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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군 - 디지털 리마스터링
정지영 감독, 안성기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南部軍

감독 : 정지영
출연 : 안성기. 최민수. 최진실. 이혜영. 김태기. 조형기. 트위스트 김. 임창정.
독고영재. 남포동 등
수상 : 제11회 청룡 영화상 감독상(정지영). 남우주연상(안성기). 남우조연상
(최민수). 여우신인상(최진실) 수상.
1990년에 개봉된 영화로 실존했던 인물 이태의 생생한 체험 기록을 작품화하였다.
지나고 돌이켜 보면, 해방 이후 6.25 사변까지 우리를 둘러싼 대내외적인 환경은 엄청나고 급격한 변화를 거듭했다고 여겨진다. 그 중, 우리나라의 미래의 운명을 가를 가장 중요한 내부적인 변화라면 단연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나열하고 있는 큼직한 사건들의 진행은 아래와 같다.
1945. 8. 15 해방 → 8. 20 소련군 북한 진주 → 9. 9 미군 남한 진주 → 1946. 2. 15 박헌영, 여운형 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 → 10. 2 대구 사태 → 11. 23 남로당 결성 → 1947. 5. 7 미소 공동위원회 협상 결렬, 냉전 시대 개막 → 7. 19 근로인민당 당수 여운형 암살 → 1948. 4. 3 제주 4.3 사태 → 4. 19 남북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평양 개최 → 5. 10 남한 단독 선거 → 10. 20 여순 반란 → 1949. 6. 25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 암살 → 1950. 6. 25 한국전쟁 발발 → 7. 12 한국군 통수권 미국에 이양 → 9. 2 낙동강 전투 → 9. 15 미군 인천 상륙.
이태는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여 합동통신사를 접수하자 평양의 조선중앙통신사 소속이 되어 종군기자로 전주에 머물러 있다가 1950년 9월 미군이 군산 앞바다의 오식도에 상륙하면서 후퇴의 길에 오른다. 후퇴의 길은 혼란스러웠다. 그와 일행들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의 대원이 되었다. 그들은 사변 전부터 야산대 활동을 해 오던 ‘구(舊)빨치’를 조장으로 조를 편성하여 활동했다.
전세의 변화에 따라 남부군은 부대를 개편하게 되는 데 이때 이태는 '지리산 승리의 길'이라는 빨치산의 진중신문 편집과 전사기록의 책임을 맡아 빨치산의 전투 활동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얼마 후 빨치산에게 전투 회담의 소식이 전해지자 빨치산은 이제 북으로의 귀환과 열렬한 환영을 기대하며 가슴이 부푼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남쪽으로부터의 추격과 북쪽으로부터의 버림을 받게 되는 남부군의 최후의 서곡이었던 것인데......
영화는 비교적 원작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원작이나 영화나 모두 독자나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주제의식이 뚜렷하지 않아 그냥 체험 수기 정도에 머문 것이 아쉽기도 했다.
원작은 소설 태백산맥을 읽다가 등장하는 빨치산의 가공되거나 미화되지 않은, 보다 사실적인 정보를 얻고자 읽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이런 얘기들이 있었다.
『대원들은 잘 때도 신발을 벗지 않았으며 도당 간부, 여자, 남의 집 머슴살이하다가 온 사람 등 다양하였지만 그 중에 스무 살 안팎의 예쁘장한 소녀가 인기의 중심이기도 했다.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이렇게 세 가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3금(禁)이라는 게 있는데 소리, 능선, 연기(밤에는 불빛)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특히 치명적인 실수는 오발이며, 오발하면 무조건 즉결처분이다.
보급투쟁 때는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과오를 저지를 경우 조사나 해명 없이 구두 선고로 사형을 집행했다. 총알이 아깝다고 총창(총검의 북한 말)으로 집행하기도 했다. 아지트를 정하고 사고로 부대가 분산 됐을 때를 대비해 재집결할 수 있는 장소를 ‘비상선’으로 정했다.
필자는 소대장을 맡았는데 소대원은 의용군 출신의 대학생, 남자 고등학생, 여고 졸업반인 학생, 여공 등 경력이 다양했다. 여자 대원들도 잠자리 등 모든 것이 남자 대원과 구별이 없었다. 몇 번의 매복 작전을 펼치고 회문산에 도달하여 역습을 받기도 하였다. 빨치산들은 군화가 부족하여 고무신, 짚세기, 또는 맨발이었다.
1953. 12. 1부터 전개한 국군 5사단의 겨울철 토벌작전이 1954. 2월에 종료되면서 1949년 이래 5년여에 걸친 소백·지리산지구 공비토벌 교전 10,717회, 전몰군경의 수가 6,333명에 달하고 빨치산 사망자 1만 수천, 피아 2만의 생령이 희생된 남한 빨치산의 처절했던 역사도 끝이 났다.』
우리의 아픈 역사의 한 부분을 들여다 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