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장편대하소설(전7권
행림출판사 / 1990년 4월
평점 :


임진왜란

                                                                                               김성한

 

[ 6 ]

 

 행주산성의 대승은 일본군도 놀랐고, 조선군 자신도 놀랐다. 항상 고자세로 나오던 이여송도 선조에게 치하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전쟁이 일어난 지 10개월, 조선에 건너온 병력의 3분의 1이 없어졌고 식량도 바닥이 나고 있었다

 

 일본의 장수들은 회의 끝에 행장을 내세워 화평을 교섭하기로 했고, 행장은 다시 심유경을 만나야 했다.

 

  간도로 쳐들어갔던 가등청정이 여진족에게 패하여 거의 절반의 군사들을 잃고 거렁뱅이 몰골로 함경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의병들에게 쫓기고 추위와 씨름하고 있었다. 송응창이 화평을 요청했고 청정 역시 화평을 간절하게 원했다. 청정은

군사들을 이끌고 서울로 후퇴했다.

 

  화평이 성립되었다. 일본군은 부산 방면으로 철수하고 두 왕자는 서울 철수와 동시에 방면한다. 명나라는 일본에 봉공을 허락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사신을 일본에 파송한다. 봉공이 실현되면 일본군은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이 무렵 명군은 앞으로 나가자니 겁이 나고, 더 이상 물러서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고, 엉거주춤 세월만 허송하고 있었는데 서울을 수복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적은 일거에 1천 리를 후퇴하여 부산까지 물러간다고 하였으니 놀라운

, 기막힌 일이었다. 심유경은 중생을 제도한다는 부처님이나 진배없게 되었다.

 

  송응창은 일본으로 건너갈 사신을 지명하였다. 사용자를 정사, 서일관을 부사로 하고 심유경은 부산까지만 갔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했다. 부산까지 후퇴하여도 무방하다는 풍신수길의 철수령도 일본군 진영에 도달했다. 그날부터 일본군은 짐을

꾸리고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일본군이 물러나고 수복한 서울은 1년 전에 잃은 서울, 꿈에 그리던 서울은 아니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가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1백 명의 도굴단을 만들어 왕릉을 도굴하고 시신과 뼈 등을 훼손하고, 흩어버리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었다.

 

 일본군의 총공세에 진주성이 함락되어 폐허가 되었고 선조는 서울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2년 동안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한데다 흉년까지 들었다. 게다가 명나라 관헌들의 농간으로 참전 이후 8개월 동안 명나라에서 보내오는 양곡의 절반 이상인 16만여 섬이 도중에서 없어졌다. 부족분은 고스란히 조선의 부담이었다.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고 군대에서는 도망병이 속출했다. 무수한 백성들이 굶어죽고, 마침내 일부 지역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태까지 벌어

졌다. 도둑들이 나타나 반란을 획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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