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당시에 아버지께 물어 본 족보 이야기가 그렇게 아버지 가슴에 깊이 새겨졌을 줄은 몰랐다.(당시에 큰아버지들의 가계는 모두 멸절되었고 직계는 아버지 혼자였으니 당연히 족보를 물려받았어야 했다.)


 아버지께서는 어려서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자식들을 족보에 등재하지 못하신 것을 자신의 불찰로 생각하시고 그때부터 자식들을 족보에 등재하기 위해 가족들 몰래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시고 노력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때 족보 일을 봐 주겠다고 나선 친척 한 분이 계셨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되지도 않을 일을 꼭 될 것 같이 거짓말을 하고 아버지께 상당한 돈을 가져 간 일도 있었단다.


 그렇게 남에게 부탁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자 은퇴를 하시고는 아버지께서 직접 문중을 찾아가서 방법을 찾았지만 족보를 수정, 보완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기회가 닿지 않으면 사람의 노력으로도 안 되는 일

이 있다며 그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시고 포기를 하셨다.


 나는, 철없을 때 무심코 한 말들이 그렇게 아버지 가슴에 한(?)을 맺히게 하였는가 하고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십수 년이 지난 후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가 안방(드라마)과 서점가()를 강타하고 미국인들조차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는 얘기를 접했을 때는 다시 또 족보를 생각하며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는데,


 많은 세월이 흘러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족보 일을 봐 주신다며 아버지로부터 돈을 가져갔던 그 아저씨도 돌아가셨다. 그렇게 이제 족보는 내 마음 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친척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께 족보 등재를 해 준다고 돈을 받아갔던 바로 그 아저씨의 아들이다. 그 형은 자신들이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 아버지로부터 학비도 몇 차례 받아갔었고 또 자기 아버지가 한 일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 속으로 부담이 많이 되었던지 문중에서 발행하는 종보에 족보를 다시 만든다는 소식이 실리자 즉시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이번을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면서.


 나는 그 기사를 확인하고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여 우리 가족들과 형제자매의 배우자 및 자식들까지 모조리 족보에 등재하였다. 어려운 것 하나도 없었다. 호적등본에 할아버지 함자 밑으로 우리 온 가족이 다 줄줄이 있으니 따로 뭐 증명할 것도 없이 그냥 족보에 등재되었고 출간된 수십 권의 족보 중에서 우리 가계가 수록된 네 권의 족보를 구입하였다.


 이렇게 쉬운 것을, 다 때가 있는 것인데, 철없는 자식의 말 한 마디가 아버지 마음에 평생의 부담을 주다니, 후회스럽기도 했는데, 그 해 아버지 제삿날에는 제사상 옆에 족보도 함께 놓고 아버지께 보고를 드렸었다. 이제는 족보 때문에 더 이상 부담을 갖지 마시라고.


 족보 그게 뭐라고, 사실 나는, 족보가 그렇게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아들이 원했던(?) 일을 하시고자 그렇게 수십 년을 노력하셨지만 못 이루셨던 일이었고 또 나로 인해 발생했던 일이었기에 내 손으로 매듭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했는데, 왜 그러냐면, 그 족보 문제의 해결이 아버지와 나의 문제뿐만 아니라 친척 아저씨의 문제까지 모두 해결한 셈이 되

었기 때문이었다.


 그 족보,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상태로 책장 맨 밑에 꽂혀서 먼지를 덮어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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